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희생자들: 하층계급과 축구팬들
“자전거를 타고 일자리를 찾아다녀라.”
– 노먼 테빗(Norman Tebbit) 전 내무장관 겸 전 보수당 의장
“난 몇 년 안에 가족들을 데리고 이 나라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냉정하고 비열한 이곳이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는다.”
– 앨런 무어(Alan Moore), 『브이 포 벤데타』 의 서문에서
그녀의 희생자들이라면, 일단 앞서 말했던 전통적인 중공업 노동자들이 있겠다. 분명 영국 노조들이 문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자들도 그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노동자 계층의 노동당 지지율은 74년에는 64%였지만, 83년에는 49%까지 뚝 떨어진 상태였다.
저 유명한 탄광노조 파업에서도, 파업이 비민주적이고 비합법적으로 추진되었다는 것은 대처 정부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노팅엄과 남웨일스에서는 28개의 탄광 가운데 10개소만이 파업을 지지했다. 당시 탄광노조위원장이던 아서 스카길(Arthur Scargill)에 맞서 노팅엄 광부들이 계속 탄광에서 조업하며 새로운 민주탄광노조를 만들었던 것도 대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나름 해피엔딩이 연상되겠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대처 시기의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탄광들조차, 전력 민영화의 후유증으로 모조리 쓸려나가고 말았다. 야, 신난다! (…)
대처는 긴축과 구조조정으로 생긴 당시의 실업자들에게 동정심을 표했으나, 일자리를 구하지 않고 국가 보조에 기대어 사는 이들의 도덕적 해이를 비판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가? 2011년 기준 영국의 실업률 7.7% 중 3분의 1은 장기 실업으로 회생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 그들이 일자리를 잃은 것이 바로 대처의 긴축과 구조조정 때이다.
리버풀 신정책 연구원 톰 매킨스의 말을 들어보자. “마거릿 대처 정부의 경제개혁은 기존의 많은 산업도시들-뉴캐슬과 버밍엄에서 맨체스터와 셰필드에 이르기까지-에 혹독한 유산을 계승시켰다. 당시 산업 터전을 잃은 제강공과 기계공, 광부들의 새로운 일자리에 대한 소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1980년대에 실직한 사람들의 40~45%는 다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장애복지기금 같은 사회기금으로 연명하는 계층으로 도태됐다.” 하지만 대처가 그들에게 준 것은 동정심 뿐…이었나?
글쎄? 영국 출신의 축구 칼럼니스트인 존 듀어든은 축구팬의 입장에서 대처 시절을 회고한다. 그는 대처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축구를 이용했으며, 영국 대중들은 훌리건이 고실업 등으로 인한 사회 문제임을 깨닫고 있었으나, 대처는 훌리건이 축구 때문에 생겨났다 주장하며 축구팬들을 핍박했다고 비판했다. 1989년, 셰필드의 힐스버러 경기장에서 관중석이 무너져 무려 96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대처 정부는 자신들의 잘못은 묻어버리고, 힐스버러 참사를 축구로 표출된 중하위 계급의 불만을 단순한 난동으로 호도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인두세(poll tax) 문제를 빼놓을 수가 없다. 대처는 지방세를 폐지하고 인두세를 도입하려 했는데, 명목상으로는 대도시 지자체의 지출이 크게 늘고 재정을 개선해보려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것에서 나온 것이었다. 뭐 나중에 다루게 되겠지만, 80년대 말 정작 그 지자체들은 마거릿 대처의 문제가 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녀에게 인두세는 지자체 사회주의에 대한 대안이자, ‘검약을 보상하고 낭비를 벌주는’ 것이었다. 이제 극빈자 외 모든 사람이 똑같이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전체 가구 가운데 3분의 1만 지방세를 내는데 세금을 내지 않은 이들이 그 돈을 쓰는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논리를 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그러니 가난하다거나 다른 이유로 인두세를 내지 못하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된다는 얘기였다. 즉 그들은 선거권을 포기하면 되었다. 참 쉽죠?
