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여자들이 총리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설마 남자들이 지금까지 한 것보다 못하겠어요?” (애니 카트라이트)
“언젠가는 그 말을 후회하는 날이 올 거에요.” (샘 타일러)– 영국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Life on Mars)』 에서
지난 4월 8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알츠하이머 투병 끝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87세의 나이였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보수당에서도 최초의 여성 당수였고, 11년 209일 간 총리직에 재임한, 20세기 최장수 총리이기도 했다. 전세계의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 모두 그녀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집권하자마자 겪은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냈으며, 강력한 지도력과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영국병’을 치료해 영국 경제를 되살렸다는 것이 대처에 대해 흔히 알려진 평가다.
그렇다면 영국 본토에서는 어땠을까? 추모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녀의 정적이라 할 노동당도 일단 공식적으로는 조의를 표했으나, 스코틀랜드, 북잉글랜드, 런던, 아일랜드 등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축하하러 거리로 몰려나왔다. 생전 그녀의 정적들 외에도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대처의 죽음을 축하했고, 죽은 그녀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대처가 사망한 날,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대처와 관련된 모든 기사의 덧글창을 닫아야만 했다. 대처를 저주하는 엄청난 양의 댓글 때문이었다. 항의와 욕설에 대처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를 쓴 기자의 이메일까지 숨겨야 했다. 온 사방에서 1939년의 뮤지컬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온 노래, 「딩동, 마녀가 죽었다(Ding dong, the witch is dead)」가 흘러나왔다.
페이스북에서 대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페이스북으로 이 노래에 대한 조직적인 음원 및 음반 구매 운동을 펼친 결과, 이 노래는 영국 아이튠스 차트 1위에 올랐고, 주간 UK차트에서는 2위에 올랐다. 영국 오피셜 차트 컴퍼니가 집계하는 UK차트는 미국 빌보드 차트와 함께 세계 양대 팝 차트로 꼽힌다. 오피셜 차트 컴퍼니에 의하면, 4월 기준으로 “딩동! 마녀가 죽었다”는 5만 2605장(!)이 판매되는 기염을 토했다. BBC는 고민 끝에 매주 인기곡을 소개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이 노래를 단 5초만 틀기로 결정했다. 고인에 대한 예의와 언론 자유 사이에서의 타협이었다.
대처 총리의 장례식을 나흘 앞둔 4월 13일,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는 수백명의 시위대가 예의 그 노래, “딩동! 마녀가 죽었다”를 부르며 반 대처 시위를 벌였다. 샴페인이 터졌고, 광장에는 매부리코를 하고 손가방을 든 대처모형이 세워졌다. 사람들은 모형을 향해 “매기! 매기! 매기! 죽었어! 죽었어! 죽었어!”를 외쳤다. 한 경찰관은 개인 트위터에 ‘대처가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좋겠다’는 글을 올렸다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일부 단체가 장례식 운구행렬 때 일제히 등을 돌리는 평화시위를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다. 반 대처 세력인 ‘매기(마거릿)로부터의 해방 파티’의 페이스북에는 3,000여명이 이 시위에 동참할 의사를 밝혔다. 작년 영국의 한 사이트에선 대처가 사망할 경우, 장례식을 민영화하자는 청원이 올라오자 3만여 명이 서명하는 일도 있었다.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대처를 추모하며 우리 모두가 대처의 정책을 지지하는 대처주의자라고 발언했으나, 무려 연정 파트너(!)인 자유민주당의 닉 클레그 부총리는 자신은 대처주의자가 아니라며 정면으로 반박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사실 대처가 죽은지 한달이 한참 지났는데도 이런 글을 쓰는지 의아해하는 독자 분들도 많을 것이다. 이 글을 쓸 생각을 처음 한 것은 5월 4일인데, 그 날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스타워즈 팬들 사이에서는 스타워즈 데이로 알려진 날이지만, 사실 그것은 마거릿 대처의 총리 취임에서 유래된 것이다. 1979년 5월 4일에 대처가 총선에 승리해 영국의 첫 여성 총리가 되자 보수당이 런던 이브닝 뉴스지에 언어 유희로 “5월 4일이 당신과 함께하길, 매기 (May the fourth be with you, Maggie)”라는 축전을 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뭐 안타깝게도(?) 대처는 스타워즈 데이보다 한달 더 일찍 세상을 떴지만.
