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현-지민 역사논란에서 이슈가 된 것은 그들이 민족 영웅 안중근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응당 기억해야 할 역사를 기억하지 못했던 그들을 호되게 꾸짖었고 설현과 지민은 눈물로 사죄했다.
그들은 왜 사죄해야 했을까?
하지만 궁금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사죄해야 했을까? 사실, 역사 서술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억했느냐가 아니라 그들을 왜 기억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다. 한국 역사에서 제국주의 권력에 저항한 민족해방운동은 당시 역사에서 진보적 가치가 있었다. 해방 이후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민족 영웅이 소환되는 방식 역시 일반적 현상이다.
문제는 그것이 소비되는 방식이다. ‘민족 해방의 영웅’이 과도하게 소환되면 그것은 또 다른 권력이 된다. 한국은 아직 친일청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필요하다고 보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그런데 친일 청산이 아직 되지 않은 것 맞나?)
하지만 국민국가 권력이 민족 영웅을 소환하는 것은 해당 국가의 탈식민 정도와는 무관하다. 굳이 소환하지 않더라도 국기에 대한 맹세, 올림픽, 월드컵, 매일 생산되는 뉴스와 신문 기사를 통해 매번 소비되는 것이 ‘민족’ 혹은 ‘국민’이다.
모든 이슈는 민족 앞에 무릎을 꿇는다
식민지배를 겪은 한국 역사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민족 영웅’의 소환에 대해 좀 더 너그러운 시선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습적 피해자 민족주의 담론이 하나의 절대적 진리로 기능하는 것에 대한 성찰이 없는 ‘소환’은 위험하다.
계급, 성별, 지역 등으로 다르게 구획된 각 주체들의 욕망은 ‘민족’ 앞에 서면 초라해져버린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여성주의적 접근은 식민 책임을 희석시키는 논리라는 딱지 앞에 무력해지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국가 발전의 대의 앞에 이기적 욕망으로 격하된다. 성소수자 문제 등 각종 마이너 담론들은 ‘당연히’ 명함조차 내밀지 못한다.
우리가 욕하는 그녀들의 인권을 우리는 고민했는가?
설현과 지민이 안중근을 몰랐던 것을 ‘개념’ 없는 행동이라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 그녀들의 ‘몸’이 자본 권력에 신나게 소비되었던 현실을 진지하게 비판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비인간적 몸매 관리와 섹스어필 컨셉 강요 등 연예계 인권의 전반에 대해서 ‘개념’ 있게 고민한 사람이 그 중에 몇 명 있을까?
어떤 역사를 기억(기념)할 것인가의 문제는 그 자체로 가치지향적이다. 역사적 기억을 단순화시키는 것은 독재의 첫 걸음이다. 현 정권이 왜 국정교과서를 만들려하는지 생각해보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왜 기억 못해?’라는 꾸짖음이 아니라 ‘왜 기억해야 하지?’라고 끊임없이 되묻는 과정이다. 그 과정 속에서 ‘이것도 기억하자!’라는 방식으로 기억을 넓힌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p.s
아래 사진은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했던 1907년 말에 영국인 종군기자 매켄지가 찍은 의병들의 사진이다. 이 의병들의 이름을 몇 명이나 아는지 살펴보시라.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사진을 찍은 매켄지도 이름을 몰랐으니까.
역사에서 ‘이름’이 기억되는 사람은 어차피 극소수다. 안다고 해봤자 모래사장의 모래 한 줌이라는 얘기다. 이제 한 줌도 안되는 기억의 편린들을 취하는 것이 ‘역사의식’이라는 생각은 사라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