대처 정부는 1인당 납세액이 연간 50~100파운드를 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막상 실행하고 보니 1인당 평균 363파운드가 부과되었다. 잉글랜드 및 웨일스의 시민 중 약 2천만명(!)이 이 세금을 새롭게 물어야 했다. 저항이 시작되었다. 보수당 시의원들이 단체로 사직했고, 지방 도시에서는 소요가 발생했으며, 납세 거부가 50%에 달하는 지역도 있었다. 사람들에게 인두세는 강제로 걷어가는 BBC 시청료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대처 자신도 BBC 시청료 납부를 싫어했다는 점에서, 블랙 유머마저 느껴진다.
저항은 폭동으로 번졌다. 인두세 폭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나, 그 중심지는 런던이었다.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시위대는 차를 뒤엎고 불을 질렀다. 사람들은 대처 총리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목에 올가미를 걸고 끌고 다녔고, 경찰과 충돌해 병과 계란을 던졌다. 시위대는 대처의 초상화를 불에 태웠으며, 경찰서를 습격했고 상점을 약탈했다.
당시 대처 정부와 경찰, 그리고 지금의 대처 옹호자들은 이 폭동이 극좌파들에 의해 주동된 것이라고 말했지만, 인두세 폭동은 보수당의 아성 지역에서도 확산되었다. 결국 보수당은 대처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워 희생시켰고, 대처는 결국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녀의 희생자들: 보수당과 노동당 양당
보수당 내의 구 우파들 또한 대처의 주요 희생자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대처가 전통이나 과거의 관행을 거리낌 없이 경멸하는데에 충격을 받았다. 민영화 광풍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해롤드 맥밀런(Harold Macmillan) 전 총리는 대처가 ‘집안의 은그릇’을 팔아치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처가 광부들을 내부의 적이라고 불렀을 때 큰 충격을 받아 상원에서 반대 연설을 한 것도 맥밀런이었다. 에드워드 히스는 대처와 대처의 정책 모두를 증오했다.
사실 보수당 자체가 그녀의 희생자였다. 마거릿 대처가 총리직에서 물러났을 때, 영국을 거의 백년 간 통치했던 보수당엔 정책도, 지도자도, 영혼도 남지 않았다. 마거릿 대처는 홀로 통치했다. 중요한 문제에서 그녀와 다른 사람, 즉 ‘우리 편’이 아닌 자는 설사 동료라도 어둠 속으로 내쫓겼다. 한국의 경우와 비교해보자면, 2인자를 키우려 하지 않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용인술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대처를 계승한 불운한 보수당 지도자들은 대처리즘 이후라는 희망 없는 상황에 내던져졌고, 정책도 목적도 스타일도 없었다. 물론 보수당을 몰락시킨 것이 그녀라면, 노동당을 구원하고 부활시킨 공도 따지고 보면 대처의 몫일 것이다.
여기서 대처의 옹호자들은 대처리즘이 훗날의 신노동당, 제3의 길 노선으로 불리는 블레어 정권의 정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므로, 대처의 공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뭐,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노동당조차도 함정에 빠져들었다. 토니 블레어는 대처의 많은 편견을 공유했다. 대처처럼 블레어도 과거의 정치 언어를 몹시 싫어했고, ‘계급’에 대한 모든 논의를 회피했다. 블레어 정권 지도부는 제일 교조적인 대처주의자만큼이나 본능적으로 국가를 의심했다. 블레어도 대처와 마찬가지로 민간 부문의 기업가들로 둘러싸여 있기를 좋아했다.
이는 정경유착으로 이어졌다. 토니 블레어 자체가 정경유착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이른바 2002년 초의 ‘철강게이트’가 대표적이다. 2008년 초, 그러니까 금융위기 조짐이 월가에 스멀스멀 퍼져나가던 중에도 토니 블레어는 총리에서 물러나자마자 JP 모건 체이스의 상담역이 되어 연봉 500만 달러를 받았다.