세계에서 애도 받았으나 정작 영국인 사이에서는 푸대접을 받은 마거릿 대처. 대처를 위인이라고 배웠던 한국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일이다. 한니발에 맞서 조국 로마를 구하고도 고발당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일화가 떠오를 수도 있겠다. 대처에 대한 영국의 배은망덕을 논하기 전에, 그녀가 스키피오처럼 영국을 위기에서 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글쎄.
대처의 집권 배경
“정부 지출을 통해 불황을 벗어난다는 대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 그것이 먹혔던 것은) 경제에 인플레이션이라는 주사약을 점점 더 많이 투약했기 때문이었다.”
– 1976년 10월, 제임스 캘러헌 총리의 노동당 전당대회 연설 중
마거릿 대처의 과오를 논하기 전에, 그녀의 집권 배경을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거릿 대처 집권 배경과 그 맥락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국제적, 국내적, 그리고 사상적 배경이 그것이다.
먼저 국제적 배경을 보도록 하자. 1970년대, 국제적으로 케인즈주의적 정치경제체제는 재정과 통화정책을 잘못 관리한데서 비롯된 충격들에 직면해 해체되었다. 통설과 달리 실업률과 물가가 동반 상승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다. 결국 고정환율의 브레턴우즈 체제는 1971년 붕괴했다.
3년 후에는 에너지 비용이 네 배로 뛰었다. 과잉 수요를 가격과 임금 통제로 막아보려는 시도들은 노조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시카고학파의 기수 밀턴 프리드먼은 케인스 혁명 자체를 이 파국의 주된 요인으로 지목했다. ‘자연’ 균형 혹은 ‘자연’ 실업률 개념이 다시 부활했다. 화폐수량설의 부활, 시장에 대한 신뢰, 그리고 80년대의 탈규제적 ‘공급 측’ 정책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었다.
국내적으로도 70년대의 영국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세계적인 불황 탓도 있었으나, 모든 정부들이 당적을 불문하고 성공적인 경제 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하는데 계속 실패했다. 70년대 말이 되면 이른바 ‘통제 불능 상태’에 관해 매우 근심스런 논쟁이 오가게 되었다. 정치가 경제 정책만이 아니라 일터, 심지어 거리에서도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인식이 널리 공유되었다. 분명 당대의 영국 노조는 영국 경제의 폭풍의 핵에 가까웠다. 이들이 망상에 가까운 극단주의 혹은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노동당은 당의 자금원인 산별 노조의 지도자들을 제어하지 못했고, 보수당은 노동 계급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1970년에서 1974년까지 집권한 보수당의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 내각은 비효율적 탄광의 폐쇄를 제안하고, 노조의 쟁의 개시 권한을 법적으로 제한하려 했으나, 연이은 파업이 정부를 좌절시켰고, 선거에서도 패하게 했다.
흥미롭게도, 현재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일련의 경제 정책들 – 세금 감면, 자유 기업, 산업과 서비스의 민영화 등 – 이 영국에서 처음 출현한 시기는 1976년에서 1979년까지 재임한 제임스 캘러헌(James Callaghan)의 노동당 정부 때였다. 76년 경제위기로 인해, 캘러헌 내각은 IMF의 구제금융 조건에 따라 기존의 정책과 합의를 바꿔나갔다. 어느 정도의 실업은 이제 불가피해졌고, 보호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허용해 사회 비용과 노동 비용을 줄여나갔으며, 경제적 고초와 더딘 성장이란 대가에도 인플레를 축소하고 정부 지출을 통제하려 했다. 1977년 8월, 영국의 실업자는 160만명을 돌파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노동당이 공공 지출을 크게 줄인 탓이었다.
