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이 사건이 여성혐오에 의한 것이다/아니다’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들이 “여성혐오에 대한 지극히 제한적인 몰이해를 대중화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는 타당한 지적이 있었다. 동의하면서, 다만 첨언하고 싶은 것은 여성혐오에 대한 대중의 단편적 이해를 형성하는 것은 이를 여성혐오 범죄라고 말하는 쪽이라기 보다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쪽이라는 점이다.
이 범죄가 여성혐오 범죄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여성혐오가 작동하는 다양한 층위와 복잡한 동학을 함께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아니라고 말하는 쪽은 훨씬 더 단편적인 ‘정보’들에 집중하면 되고, 그렇게 하고 있다. 예컨대, “정신질환”이나, “꿈의 좌절”, “칼부림”이라는 자극적 장면 따위 말이다. 그렇게 단편적인 정보에 집중하면서 그들은 이 사건을 둘러싼 광범위하고 깊은 여성혐오 문화의 맥락을 탈각시키고, 이 사건을 “정신병+우발적이며 우연적인 살인”이라는 자극적 소재로 앙상하게 축소시킨다.
이 사건의 앞, 뒤, 옆에는 훨씬 더 많은 맥락들이 놓여있다. 그리고 그 맥락에는 피해자 여성의 삶과 일상 역시 함께 놓여있다.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살인사건의 단편적 순간이 아니라, 그 여성의 삶 자체를 함께 보고자 한다. ‘우리’가 우는 이유는, 탈맥락적 사고가 아니라, 맥락적 사고 안에서의 공감 때문이다.
이 범죄를 여성혐오 범죄라고 말하는 이들은 자극적 소재주의를 넘어 그 사건의 맥락을 보자고 말하는 것이며, 그 맥락 안에는 이미 ‘하층 계급 남성의 불안’에 대한 주목이 놓여있다. 어째서 사회의 불안은 남성의 불안으로 곧바로 치환되며, 남성의 불안은 정형화된(이 경우는 ‘나를 무시하는 여자’라는) 여성에 대한 가학적 처벌을 정당화하는가. (여기서 ‘정당화’란 범죄 자체에 대한 정당화가 아니라, 젠더화된 범죄가 아니라는 물타기를 통해서 ‘페미사이드’를 정당화시킨다는 의미다.)
좌절한 남성이, 아무 인과관계 없는 여성을, 1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노려 살해했다. 정신 상태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유로 댄 것이 “여자가 나를 무시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은 이 사회가 여성혐오를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인 사건 자체도 여성혐오 범죄이지만, 그 이후에 언론의 보도 양태, 이것이 여성혐오가 아니라고 말하는 담론 등도 다 물론 여성혐오를 바탕으로 한다. 무엇보다 이것이 여성혐오 사건인 이유는 이 과정 전체가 여성들에게 공포심을 안기고, 스스로를 단속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놀라운 것은 그 ‘단속의 메커니즘’을 깨고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 자신을 드러내며, 공감을 표현하는 여성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이지 말라고 요구하는 여성들이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남녀 성대결’이 벌어지지 않았고, 어떤 평화로운 공존이 유지되고 있었다면, 그건 여성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평화는 그런 여성들의 내면화된 자기 단속을 통한 ‘그들을 위한 평화’였다.
이 사건을 여혐 사건이라고 말하면서 남녀 갈등을 부추긴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희생과 침묵과 자기혐오로 유지된 평화는, 기실 평화가 아니지 않은가. 남녀 갈등은 이미 있었다. 가시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걸, 다시, 또, “떠드는 여성들”의 책임으로 내모는 것이, 마지막으로, 이 사건의 여성혐오적 성격을 완성한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는 정말 중요한 문제다. 그 생각을 계속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전에, 공감이 아쉽다. 어떤 식으로든 빠른 해결을 위한 잔 걸음보다, 마음이 움직이는 시간이, 사유가 넓어지는 간극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좀 더 귀 기울이고 궁금해 하고 돌아보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남성’인 ‘우리’에게 요청한다. 진심을 내어달라고. 그리고 ‘함께’ 해달라고. 이 사건을 경유해 여성인 우리가 적대하는 것은 남성 개개인이 아니라, 그 개개인을 통해 현현되는 어떤 구조이다. 개인 너머의 구조가, 우리는 두렵다. 그리고 그 구조를 개개인에게서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 여성혐오를 바탕으로 하는 ‘강간문화’의 효과이기도 하다.
여성을 무시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대단치 않은 것으로 여기는 강간문화는 남성과 여성을 가르고, 여성을 죽이며, 여성을 단속하고, 그렇게 남녀 성대결을 부추겨 체제를 지속시키는 시스템이다. 당신이 “난 아니야”가 아니라, “나에게서 그런 것을 보게 만드는 이 구조를 함께 바꾸자”라고 말하게 된다면 좋겠다. “내 뒤로 숨은 구조를 함께 꺼내보자”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원문: 손희정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