그 외에도 노동당 정부는 이라크 전쟁 당시, 싸구려 골프공 탐지기를 고액의 폭탄 감지기로 속여 판 사기꾼을 감싸다 못해, 유엔에 판매하는 방안을 조언(!)할 지경이었다. 당시 수출 통제를 감독하던 노동당 각료 이언 피어슨이 이메일로 자세한 혐의점이 든 투서를 받았음에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영국 정부는 1년이 지나서야 그 장치의 수출을 금지했다.
지난 2011년에는 리비아 혁명과 함께, 토니 블레어가 리비아의 석유, 가스 탐사권을 대가로 88년 미국 팬암 항공기를 폭파한 이른바 ‘로커비 테러범’ 알 메그라히를 리비아에 송환하는 뒷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나오기도 했다.
대처가 분명 구노동당을 파괴함으로서 신노동당의 집권을 가능케 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그 변화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절대로.
그녀의 희생자들: 북아일랜드 가톨릭교도
대처가 죽자 본격적으로 축제를 벌인 곳이 영국 외에도 있었으니, 바로 아일랜드였다. 이들은 젤리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대처의 죽음을 축하했다. 공짜 맥주를 뿌렸다는 말까지 나왔다.
사실 아일랜드와 영국의 분쟁은 18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만큼, 마거릿 대처에게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지나치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처는 분쟁을 완화시키기는커녕, 격화시켰다. 이제 그 유명한 바비 샌즈(Bobby Sands)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바비 샌즈는 18세에 아일랜드공화국군(IRA)에 가입하여, 이듬해에 권총소지 혐의로 3년을 복역했고, 테러 혐의로 체포되어 14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인물이다. 메이즈 교도소에서 IRA 수감자들의 수장이 된 샌즈는 자신들을 테러범이 아닌 정치범으로 인정해 줄 것을 영국 정부에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샌즈는 옥중 단식을 통해 IRA의 투쟁을 세계에 알려 영국 정부를 압박하려 했다.
샌즈에 대한 영국 및 세계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특사를 보내 샌즈에게 단식 중단을 권고했고,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샌즈를 면회하기도 했다. 샌즈는 단식 중 북아일랜드에서 열린 하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범죄는 범죄일 뿐 정치적 범죄가 될 수 없고”, 아사자 문제는 “단식 농성을 하는 사람들에게 달린 문제”라는 것이다. 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 바비 샌즈가 유권자들의 선출로 영국의 하원의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빼면 말이다. (……)
샌즈는 단식 66일 째에 숨을 거두었고, 샌즈를 합쳐 10명이 아사했다. 그리고 3년 후, IRA는 보수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브라이턴에서 대처가 묵고 있던 호텔을 날려버렸다.
그녀의 희생자들: 성적, 인종적 소수자들
『엑스맨』의 매그니토,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 등으로 우리에게 유명해진 노배우 이안 맥켈런(Ian McKellen)이 커밍아웃한 게이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커밍아웃하게 된 계기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거릿 대처 정부는 80년대 에이즈(AIDS) 창궐의 공포를 이용해, ‘섹션 28(Section 28)’ 입법으로 동성애의 공론화를 범죄로 규정하려 시도했다. 이 법의 내용을 보면, 일체의 사회적 매체에서 동성애 및 양성애적 요소들을 다루는 것을 금지했고, 학교에서 동성애를 금지하고 반동성애 교육을 실시하며,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책들을 학교 도서관에서 없애버린다는 것까지 있었다.
앨런 무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부는 모든 동성연애의 싹은 물론 그 추상적 개념마저도 잘라내고 싶다는 욕구를 표명”한 것이다. 당시 이안 맥켈런은 BBC 라디오에 출연해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해 섹션 28에 저항했다. 이 당시 맥켈런을 포함한 수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커밍아웃 외에도, 시위대가 국회의사당에 난입했고, BBC 뉴스 도중에 레즈비언이 난입해 섹션 28에 대해 항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악법은 2000년에야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에서는 그보다 늦은 2001년에 각각 폐지되었다. 그럼에도 마거릿 대처가 남긴 동성애 혐오라는 유산은 아주 오랫동안 남았다. 바로 얼마 전에 영국의 보수주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이 케인스의 이론은 동성애의 산물로, 동성애자로 아이가 없던 케인스는 이기적이고 단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막말을 했다가 사과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사실 케인스는 양성애자로, 1925년에 러시아 출신 발레리나 리디아 로포코바와 결혼해 아이를 낳으려 했으나, 아내가 유산했던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그의 이 “멍청하고 무신경했던” 발언에서 섹션 28을 떠올린다면 비약일까?
