1968년 오늘(6월 16일)은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시인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이 48년의 짧았던 삶을 마감한 날이다. 전날 밤 소설가 이병주, 시인 신동문과 함께 술을 마신 뒤 귀가하다 버스에 치였던 시인은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신동엽(1930~1969)과 함께 1960년대를 대표하는 참여시인 김수영은 그렇게 덧없이 세상을 떠났다.
김수영은 1921년 서울 출신이다.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 도쿄상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가족들과 함께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했다. 김수영은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연희대에 편입했다가 중퇴를 했다.
모더니스트에서 참여시인으로
김수영은 한국전쟁 때 ‘문화공작대’라는 이름으로 의용군에 강제로 끌려갔다 탈출했다. 그러나 이 일로 서울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기도 했다. 1952년 11월에 동료 문인들의 도움을 받아 석방된 남다른 이력을 갖고 있다. 이때의 경험이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제3연에도 나온다.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에서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해방 무렵, <예술부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부터다. 이후 그는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펴내면서 1930년대 김광균 등에 이은 모더니스트로 주목을 받았다.
김수영이 초기 모더니스트로서 현대 문명과 도시를 노래하다 현실을 비판하는 저항적인 참여시를 발표하게 된 것은 4·19혁명이 계기였다. ‘자유’에 섞인 ‘피의 냄새’와 ‘혁명’의 ‘고독’을 노래한 ‘푸른 하늘을’이나 ‘4·19시’, ‘하…그림자가 없다’ 같은 시들은 바로 4월혁명 직후에 쓰인 것이었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푸른 하늘을’ 중에서
4·19 직후에 김수영은 “창작의 자유는 100%의 언론 자유가 없이는 도저히 되지 않는다. 창작에 있어서는 1%가 부족한 언론 자유는 언론 자유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다.”고 하면서 문제의 시 ‘김일성 만세’를 썼다. (‘부분적 언론자유국’ 대한민국)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나는 잠이 깰 수밖에
– ‘김일성 만세’
그러나 혁명의 열기 속에서도 이 시는 발표되지 못했다. ‘잠꼬대’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현대문학>에 기고했지만 회사에선 이를 반송한 것이다. 이 시가 빛을 본 것은 48년 만인 2008년, <창작과비평>을 통해서다.
시인은 “한국의 언론 자유의 출발은 이것을/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라고 했지만 우리 역사는 이날 입때까지 그걸 인정하는 않고 있다. 반세기가 흘러갔지만, 여전히 그것은 금기의 언어고, 그 금기를 넘는 순간 ‘자유’는 묶여버리고 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김수영을 열에 들뜨게 했던 4월혁명은 그러나 390일 만에 미완으로 끝났다. 이듬해 5월 박정희의 쿠데타, 그 군홧발이 혁명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군부독재가 시작되면서 다시 끝없는 자기 검열의 시대가 펼쳐졌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김수영은 시를 통해서 부정한 권력과 사회적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는 소시민의 자기반성을 노래한다. 소시민적 삶의 자세를,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의식을 고발한다. ‘왕궁의 음탕 대신에/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옹졸하게 욕을 하’는 자신을 풀, 모래, 먼지에게 얼마나 작으냐고 묻는 것이다.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에서
‘창조를 혁명으로 사유한’ 가장 불온한 시인
1968년 4월,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고 일갈한 시인은 “새로운 삶의 창조를 일종의 ‘혁명’으로 사유”한 시인, ‘반시대적 인간’(고봉준), 당대에 가장 ‘불온한’ 시인이었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反動)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삼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거대한 뿌리’ 중에서
시인은 ‘씹’, ‘개좆’, ‘좆대강이’ 등의 파격적인 시어로 과격한 혁명관을 드러낸다. 그는 반전통적인 것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요강, 망건, 장죽 등의 전통 시대의 ‘무수한 반동(反動)’에 대한 긍정과 호의를 은근히 과장한다. 그것은 그의 ‘거대한 뿌리’, 우리 역사적 전통에 뿌리박은 정직한 현실인식이 철근기둥보다 더 강하다고 외치는 것이다.
<문학>교과서마다 실려 있는 시 ‘풀’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나는 문제풀이식 문학교육이 그나마 김수영을, 신동엽을 배우게 하는 것 같아서 씁쓸히 안도하곤 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 중에서
‘젊은 정신’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누렇게 바랜 시집을 뒤적이다가 ‘국민의 정부’ 때 시인에게 금관문화훈장(2001)이 추서된 사실에 머리를 끄덕인다. ‘시대의 거부로 이어진 자유와 치열한 양심의 시인 김수영을 기리기 위하여’(민음사 누리집) 1981년에 민음사에서 제정한 김수영문학상은 어느새 35년의 연륜을 쌓았다.
정희성(<저문 강에 삽을 씻고>), 이성복(<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황지우(<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비롯, 최승호(<고슴도치의 마을>), 장정일(<햄버거에 대한 명상>), 유하(<세운 상가 키드의 사랑>), 나희덕(<그곳이 멀지 않다>) 등 수상 시인들의 면면도 일찍이 한국 시단의 ‘가장 젊은 정신’ 김수영을 잇고 있는 듯하다.
표제작 ‘사랑의 변주곡’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48년 전에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우리를 떠난 시인의 꿈을 생각한다. 이후 펼쳐진 역사의 격랑 속에서 이어진 숱한 김수영을 떠올린다.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은 것” 같은 ‘사랑의 절도’를 다시 생각한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