결국 이듬해, 1978년에서 1979년 사이의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에 주요 노조들이 일련의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청소부부터 간호사까지의 정부 고용인들을 포괄했던 공익사업 노조의 파업으로 쓰레기는 수거되지 않았고, 사망자도 매장되지 못하고 내버려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1979년의 총선에서, 캘러헌 내각은 ‘불만의 겨울’의 후폭풍과 다른 정치적 실책들로 인해 패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당은 자신들이 경제적 관례에서 급격하게 이탈하는 급진 정책을 시행하지 않음으로서(실제로는 시행했지만) 사회적 위기를 조장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 수 밖에 없었으나, 보수당은 영국에는 바로 그러한 과격 처방이 필요하다 주장한 여인의 정력적인 지도력으로 당당하게 정권을 차지했다. 마거릿 대처의 등장이었다.
1974년의 에드워드 히스 내각의 몰락은 두 가지 산물을 남겼는데, 최초의 여성 보수당수인 마거릿 대처가 탄생했고, 그녀를 뒷받침할 보수당 내 신우파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당 내에서 제일 먼저 케인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정책의 청산, 자유시장경제를 주창한 이론가 키스 조지프(Keith Joseph)를 중심으로 하여 보수당 내에 정책연구센터가 세워졌고, 이는 신보수주의의 싱크탱크로서 활동했다.
정책연구센터의 소장은 앨프리드 셔먼(Alfred Sherman)이었는데, 원래는 스페인 내전에서 싸운 좌파였지만, 훗날 보수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로 전향한 인물이었다. 그는 과거 공산주의자로서 배운 좌파의 극단주의와 원칙적 접근법을 보수주의 우파에 적용하는데 주력했다. (…) 당시 대처는 정책연구센터의 부소장이었다.
기존 보수당의 구우파는 가부장적 온정주의와 합의를 중시하며 혼합경제를 유지하려 했지만, 신우파는 급진적이며 경제적 자유주의를 추종했다. 이들의 뿌리는 대처의 부상을 준비했다 하여 ‘세례 요한’으로 불리게 된 이녹 파월(Enoch Powell)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문제는, 68년 파월은 ‘피에 물든 티베르 강’이라는 유명한 연설에서 예전 식민지로부터 유입되는 유색 이민들을 경계하라는 극우적인 발언을 날렸고, 그로 인해 에드워드 히스의 그림자 내각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
그러나 그의 생각은 키스 조지프에 의해 계승되어 보수당 신우파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이들 ‘세례 요한’들이 대처리즘의 출현을 예고했지만, 극단주의적인 면모로 대처리즘의 파국 또한 어느 정도 예고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아이스크림의 시대 – 거시경제적인 측면에서
“해마다 계속되는 투쟁/세상은 맛좋은 아이스크림 같다는데/나는 거의 얼어 죽어가네/적개심이라 불리는 도시에서”
– 더 잼(The Jam)의 노래 「적개심이라 불리는 도시(Town Called Malice)」에서
대처 시절 영국의 경제적 성과가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는 것에는 대체로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비효율적 기업의 정리와 경쟁의 증대, 노조의 침묵 덕에 사업 생산성과 이윤이 가파르게 증가했다. 국고는 국유 자산 매각 수입금으로 다시 채워졌다. 1980년대 중반은 번영기처럼 보였다. 80년에 22%에 이르던 인플레이션은 1986년에는 5%로 급감했다. 노동생산성은 급격히 향상되었다. 중공업은 전반적으로 쇠퇴했으나, 금융업과 첨단산업의 성장으로 전체 규모로는 경제성장률 2.5%~3%를 기록했다. 위에서 인용한 노래 가사대로, 세상은 맛좋고 달콤한 아이스크림 같이 보였다. 실업자 수가 300만을 넘은 채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옥의 티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폴 크루그먼의 역작, 『경제학의 향연(원제 : 부질없는 번영)』을 보자. 70년대 내내 영국 뿐 아니라 전세계를 괴롭힌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할 정통 해답은, 경기 침체를 수반하는 고통 속에서 인플레이션을 쥐어짜내 버리는 것이었다.