이 외에도, 마거릿 대처는 인종적 소수자들, 이민자들에 대해서도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대표적인 것이 ‘보트 피플’로 불리는 베트남 난민들이었다. 음, 사회주의의 적을 자처한 철의 여인께서, 사이공의 사회주의 독재를 피해 자유를 찾아온 베트남 난민들에 냉랭했다고? 나도 믿기지가 않으나, 최근 영국국립문서보관소가 30년 만에 공개한 문서에 의하면 사실이다.
당시 유엔과 구호 단체들은 영국을 포함한 국가들에게 베트남 보트 피플을 수용해줄 것을 촉구했으나, 대처는 무려 “정부가 임대주택을 마련해 난민을 받아줘야 한다면 거리마다 폭동이 일어날 것” 이라 말하는 등 (!!) 다양한 수사를 동원해 보트피플 수용을 거부했다. 나중에야 영국은 마지못해 1만명의 베트남 난민의 입국을 허용했다. 자유는 좋지만 이민자는 싫으셨던 듯.
뭐 이 시대가 완전히 소수자들의 암흑기였냐면 그렇지만은 않았다. 81년 지방선거에서, 켄 리빙스턴을 필두로 한 노동당 좌파가 ‘런던광역시의회(Greater London Concil, GLC)’ 및 다른 대도시들을 장악하며 성소수자와 이민자들을 위한 정책을 폈다. 82년 창설된 광역 런던 기업위원회(Greater London Enterprise Board)에서 런던 노동 정책(London Labour Plan)을 발표해 여성과 인종적 소수자들에 대한 취업 훈련을 재정적으로 보조했고, 게이/레즈비언 작업팀(Gay and Lesbian Working Party)가 만들어졌다.
물론 우파 언론들이 맹공을 가했고, 보수당도 리빙스턴의 런던시 행정부가 “유래 없는 재정적 지원을 여성 단체들, 인종적 소수자 단체들, 게이 또는 여타의 캠페인 단체들에게 쏟아붓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사실 그런 것이 공격 대상이 된다는 부분에서, 당대 영국 성소수자들의 현실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단체들에게 지급된 액수는 보조금 총액에 있어 아주 작은 부분이었고, 법률상 하자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1986년 4월 1일, GLC와 다른 6개의 대도시의회는 폐지되고 말았다.
그녀의 희생자들: 지방정부
현재 영국 대도시는 의회와 독립된 시장을 선출하나, 대처 시절까지만 해도 영국 대도시의 권력 구조는 중앙정부의 의원 내각제와 비슷했다. 다수당의 대표가 광역시의회 의장이 되어 사실상 시장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81년 5월의 지방선거에선 런던 노동당이 보수당과 자유당보다 8석이 많은 다수당 정부를 구성했다. 바로 다음 날, 노동당 좌파의 유력 인사 켄 리빙스턴이 런던시 노동당 대표 경선에서 승리해 런던광역시의회(GLC) 의장이 되었다.
『런던 레이버 브리핑』은 런던은 우리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리빙스턴은 런던시청이 “대처 정부를 끌어내리기 위한 공개적 캠페인의 기지로서” 이용될 것이라고 공언했고, 이후에는 “GLC는 하원의 그 어떤 당보다 더 효과적인 야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GLC가 남긴 대표적 유산은 대기오염을 막기 위해 도심에 들어오는 차들에 교통혼잡세(congestion charge)를 부과한 것과, 당시에는 ‘티켓 하나로(Just the Ticket)’로 명명된 교통카드를 통한 환승 제도를 도입함으로서 대중교통요금 인하를 유도한 것 등이 있다. 한국에서 혼잡세는 조순 서울시장 시절에, 환승 제도는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에 도입되어 친숙해졌다.
