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살다 안철수를 변호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실시간으로 지켜본 건 아니지만, 위의 캡쳐에 따르면 2번 트윗 뒤에 3번이 온다. 이 가운데 2가 논란이 되자 2, 3을 지우고 3을 2로 고쳐 새로 올린 상태다. (만약 2가 논란이 돼서 3을 뒤늦게 붙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아래 얘기를 하는 데 무리는 없어 보이니 그냥 적겠다.)
1-2-3을 함께 읽었을 때의 맥락
이 맥락에서는 2번 트윗이 별로 문제적인 발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핵심적인 얘기 아닌가. ‘여유 없는’ 사람들만 위험한 일에 위험하게 투입된다. ‘여유’라는 워딩이 좀 어색하지만, 최대한 호의적으로 해석하자면 학벌이나 물려받은 재산과 같은 ‘사회적 자본’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위험은 어김없이 없는 자들에게만 찾아온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산재로 죽는다.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 같은 인식이 3번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죽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사회적 자본이 없는 사람들부터 위험한 일을 택하는’ 상황은 당장 바뀔 수 없다. 하지만 위험한 일에 위험하지 않게 투입되게 할 수는 있지 않냐는 얘기다. 물론 이는 가난의 대물림, 비정규직 문제, 안전보다 효율을 우선하는 경영과 같은 구조들을 바꿔야만 완전히 해결되는 문제임에 틀림없지만, 당장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취하는 게 맞다.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조금이라도 위험을 줄이자’는 게 안철수가 내놓은 대안이다.
사실은 당연한 얘기를 한 게 아닌가
문제상황-현상진단-대안제시로 이어지는 당연한 얘기다. 이게 문제를 개인에 환원하는 얘기란 비판을 이해하려고 해봐도 잘 이해가 안 된다. 사회적 자본이 없어서 위험한 일을 택했다는 것은 너무나 계급적 현상 아닌가. 이 사실을 모른 척하고 마치 모두가 저런 위험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게 도리어 기만 아닌가?
또한 안철수가 내놓은 대안이 결국 구조적 문제를 가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정도 수준의 비판만 가하면 된다. 그는 보수적인 정치인이고, 그의 스탠스에서 취할 수 있는 수준의 대안을 내놓은 것뿐이다.
너무나도 안철수스러운
어떻게 보면 안철수가 필요 이상의 비난을 받은 것은 자업자득이다. ‘2번’이 붙어 있으므로 앞뒤 맥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고려를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안철수의 트윗을 비난한 건, ‘금수저’이고 서민들의 삶을 잘 알지 못하는 나이브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안철수가 평소에 개선하려 하지 않은 탓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같은 상황은 안철수 본인이 악화시킨 것도 있다. 논란이 발생하면 그에 대해 설명할 생각 없이 일단 지우고 보는 게 너무나 안철수스러운(…) ‘간보기’ 아닌가. 자기 주관 없이 대중의 반응에 자기 주관을 맞춰가는 정치인은 최악이다.
안철수를 ‘폭격’하는 것의 의미
덧붙여, 나는 2번에서 저 트윗이 끝났대도 지금 이 상황에서 안철수를 일제 폭격하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나 싶다. 좀 더 사태 자체에 에너지를 쓰는 게 유익한 시기다. 노동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가만히 애도하거나, 그와 같은 죽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적 운동을 기획하거나, 또는 이미 벌어지고 있는 운동-포스트잇 붙이기와 같은-에 참여하거나, 정치권이 이 사태에 좀 더 관심을 가지도록 항의하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모호하고 빤한 말로 가득한 트윗에 증오를 퍼붓기엔 아까운 시기이지 않나.
원문: 강남규 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