앞에서 케인스주의의 몰락과 밀턴 프리드먼의 부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리드먼이 제창한 통화주의(Monestariasm)는 정부가 경제의 전체수요를 관리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케인스와 동조했으나, 조세와 지출 조정을 통해 전체수요를 관리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해롭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케인스와 달랐다. 통화 공급을 물가 안정 및 장기 경제 성장에 일치하는 비율로 일정하게 늘리는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프리드먼은 민간 경제는 본질적으로 안정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러한 유형의 통화 준칙이 정해지면 경기 순환은 훨씬 다루기 쉬워질 것이라 논했다.
하지만 이는 대체로 논파되었으며,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도 통화주의에 한결같이 회의적이었다. 그럼에도 연방준비제도는 1979년~81년에 통화주의적 처방을 자신 있게 내놓았는데, 그것은 통화주의의 수사법이, 그들의 실제 정책에 따르는 가혹함을 위장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목표는 총통화이지 사람들을 일터에서 내모는 것이 아니므로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은 임금 요구를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똑같은 수사법이 영국에서도 똑같은 정책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다. 문제는 영국의 경우 통화 정책을 정하는 사람들이 그 수사법을 진짜로 믿었다는 것이다. (!)
마거릿 대처는 밀턴 프리드먼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대처는 전통적인 고위 공직자 집단보다는 소수의 친구와 조언자 집단, 즉 앞서 말한 신우파에 더 크게 의존했다. 이들 신우파의 통화주의에 대한 취향은, 현실의 사태가 정책 상의 변화를 필요로 하는 순간 바로 벗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편하지 않았다. 사태가 프리드먼 식의 통화주의 정책을 포기하도록 강요할 때조차, 이들은 경제를 적극적으로 운영하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든 통화 정책을 밀고 나갈 방안만을 모색했다. 앞에서 살펴본 영국 신우파의 사상과 그 배경을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파국적이었다. 대처 집권 이후 거의 7년 간, 영국의 통화 정책은 프리드먼의 노선을 충실하게 준수하였다. 영국의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Bank of England)이 그리하였다. 잉글랜드 은행은 산출물이나 실업 및 인플레이션 등의 부문에서 도달할 목표를 발표하지 않았고, 총통화량 M3의 공급 목표만을 발표했을 뿐이었다. 보수주의의 거시경제이론이 옳다면, 이 결정은 안정적인 성장과 물가 안정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어야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79년부터 83년까지, 영국 경제는 무시무시한 경기 침체에 빠져들었다. 불황은 예상 이상으로 심해서 잉글랜드 은행은 스스로 설정한 M3 목표를 깨고 통화를 확대 공급하는 정책을 임의로 시행해야 할 정도였다. 처음에 대처는 화폐 정책이 분명 실패하고 있는데도 동요하지 않았다. 80년 10월에 방침을 되돌리고 정책을 전환하라고 요청하는 보수당에게 대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렇게 원한다면 당신이 돌아가라, 나는 전환에 찬성하지 않는다.”
대처의 말처럼, 잉글랜드 은행 또한 기존의 M3 목표를 고수하려 했지만, 실물경제가 변덕스럽게 하강세를 반복함에 따라, 영국의 통화 당국은 목표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압력을 계속 받게 되었다. 결국 86년 잉글랜드 은행은 통화 목표 발표를 완전히 포기했다.
“내가 언제 통화주의 고수한다고 말이나 했습니까?(…)” 했지만 미국에서는 통화주의가 실제로 시행된 적도 없고, 연준은 겉으로나마 통화주의를 표방하는데 무성의했으나, 영국에서는 진정한 통화주의자들이 정성을 다해 통화주의 원리에 의해 경제를 운용했고, 완전히 실패했다.