위에서 보았듯 언론과 보수당은 다양한 방식으로 좌파가 장악한 GLC를 공격했다. 보수당이 장악한 부유층 지역인 브롬리 구의회가 GLC의 대중교통요금 인하를 지방법원에 제소하는 일도 벌어졌다. 대중교통을 거의 이용하지 않는 자신들의 세금이 권익과는 무관한 곳에 낭비된다는 주장이었다. 법원과, 당시 대법원 기능을 하던 영국 상원(House of Lords)에서도 브롬리 구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GLC는 법률적 검토 작업 끝에 환승 제도를 도입했다.
대처가 보기에 GLC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녀처럼 GLC의 좌파들도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후의 바비 샌즈에 대해서도 그랬으니만큼. 일단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의 지출을 통제할 수 있는 매우 정교한 방법을 도입했으나, 보수당의 각료들은 지방정부의 높은 지출 수준을 줄이는데 실패했다. 보수주의자답게, 그들은 지방정부가 누린 전통적인 독립성까지 침해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대처는 아니었다. 그녀는 감각적인 중앙집권주의자였고, 자신의 명령이 나라 전역에서 이행되는 것을 원했다.
그녀는 GLC를 포함한 6개의 대도시의회를 폐지하자는 것으로 대응했다. 일단 이유인즉슨, 전략적 계획만을 위한 독립된 지방정부는 불필요한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각 구의회가 구체적 계획을 실행할 권한을 가지는 동시에, 전략적 계획의 기능도 함께 수행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실제로는 대처의 정치적 결정을 감출 핑계일 뿐이었지만. 어느 분의 말씀을 빌리면, 노무현이 행정수도 이전을 하는데 이명박과 서울시가 반대하고 여러 반대 정책들을 펴니, 아예 서울시를 없애버렸다고 보면 되겠다. 물론 구청장은 다 중앙정부에서 임명하는 식으로 가고 말이다. (…)
보수당 중앙당에서는 이미 82년에 폐지안을 두고 논의가 오갔다. 83년 총선을 앞두고 제출된 보수당의 선거 강령은 지방정부에 대해 두 선택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런던 및 6개의 광역시의회를 폐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방세 상한제의 도입이었다. 문제는 보수당이 정권을 연장할 수 있느냐였지만. 대처의 인기는 급락했고, 보수당은 선거에서 패배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노무현의 탄핵 역풍처럼, 대처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포클랜드 전쟁이었다.
사실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침공 원인은 81년, 국방비 절감 목적으로 남대서양 순찰선 인듀어런스 호를 철수하자는 국방장관 존 노트(John Nott)의 제안을 대처가 받아들인데 있었다. 이때 대처는 외무장관 캐링턴 경(Lord Peter Carrington)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돌파구가 필요했던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곧바로 2만 8천명의 병력을 보내 섬을 점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듀어런스 호의 철수에 반대했던 캐링턴은 책임지고 장관직을 사임했지만 말이다.
