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들이 원하지 않는다”
2013년에 개봉한 영화 <잡스(Jobs)>는 스티브 잡스가 절친한 친구와 함께 세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고 ‘애플(Apple)’을 업계 최고의 회사로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여기까지는 아주 흔한 ‘천조국 괴짜천재의 자수성가 스토리’다.
그런데 어느 날, 이사진의 결정으로 잡스는 자신이 만든 바로 그 회사에서 축출당하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가서 운다. 그가 쫓겨난 이유는 애플의 이사진이 그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 자세하게는, 그의 혁신에 대한 열망과 더 완벽한 제품을 위한 비용투자를, 그러면서도 제품의 가격은 상대적으로 낮게 책정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투자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사진이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잡스의 축출은 오늘날 이 세계의 가장 밑바닥에서 우리의 생각과 행위를 제어하고 있는 ‘믿음’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 사업체든 개인이든, 국가든 국제 사회든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할 수 있는 자’의 요구에 부응해야 세계가 돌아간다는 믿음 말이다. 이 ‘현대사회의 믿음’은 은행에 1000만원의 예금을 가지고 있거나 3000만원 상당의 주식을 보유한 보통의 대중들까지 이해관계의 망으로 포섭하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금융자본주의
이 ‘현대 사회의 믿음’은 흔히 ‘금융자본주의’라고 불린다. 어떻게 보면 금융자본주의는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할 수 있는 자’ 측의 요구를 제도화한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나타난 것도 아니다. 이 믿음은 1950년대부터 서서히 형성되었고, 1980년대에 급성장해 ‘진리’로 등극했으며,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한풀 죽었지만 앞으로도 한동안 위세를 이어갈 지식 체계이며 이데올로기다.
이 지식 체계를 이해해야, 애플은 어떻게 ‘정당한 절차에 의해’ 스티브 잡스를 축출할 수 있었는지, 세계의 여러 정부가 왜 국민들의 엄청난 반발을 무릅쓰고 민영화를 강행하는지, 혹은 금융·무역 자유화와 노동시장 유연화, 부유층에 유리한 세제 개편을 왜 추진하는지 간파할 수 있다. 금융자본주의는 금융 측(돈을 빌려주거나 투자할 수 있는 자)의 논리에 맞춰 세상을 바꾸고 유지하는 것이 효율적일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옳다는 정치·경제 사상이며 실천이기 때문이다.
금융의 시대
2008년 가을 이전은 그야말로 ‘금융의 시대’였다. 자본시장을 무대로 하는 미국 투자은행들이 엄청난 실적을 거두면서 거의 모든 산업국가가 이를 벤치마킹하려고 노력했다. 금융은 ‘실물경제에 대한 조력자’라는 구차한 직분을 벗어던지고, 금융 그 자체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눈부신 변신을 거듭했던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미다스가 자신이 만지는 모든 사물을 황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면, ‘금융의 시대’에는 모든 사물을 ‘금융자산’으로 바꾸었다. 우선 기업이 금융자산으로 전락했다. ‘기업 그 자체’가 자본시장을 통해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존재 형태를 바꾼 것이다.
금융자산으로서의 기업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고용이나 시장 점유율 확대가 아니라 자사의 기업(주식)가치를 올리는 것이다. 기업가치가 떨어지면 다른 기업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인수당하는 수가 있다. 또한 기업가치를 올리려면 고용형태를 최대한 유연하게 하고 연구개발(R&D) 등 장기간에 걸쳐효과를 낼 수 있는 투자는 가급적 억제해야 한다. 안정된 고용형태나 연구개발은 국민경제에 장기적으로 이롭겠지만, 단기간에 금융수익을 내야 하는 투자자들에겐 좋은 일일 수 없다.
여기서 무서운 대목은 ‘금융자산으로 바꾸기’가 이미 자본시장에 나와 있는 민간기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공기업을 민영화하면, 정부 지분이 그대로 흘러나와 자본시장을 키우게 된다. 또한 이런 민영화된 공기업을 대상으로 기업공개(IPO), M&A 등 짭짤한 금융 장사를 할 수 있다. 교육이나 의료 등 공공적 성격의 서비스 부문도 금융자산으로 만들 수 있다. 바로 교육기관이나 의료기관의 영리화이다.
대학을 주식시장에 상장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가 또 얼마나 많겠는가. 혹은 국민의 노후생활과 관련되는 연기금을 제한 없이 주식이나 채권, 그리고 헤지펀드나 사모펀드에 투자할 수 있다면 자본시장을 얼마나 키울 수 있겠는가. 이처럼 ‘금융의 시대’엔 기업이든 공공서비스든 혹은 개인의 노후생활이든,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는 금융자산의 형태를 갖춰야 했고, 이에 따라 모든 시민들의 삶은 자본시장에 직간접적으로 묶여버렸다.
이런 ‘금융의 시대’에 특징적인 현상 하나는 기업과 금융기관 심지어 국가에까지 신용등급이 붙었다는 것이다. 신용등급은 ‘얼마나 안심하고 금융거래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국가(의 서비스)마저 금융자산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일반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금융자산으로 전락해버린 국가의 역할은 자국을 금융거래가 자유롭고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렇다! 금융은 세계의 왕이었던 것이다.