물론 인플레이션은 잡았다. 실업률의 엄청난 상승이라는 대가를 치른 결과였지만. 영국의 실업률은 1960년대에는 평균 3% 미만이었고, 제임스 캘러헌을 실각시키고 대처의 집권을 가져온 실업률도 5.4% 정도였다. 그로부터 8년 후에는 10%를 넘어서고 있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1982년 이후 성장이 회복되었으나, 미국과는 달리 영국의 성장은 실업률을 거의 떨어트리지 못했다.
83년을 기점으로 실업률이 안정되었으나, 87년에 이르러서도 실업률은 여전히 10% 이상이었다. 대처의 실험 8년 동안 영국 보수주의는 실업률의 상승을 사실상 방치했다. 철강, 석탄, 섬유, 조선 등 비효율적인 (그리고 국가의 보조를 받던) 산업에서 일하다 실직한 많은 사람들은 결코 다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일생동안 모든 것을 국가에 의존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의 고용주들이 몇몇 경우 이익을 내는 사기업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는 사적 소유가 일으킨 기적이라기보단 대처 정권이 노동 비용을 덜어주었기 때문이었다. 필요없는 노동자들의 비용을 국가가 보조하는 실업으로 ‘사회화’했던 것이다.
물론 유럽의 주요국들 중 생산성이 가장 떨어지던 영국이, 81년에서 87년 동안, 2.8%라는 인상적인 생산성 성장률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생산성의 고도성장은 지속되지 않았고, 지속되었다고 해도 그 효과는 반복되는 경기 순환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80년대의 영국이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의 생산성 향상을 거두기는 했지만, 그것이 대처의 공인지 저절로 일어나는 일의 하나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여하간 생산성은 향상되었다.
생산성 향상에도 불구하고 높은 실업률은 대처 정부의 뼈아픈 약점이었다. 뭐 대처주의자들의 말로는 당시의 실업은 영국병을 고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고, 마거릿 대처도 자신을 엄격한 간호사로 칭했지만, 말로는 뭘 못하겠는가. 어쨌건 87년이 되자 영국의 실업률은 급속히 떨어졌다. 대처의 집권 당시보다는 여전히 높았지만, 2년 만에 실업률은 정점이었던 86년의 절반 이하, 한자리 수로 떨어졌다. 보수당원들은 이와 같은 호황이야말로 보수당 정책의 성공을 최종적으로 입증한다며 희희낙락했다.
그리고 다음 2년 만에, 실업률은 다시 두 자리 수로 돌아섰다. 물론 80년대 후반의 고용 확대가 경제적 건실성의 신호는 아니라는 단서는 이미 몇 가지 있었다. 수요의 급격한 증가는 86년 가처분 소득의 4%에서 88년 제로까지 떨어진 민간 저축의 파탄에 기인했다. 수요의 증가는 급속한 고용 확대로 전환되었는데, 이는 80년대 중반까지 급성장하던 생산성이 갑작스럽게 끝났기 때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업률의 하락이 곧바로 인플레이션의 상승에 반영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잉글랜드 은행은 수동적인 태도를 취해, 경제를 죄려고 하기 보다는 인플레이션이 수반된 호황 국면을 방관하고 있었다. 대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정책이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믿고 싶어했고, 실업률 하락을 두고 경제가 위험한 과열 상태라는 증거로 보는 의견보다는 보수주의 미덕에 대한 보상이 다시 나타났다고 보는 의견 쪽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정책 담당자들은 잡은 줄 알았던 인플레이션이 다시 두 자리로 치솟을 때까지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정책 담당자들은 갑자기 브레이크를 꽉 밟았고, 이자율은 80년대 초 이래 최고 수준으로 뛰었다. 호황은 극심한 불황으로 반전되었고, 실업률은 다시 두 자리 숫자로 되돌아갔다. 인플레이션은 가까스로 진정되었으나, 2년 간의 짧았던 호황은 고통스러운 불황으로 변했다. 여기에 인두세 폭동까지 겹치면서, 1990년 마거릿 대처는 존 메이저에게 총리 자리를 넘기고 물러나야 했다.