뭐 어쨌건, 포클랜드 전쟁의 와중 동원된 국수주의적 열기는 대처 정부를 구원했다. 전쟁 또한 승리했고. 83년 6월의 총선에서 보수당은 압승했고, 그해 9월, 미스크 93(Misc 93)이라 명명된 폐지안을 다룰 내각 안의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85년 5월에 예정된 GLC 선거를 취소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만약 좌파가 지방선거에서 이긴다면 보수당의 광역시 폐지 방침은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법률적으로는 86년 4월 말 이전으로 폐지일을 앞당길 수 없었기 때문에, 1년의 공백기 동안 GLC는 각 구가 임명한 지방의원들로 구성된 임시 기구가 운영해야 한다는 제안도 했다. 한마디로 보수당이 런던에 대한 통제권을 넘겨받겠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정부와 보수당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광역시의회를 폐지하겠다는 대처의 결정이 당 내 토론을 거치지 않고, 충분한 준비 기간을 생략한 채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조급한 정치적 결정으로 심각한 절차상 문제가 불거졌다. 별도의 법(이 경우는 지방정부법)에 따른 법적 근거 없이 선거를 취소하는 것은 불법은 말할 것도 없고 비민주적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1985년 5월 이전에 폐지 관련 법안의 법적 효력을 발생시킬 방법이 없었다. 85년 예정된 GLC 선거와 폐지일 사이에는 1년의 공백이 생겼다. 선거를 취소하고 현 런던 행정부가 11개월 더 런던 시정을 관할하도록 허용하는 방안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대처에게는 악몽과도 같았다. 남은 선택은 선출된 지방정부를 임명된 지방의원으로 대체하는 것이었으나, 이는 보수당으로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히스의 말을 들어보자.
“이런 선택은 보수당이 영국의 지난 150년 역사에서 가장 최악의 게리맨더링을 획책했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게 한다.”
폐지 법안은 하원을 통과했으나 보수당 의원 19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6월 28일의 상원 표결에서 대처 내각은 패배했다. 굴욕 끝에, 정부는 GLC의 수명을 1년 연장하는 쪽으로 계획을 바꾸어야 했다. 지방선거가 폐지안에 대한 심판의 장이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쨌건 새롭게 제안된 준비 법안이 7월 26일에 발의되었다. 그리고 11월 22일 GLC와 광역시의회의 폐지를 골자로 하는 지방정부법안이 통과되었다. 마침내 85년 7월 16일, 폐지법안은 법으로서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
정부의 공격에 대한 반격으로 GLC는 매우 효과적인 폐지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기본적인 민주적 원리가 정부 탓에 훼손되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켄 리빙스턴은 이 과정에서 ‘흉악한 인간(bogey man)’ 혹은 ‘대중적 악마(popular demon)’의 이미지를 벗고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부각되었다. 여론조사에서도 61%의 런던 시민이 폐지에 반대하고 단 22%만이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폐지 반대 운동이 거둔 성공에도 불구하고, 폐지 법안을 막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1986년 4월 1일 GLC와 6개의 대도시의회는 폐지되었고, 런던의 전략적 계획 기능은 구의회에 이양되는 대신 중앙정부에 의해 설립되고 임명된 준정부기구들로 넘어갔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가 담당하던 역할을 정부가 임명한 공무원에게 이양한 것이다. 그 시기 유럽 나머지 지역이 대대적인 권력 분산에 몰두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교육 정책과 지역 경제 계획에 대한 감독 책임도 중앙부처로 되돌려져 직접적인 정치적 통제를 받았으며, 그럼에도 대처가 전통적인 고위 공직자 집단보다 소수의 친구와 조언자 집단에 더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중앙부처의 전통적 행동의 자유조차 점점 더 제약을 받았다.
이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와 피노체트의 독재를 옹호하는 등의 문제도 있었고, 광우병이나 현재의 악명 높은 영국 급식 문제도 대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그야말로 여백, 아니 분량이 모자라서 적지 못한다. 페르마 형님 보고 계시죠? (……)
결론 – 유산과 교훈
“민주주의는 단순히 국민들이 원하는 것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을 이끄는 것이기도 하다.”
– 마거릿 대처
“그러나 일찍 드러나든 늦게 드러나든, 좋은 것에 대해서든 나쁜 것에 대해서든 위험한 것은 기득이권이 아니라 사상이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마거릿 대처는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로 생각했을까? 흠, 아마 스스로는 그랬을 것 같다. 1989년에 이웃 프랑스에서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그녀는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를 따르는 보수주의자인양 유혈 사태와 전쟁, 독재 등을 불러일으킨 혁명을 기념하는 프랑스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배짱 있게(…) 말했다. 그녀는 외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국 대사가 혁명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했다.