금융의 세계적 폭주
모든 사물을 금융자산화하는 노하우의 원조는 물론 미국의 월스트리트이다. 그런데 이런 ‘괜찮은’ 장사를 미국 내에서만 하라는 법은 없다. 그래서 1990년대의 미국은 금융산업을 전략산업으로 격상시키면서 금융혁명의 수출에 골몰했다. 예컨대 한국이나 독일이 1990년대 중반 이전처럼 대기업과 은행의 주식을 자유롭게 거래할 수 없는 나라라면 미국의 금융 자본가들은 ‘장사’를 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호환’이 불가능한 상태다.
다수의 산업국가들이 자국 자본시장에서 기업 주식을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게 하고, 나아가 외국 투자자와의 거래도 허용해야 전세계적 범위에서 ‘금융자산화’ 및 이에 따른 거래가 이뤄질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심지어 IMF나 세계은행 같은 국제기구도 미국의 금융혁명 수출에 동참하면서, 유동성 위기를 당한 국가들에게 ‘돈을 빌려 주는 대신 제도를 바꾸라’고 윽박질렀다. 바로 10여 년 전, 한국·타이·인도네시아 같은 국가들이 이런 꼴사나운 일을 겪었다.
말하자면 미국은, 금융자산이 국경을 넘어 빠르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금융의 고속도로’를 닦은 것이다. 전세계를 거미줄처럼 엮은 금융 고속도로는 물론 로마가 아니라 미국으로 통했다. 세계의 산업국가들은 거의 미친 듯이 주식과 채권 발행 규모를 늘렸고, 이런 증권을 기반으로 다시 ‘더욱 새로운 증권'(이른바 파생상품)을 발행했다. 또한 다른 나라의 금융자산에 투자하거나, 그곳의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증권을 발행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엄청난 규모의 채권-채무 관계(즉 신용)가 발생했으며, 이 ‘관계’가 한 나라 안에서만이 아니라 국가간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간단한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세계적인 경제 전문 연구소인 맥킨지 연구소에 따르면 지구적 금융자산화가 얼마나 급속하게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다.
- 2006년 말 세계의 금융자산의 총가치는 167조 달러에 달했다(주식·국채·회사채·은행예금 포함, 파생상품은 제외). 이는 2005년 말에 비하면 17%나 상승한 수치다.
- 전세계 금융자산의 가치는 전세계 총 GDP의 3.5배에 달한다.
- 금융위기의 주범인 파생금융상품의 명목가치는 477조 달러 정도인데, 1990년 이후 매년 32% 증가해왔다.
- 국경간 금융거래(국가간 채권-채무 관계) 역시 2006년 말에 8조200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2002년 말의 3배에 달하는 수치이다.
무서운 속도로 금융자산의 규모가 증가하고, 국가간 금융거래도 긴밀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자금의 흐름은 금융화된 지구의 두 중심, 즉 뉴욕과 런던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거의 모든 산업국가들은 한결같이 미국형 금융모델을 벤치마킹했다.
금융자본주의와 정치
이런 세계적 분위기는 정치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 이후 미국 민주당과 영국 노동당은 기존의 사민주의적 기조에서 벗어나 ‘신진보 노선’을 채택한다. 그런데 이 노선은 금융자본주의의 지식 체계에 기반한 것이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는 파격적인 규제완화를 감행하며 금융산업을 성장 동력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지구화를 되돌릴 수 없는 경향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국 금융산업의 업무 영역을 전세계로 확장시키기 위해 IMF 등 국제기구를 이용하기도 했다. 거센 압박을 통해 사실상 강제로 다른 나라의 금융시장을 개방시킨 것이다. (대표적인 대상이 바로 한국이다!)
또한 자본 이동이 자유로운 국제 환경에서는 고급 인력을 육성하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고용 정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자본이 인력을 찾아서 국내로 들어올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바로 클린턴과 블레어 그리고 오바마가 그토록 교육을 강조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나름대로 이는 ‘평등’ 정책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치·경제·사회 노선은 흔히 ‘제3의 길’ 내지는 ‘사회투자국가론’ 등으로 불린다.
한국에서는 김대중, 노무현정부가 이 노선을 수용했다. 노무현 정부의 보건복지부 장관 유시민은 사회투자국가론으로 책을 쓴 바도 있다. 어떻게 포장하든 이 노선의 다른 이름은 신자유주의 혹은 금융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지금 상황의 대안은 ‘신자유주의 반대’ 혹은 ‘금융자본주의 반대’일까? 주식 거래를 억제하고(이렇게 하면 최고 수혜자는 재벌일 것이다!), 대기업의 아웃소싱을 막고, 노동시장을 경직되게 재구성하면 ‘신자유주의 반대’란 정치적 목표는 일단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외국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국내 기업들의 주가가 폭락하고, 원화 가치가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폭락함에 따라 소비자 물가가 급등하고, 실업률이 도리어 크게 올라가는 사태가 실제로 도래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는 전세계적으로 촘촘하게 깔린 금융 네트워크에서 홀로 이탈하는 국가가 실제로 치를 수 있는 대가로, ‘길은 복잡하지 않다’거나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고 역설하거나 노동자의 단결을 강조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지금 금융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