민영화의 문제
마거릿 대처가 막 집권했을 때, 영국 정부는 미국의 경우 민간이 소유하는 기간 산업 부문을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전화, 가스, 전력 등 가장 중요한 공공 사업부터 호텔이나 국영 광산까지 다양한 사업이 있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경제학자들은 모두 영국 정부가 호텔 같은 민간 기업의 활동과 사업을 운영할 이유가 없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중요한 국영 기업들의 경우는 자연 독점이 발생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사정이 달랐다. 어떤 특정 도시의 소비자를 위해 경쟁하는 다수의 전력 회사나 가스 회사 같은 것은 없다.
그런데 80년대 영국에서는 자연 독점이 민영화된다면 어떻게 운영될지에 대한 일체의 검토 없이, 통신 부문을 필두로 그 다음에는 가스가, 그 다음에는 전력과 수력이 차례로 민영화 되었다. 대처 정부는 사적 소유가 독점의 조건 하에서도 그 생산력의 마법을 발휘하리라 믿는 듯 했다. 1984년에서 91년 사이에 민영화된 전세계 자산 가치의 3분의 1이 영국 한 나라의 매각분이었다. 정보통신 부문이 시작이었다.
정부는 금융 시장이 정부가 요구한 주식 가격보다 25% 이상을 부른 반응에 기뻐했지만, 투자자들이 브리티시 텔레콤(British Telecom, BT)에 달려든 이유는 별 것 아니었다. 기업이 독점적 지위를 가지면 가격을 올리고 서비스의 질을 떨어트려도 되기 때문이다. 87년에 이르러 BT의 사업 수행에 대한 일반의 불만이 크게 고조되어 정부는 하는 수 없이 BT의 가격과 서비스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다음 차례는 가스였다. BT보다는 불만이 덜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브리티시 가스(British Gas)가 소비자들에게 엄청난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전력 민영화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전력 민영화로 인해, 영국의 일반 소비자는 대규모 발전 업체로부터 전력을 사오는 지역 업체에서 다시 전기를 사다 쓰는 셈이 되었다. 본래 각지의 송전 회사들은 잠재 경쟁력 증대를 위해 자사의 전력 생산 능력을 키우는 것이 자유로웠다. 그런데 송전 회사들로서는 민영화 이후 고도로 집중된 공급 업체의 압력으로부터 보호받을 것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민영화가 이뤄지자마자 자체적인 발전 능력 확대 사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93년 초 이미 발표된 투자 계획만으로도 95년까지 70%의 초과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 예상되었다.
이 부작용은 영국 석탄 산업의 최종적 붕괴로 나타났다. 석탄으로 가동되는 발전소는 건설비는 비싸지만 운영비가 대단히 저렴한 반면, 가스 발전소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대신 가스터빈은 신속하게 설치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송전 회사들은 각개약진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 가스 발전소 건설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전력 생산 회사로부터 구매가 줄어들면서 석탄 수요는 수직으로 떨어졌다. 92년 가을 영국 정부는 남은 탄광을 반 이상 폐광하고 광부 인력의 70%를 해고하기로 결정했다. 민영화 정책의 실패를 석탄 산업과 그 종사자들이 책임져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대처 사임 5년 후, 존 메이저 총리는 철도 운송의 민영화까지 밀어붙이는데 성공했다. 이런 매각이 이뤄진 주된 까닭은 사실 존 메이저 총리가 ‘무언가를 민영화했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은 전부 대처가 팔아치웠고, 민영화는 보수당만의 고유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철도 민영화 과정에서의 부적절한 절차와 위법, 그리고 비극적인 열차 충돌 사고 등은 2년 후 보수당 정권에 패배를 안겼고, 민영화를 종식시켰다.
“아~ 망했어요~ 망했어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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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스키델스키, 『존 메이너드 케인스』, 후마니타스, 2009.
조지프 스티글리츠, 『세계화와 그 불만』, 세종연구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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