독일 통일을 앞둔 상황에서, 영불 동맹에 금이 갈 수도 있었던 행동이라는 사실은 그렇다고 치자. 프랑스 혁명이 200년이 지나 역사의 장으로 들어갔다는 사실도 그렇다 치자. 그러나 질문. 그녀가 정말 에드먼드 버크를 따르는 사람이었나?
마거릿 대처는 당시 존경 받는 지배 엘리트들, 즉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의 마음에는 그다지 맞지 않았다. 그녀는 벼락부자 사업가를 좋아하는 하층 중간 계급 출신의 출세한 사람이었다. 대처는 그러한 엘리트들의 감정에 이자까지 덧붙여 되돌려주었다. 그녀는 전통과 과거의 관행을 경멸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대처는 파괴와 혁신에 열중한 과격파였다. 대처는 타협을 경멸했고, 적절히 새로워진 계급 전쟁은 그녀에게 위협적이기는 커녕 정치 요소일 뿐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반드시 여성이 한명 끼어야 하고, 노조원 한명과 소수 인종 가운데서도 한명을 포함하는 균형 잡힌’ 각종 위원회는 ‘쓰레기를 양산’할 뿐이었다.
전통을 무시하는 파괴자로서의 그녀의 모습은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와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한 대처는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로버트 런시 대주교에게 승전 기념 미사를 부탁했다. 런시 대주교는 이를 거부하고, 전쟁 희생자와 그 유가족들을 위해서 위령 미사를 진행했다. 이는 진보적이었던 성공회의 분위기를 제외하더라도, 기독교의 평화주의적 전통에도 어긋나지 않는 행위였다. 가령 정교회의 경우, 성공회보다 더 보수적이고 전통에 더 충실함에도, 동로마-비잔티움 제국 시절에 황제들의 바람과 달리 ‘성전’과 정당한 전쟁, 혹은 군사와 종교가 복합된 전쟁을 결코 승인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기 캔터베리 대주교 지명을 통해 성공회에 복수했다. 영국의 국교로서 성공회는 관례 상 캔터베리 대주교 후보자 두 명의 명단을 총리실에 전달해 지명 받는다. 한명은 사실상 지명될 후보, 다른 한명은 지명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형식적 후보였다. 대처는 관례를 깨고 두 후보 중 형식적 후보였던 조지 캐리를 대주교에 지명했다. 대처가 보수주의자를 자칭했으나, 그것은 현실과는 먼 그녀 혼자만의 생각이었거나, 혹은 위선에 가까워 보인다.
대처는 케인스주의를 폐기한 후,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음에도 통화주의적 거시 경제 운용을 고집했고,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민영화와 구조조정을 서둘러 진행했다. 그녀는 자신의 편견에 따라 소수자를 탄압했고, 하층계급의 불만 표출은 무시하거나 난동 정도로 매도했으며, 고분고분하지 않은 지방정부는 없애버렸다. 그리고 무엇이 남았는가?
사실, 대처의 옹호자들조차 대처의 과오를 인정한다. 대처의 전기 작가 휴고 영(Hugo Young)은 대처가 위대한 정치가이지만 그녀가 남긴 유산의 색깔은 어둡다며, 무엇보다 영국인들의 기질이 나쁜 방향으로 바뀌었다고 개탄했다. 영국인들은 언제부턴가 길 가는 데 방해되는 사람을 밀쳐버리고, 경쟁자의 사업에 무례하게 끼어들며, 상대팀 축구팬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부를 유일한 미덕의 기준으로 우상화하는 등 함께하기 불쾌한 사람들로 변했다는 것이다.
영국 언론 『선데이 타임스』 (더 타임스 일요판)의 전 편집장 해롤드 에반스 경은 마거릿 대처가 언론노조와 신문인쇄노조를 제압하게 도와준 것을 칭찬했다. 루퍼트 머독이 그녀를 탄탄하게 지지했다는 것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는 이 ‘와핑 전투’에서 신문인쇄노조의 파업을 제압한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이 이후 온갖 전횡을 일삼았다는 사실이 생략되어 있다. 하긴 신악이 구악보다 더했다는 사실은 아름다운 동화와는 거리가 멀다.
