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광고
한때, ‘에이즈 공익광고’라며 한 광고가 화제가 된 바 있었다. 그 내용인즉, 남녀가 전갈 / 거미와 성행위를 갖는 모습을 연출한 것. 혐오스러운 수준은 아니었지만,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그 광고가 주는 시각적 충격이 훌륭하다며 광고를 칭찬했다.
그러나 이 광고는 정말 훌륭한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행위 하는 인간들 대신에 전갈과 거미에게 초점을 맞춰 보자. 이 광고가 무엇을 전갈과 거미로 그리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에이즈 환자들이다. 에이즈 환자와의 성행위가 전갈과 거미와의 성행위처럼 위험하고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소년이 있었습니다
시계를 조금 뒤로 돌려 보자. 1984년 미국 인디애나 주의 한 소년은 의사로부터 청천벽력같은 선고를 듣게 된다. HIV(에이즈의 원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것이었다. 에이즈의 치료법이 상당 수준까지 발전한 오늘날이라면 모를까, 그 시절만 해도 에이즈 선고는 그야말로 사형선고였다. 그리고 이 소년은 갓 십 대 초반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소년과 그 가족은 다가오는 죽음만큼이나 괴로운 비극을 함께 겪어야 했다. 이 용감한 소년은 학교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학교에 나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른 학생들이 이 소년 때문에 에이즈에 감염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시대는 에이즈를 ‘더러운 동성애자가 퍼트리는 병’이라고 생각했다. 학교는 그의 등교를 금지했다.
그는 투쟁했다. 사실상의 사형 선고를 받았으면서도 평범하게 살아갈 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저 그랬기 때문에 투쟁해야 했다. 법정 투쟁 끝에 그는 다시 학교에 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가 학교에 오자 다른 학생들이 등교를 거부했다. 이 소년은 주위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사람들은 그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다. 심지어 사람들은 소년의 어머니와 접촉하는 것조차 두려워해 그녀가 건네는 거스름돈을 내팽개치곤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거실에 총알이 날아오기까지 했다.
소년을 구한 것은 매스컴의 관심이었다. 이 소년과 그 가족이 받던 고통에 관해 언론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에이즈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 전염성과 위험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스타들이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동참했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을 비롯해, 명가수 존 맬렌캠프, 엘튼 존, 명배우 매트 플레워, 전설적인 농구선수 카림 압둘 자바 등이 그의 곁에 섰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영부인 낸시 레이건도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반년 정도를 살 수 있을 거라는 의사의 시한부 선고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고등학교에 진학해 3년 동안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이 기적 같은 이야기는, 고등학교 졸업을 한 달 앞둔 1990년 4월 끝나고 만다. 악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이라는 꿈을 얘기하던 이 소년은, 결국 그 꿈만은 이루지 못하고 그 위대한 삶을 마감했다. 마이클 잭슨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너무 일찍 떠났네(Gone Too Soon)”이란 노래를 그에게 바쳤다.
라이언 웨인 화이트(Ryan Wayne White, 1971. 12. 6. ~ 1990. 4. 8.)의 이야기다.
대체 누가 전갈이지?
이 소년의 위대한 여정은 거기에서 마무리되었지만,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소년의 무덤은 하나의 성지가 되었지만, 또한 네 차례나 반달리즘에 의해 훼손되기도 했다.
물론 광고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이해가 간다. 무분별한 성행위, 콘돔 없는 성행위의 위험성을 지적하고자 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전갈과 거미로 표현된 그 상대방에게 초점을 맞추면, 아무래도 입맛이 쓰다.
오늘날 에이즈에 관한 공익광고는 그 초점이 변하고 있다. 물론 여전히 콘돔 사용 등 기본적인 예방 수칙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에이즈 환자의 인권도 주의 깊게 다룬다. 일상생활로는 전염되지 않는다거나, 그들 또한 우리의 이웃이라는 메시지가 중심이 된 것이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 라이언 웨인 화이트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에서 에이즈와 HIV(에이즈의 원인 바이러스) 감염인들에 관한 인식은 그리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 미디어는 물론 ‘선량한’ 시민까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것이 이 이야기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