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ability, Hate Crime and Violence>(2013)라는 책에 나오는 문장 두 개를 옮겨둔다. 그리고 나름의 고민과 이해에 따른 설명을 약간 덧붙여본다. 이번 강남역 살인 사건뿐만 아니라 (중식이 밴드 여혐 논쟁을 비롯한) 다른 많은 경우들에서, 그게 왜 혐오 범죄/폭력/표현이냐고 분개하거나 의아해 하시는 많은 남성분들도 함께 읽고 같이 고민해 주셨으면 좋겠다. 지금은 듣고, 고민하고, 성찰할 때이므로.
반박1. 그 사람은 여성을 ‘혐오해서’ 죽인 것이 아니다?
“혐오범죄에 대한 학문적 기여들은 혐오범죄라는 개념에, 그것이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띠어왔다. 이러한 정의들을 살펴보면 혐오범죄들이 가해자가 피해자를 ‘혐오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점에 대해 상당한 합의가 존재한다.”(13쪽)
이 문장을 읽으며, 많은 분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당혹해 할 수 있겠다. 일단 위의 인용문은 “‘혐오하기’ 때문에” 앞에 ‘의식적으로’를 넣어 읽으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소수자 혐오에서 이야기하는 ‘혐오’는 자신이 직접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넘어서는 어떤 것, 비(非)의식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에 가깝고, 그래서 스스로 자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부연하자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물든 아버지들이 집에서 어머니나 자식들에게 가부장적 행동을 보일 때, 그 스스로 자신이 가부장적이라고 의식하며 그런 행동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무의식적 혹은 비의식적으로, 그러니까 ‘그냥’ 그런 행동을 한다.
또한 여성차별/장애차별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우리 사회에서 대다수 남성/비장애인들 역시 자신이 여성/장애인을 차별한다는 자각이나 의식 없이 그냥 그와 같은 차별 행위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혐오범죄들이 가해자가 피해자를 [의식적으로] ‘혐오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경험적 결론과 합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도출된다.
심지어 강자(다수자)는 약자(소수자)를 사랑하거나 동정한다고 느끼면서 그러한 혐오범죄[폭력]를 저지를 수도 있다. 부부나 애인 간에 발생하는 폭력, 장애인의 경우 평소 호의를 베풀었던 돌봄제공자에 의해 발생하는 폭력이나 범죄를 떠올린다면 이런 말이 조금은 더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요약: ‘혐오범죄’에서 혐오는 ‘의식적인 혐오’에 한정되지 않는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란 본디 비/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작동한다.
반박2. 여성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타깃이 되었을 뿐, 여성혐오는 아니다?
“의심할 바 없이 상당수 범죄들이 [피해자의] 취약성이라고 인식된 것에 의해 추동되지만, 우리는 취약성을 혐오와 분리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연결된 범죄 동기들의 스펙트럼 상에 그러한 취약성이 놓여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만 한다.”(21쪽)
이번 강남역 살인 사건을 두고도 그런 말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여성이 범죄의 대상이 된 건, 혐오 때문이 아니라 그저 범죄를 행하기 쉬운 약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라는.
그러나 현재와 같이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고, 낙오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무한 경쟁의 약육강식 사회에서, 강자와 능력 있는 자는 비의식적인 차원에서 동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고, 약자와 무능력한 자는 비의식적인 차원에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아니 오히려 ‘약함’과 ‘무능력함’이라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속성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여성과 더불어 ‘계집애 같은’ 남성이, 장애인과 더불어 ‘병신 같이 구는’ 비장애인이 또래나 동료 집단에서 쉽사리 왕따와 멸시와 폭력의 대상이 된다. 여성이었기 때문에 혹은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폭력의 대상이 되었을 때, 위에서 언급했듯이 가해자 스스로 혐오한다는 의식이 뚜렷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혐오폭력의 자장 내에 있는 것이다.
비키 키엘링예르(Vicky Kielinger)와 베치 스탄코(Betsy Stanko)가 사용하는 표현을 빌자면, 그래서 특정한 약자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표적화된 폭력’(targeted violence)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혐오폭력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것이다.
요약: ‘여성의 약함’과 ‘혐오’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그 ‘객관적인 약함’ 역시 사회적으로 구성된 산물이다.
반박3. ‘여성차별’이 존재할 뿐 ‘여성혐오’는 없다?
더불어 혐오와 차별의 관계에 대해서도 좀 더 고민해보자. 옥스퍼드영어사전은 ‘여성혐오’(misogyny)를 “여성에 대한 증오나 반감, 또는 편견”(hatred or dislike of, or prejudice against women)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편견’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바로 연결되어 떠오르는 단어, 즉 연상(聯想)되는 단어는 사실 ‘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정의를 참조하자면 우리는 혐오를 차별과 뚜렷이 구별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대상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 이데올로기가 일정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모종의 ‘적의’(hostility)를 수반하며 표출되는 상태나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 사회가 바로 그러하며, 그러한 적의로 인해 단순한 차별에 비해 훨씬 더 공격성과 폭력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요약: 혐오는 차별과 다른 것이 아니라 차별이 표출되는 한 방식이다. 당신들이 끊임없이 ‘여성혐오’와 구분지으며 다르다고 주장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다.
원문: 김도현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