한국도 대처를 본받아야 한다 주장하는 분들을 위해서는,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견해를 빌리고자 한다. 한국은 IMF의 모범생으로 여겨지나, 한국은 표준 IMF 처방을 따르지 않고 기업 구조조정에서 좀더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다. 수출을 유지하고 수입을 제한하기 위해 화폐 가치를 낮게 유치했고, 물리적 구조조정에서도 IMF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다.
IMF는 반도체 전문가인양 한국에 반도체 과잉 설비를 신속히 처분하라 권했지만, 당시 한국 정부는 그 충고를 무시했다. 만약 DJ가 IMF의 충고를 따랐더라면 당시의 회복이 더뎌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직까지도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반도체 업계를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이 외환위기 당시에 대처를 본받았더라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사실 지금의 한국이 대처를 본받는다면 주택시장 전체가 북부 잉글랜드 공업지대처럼 변해버릴 것이다. 고금리로 인해 유동성이 모조리 말라버릴 것이고, 아무도 주택을 사거나 유지할 돈이 없을 테니 말이다.
사실 대처리즘을 제외하고 그녀가 남긴 유산 중에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이제는 보수당조차 성소수자 보호에 앞장서고 있으며, 힐스버러 참사도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직접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한 상황이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결국 협상으로 타결되어 IRA의 정치조직 신페인당(Sinn Féin)이 북아일랜드 및 영국 의회에 진출했다. 이제 신페인은 북아일랜드 의회의 다수당이 되었고, 게리 애덤스 신페인당 전 대표는 대처가 “대처는 아일랜드와 영국 사람들 모두에게 큰 상처를 줬던 인물”이라고 일갈했다.
제일 압권은 이 부분이다. 대처가 GLC를 없애는 무리수까지 두었지만, 런던시장(Mayor of London) 직이 신설되자 켄 리빙스턴은 2000년 지방선거에 출마해 무소속으로 보수당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켄 리빙스턴은 초대 런던시장으로서 04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며, 08년 지방선거에서 낙선할 때까지 시장직을 역임했다.
대처가 즐겨했던 격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생각을 조심하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하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하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하라.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하라. 운명이 된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 그녀는 이 말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대처는 자신의 생각을 모두 믿었을 것이다. 프리드먼의 통화주의를 진지하게 믿었듯이 믿었으리라. 그녀는 정말로 사회란 없고 개인과 그 가족 뿐이며, 모두가 열심히 일해서 자본가가 되고, 주주가 되어 경제적 성과를 자신의 손에 넣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격언처럼 그녀가 생각하는 대로 되었다면, 그래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조금 더 간결하고, 더 오래된 명언으로 대신하도록 하자.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苛政猛於虎)”
– 공자, 『예기(禮記)』, 「단궁편(檀弓記)」에서
뱀발) 마거릿 대처가 옥스퍼드 대학교 출신 화학자로서, 아이스크림 회사의 유화제를 만드는 팀에서 일하며 소프트 아이스크림 발명에 공을 세웠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 이후 대처가 정계에 진출하며, 이 소프트 아이스크림 발명은 대처에 대한 찬사로도 야유로도 널리 쓰였다. 하지만 뉴요커 지에 의하면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그녀의 공이 아니고, 그냥 미국 기술을 수입한 것이라고 한다. 도시전설의 한 사례.
참고문헌)
박지향, 『대처 스타일』, 김영사, 2012.
서영표, 『런던코뮌』, 이매진, 2009.
로버트 스키델스키, 『존 메이너드 케인스』, 후마니타스, 2009.
조지프 스티글리츠, 『세계화와 그 불만』, 세종연구원, 2002.
토니 주트, 『포스트워 1945~2005 2』, 플래닛, 2008.
폴 크루그먼, 김이수, 오승훈, 『경제학의 향연』, 부키,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