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세상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구나,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우리는 스스로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은 그러한 잘못조차 없는 깨끗한 사람이고자 욕망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리라. 끊임없이 변명하고 은폐하고 거짓말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우리 남자들에게 있어,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은, 그래서 어려운 요구가 된다.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남자로 태어나서 살아왔던 자기 삶의 모든 순간에 알게 모르게 행해 온 여성혐오라는 죄악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이에 따르는 ‘부끄러움’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기 때문이다.
못생긴 여자를 희화화하는 개그콘서트의 코너에 자지러지게 웃고, 길 가는 여성의 외모를 품평하고, 여성보다 더 좋은 직업, 더 높은 수입을 갖는 것을 당연시하고, 여성이 자신과 같은 (혹은 더 나은) 능력을 갖췄다는 것에 패배감을 느끼고, 단지 섹스를 위해 거짓말을 하고, 여성에게 잘난 척을 하고, 여성에게 일방적인 헌신을 요구하고, 여성 일반을 ‘된장녀’라는 이름으로 싸잡아 비난하고, 여성의 능력을 의심하고, ‘욱해서’ 폭력을 휘두르고, 마치 자아가 없는 상품처럼 그들을 대하고.
이것들은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저질러왔고, 또한 저지를 수 있는 잘못들이다. 즉 우리는, 여성혐오 문제에 있어서는,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이미 가해자였고 가해자이며 가해자일 것이라는 얘기다. 나와 당신들, 그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다.
우리는 이 구조를 지탱해왔다
우리가 살인자를 쉽게 비난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대부분은 (당연하게도) 살인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인자 앞에서 ‘나는 살인을 한 적이 없노라’고 당당해질 수 있다.
하지만 여성혐오 문제는 그렇지가 않다. 우리가 모두 여성혐오라는 구조를 지탱하는 소극적/적극적 행위자였기 때문에, 그리고 마음 한 켠에서는 이미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여성혐오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혐오를 문제시하는 사람들에게 그 화살을 돌린다. 여성혐오가 존재하고, 여성혐오가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지금까지 행해온 온갖 잘못들이 비로소 ‘잘못’이었다고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창피해지기 때문에. 죄책감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남혐도 심각하다’ 내지는 ‘남녀가 함께 노력해요’ 라는 언설을 자꾸만 구사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그래, 잘못인 건 인정해. 하지만 너희도 잘못했잖아? 너희도 문제잖아? … 이건 물론 겉으로 봐도 피장파장의 오류일뿐더러,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가, (그러한 여성혐오에 분노하여 나타난) ‘남성혐오’와 같다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사실이다. ‘나만 잘못한 게 아니다’라는 싸구려 위안을 얻기 위해, 우리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너무나도 쉽게 날려버리고 있다. 그리고 그사이에 여성혐오의 피해자들은 늘어만 간다.
여성혐오의 굴레를 끊어내기 위해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우리를 결코 더 나쁘거나, 더 끔찍하거나, 혹은 더 추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그러한 잘못을 시정하기 위한 목소리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해주는 일종의 구원이며, 여성혐오의 죄책감에서 진정으로 해방되는 길이다.
여성혐오라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항변하기 위해 지금의 사람들이 얼마나 더 많은 여성혐오를 저지르고 있는지 둘러봐라. 고작 자존심 때문에, 우리는 지나치게 큰 비용을 치르고 있는 것이며, 지나치게 많은 희생자를 ‘새로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창피하고 이보다 추한 일은 없다.
우리가 스스로의 잘못을 부정하기 위해 동원한 온갖 억지와 거짓말과 폭력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가 일부러 무시해왔던 여성들의 분노와 고통을 마주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연대하여, 여성혐오를 의식적으로 끊어내야 한다. 이는 아주 고통스러운 작업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나 자신이 해왔던 수많은 일상적인 행동에 여성혐오와 남성우월주의가 존재했음을 깨닫고, 그때마다 상대가 느꼈을 감정들을 상상하고, 창피함과 미안함에 이불을 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상상해봐라. 그 얼마나 자유로운 광경인가. 더 이상 나 자신을 억지 논리로 변호하지 않아도 되고, 여성혐오를 지적하는 목소리에 폭력을 가하지 않아도 되고, 연대할 수 있고, 잘못을 ‘덜’ 저지를 수 있고, 게다가 훗날 ‘나는 성 평등을 위해 조금이나마 노력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원문: High and Lou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