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지식인이나 진보정당 관계자들은 자족적이고 낭만적인 관념을 유포합니다. 저 역시 진보정당을 지지하지만, 한국 정치의 현실과 역사를 직시하여 ‘환상 없이’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1. 사표가 아니라고요?
자기(당)한테 주는 한 표는 ‘사표’가 아니라 주장하네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미안하지만 아마 4개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표의 대부분은 사표가 됩니다. 그 표들은 서로서로 마이너스(-)로 작용하고요.
‘사표’ 여부에 관해 두 가지 조건이 작동합니다. 하나는 현행 선거법이 강요하는 제도의 기준, 둘은 그 지지에 대한 ‘책임’과 ‘지속가능성’인 듯합니다. 개별자의 투표 같은 의미 없어 뵈는 행위의 ‘(사회적·정치적) 의미’란 흥미롭게도 어떤 양적 임계선과 축적 위에서만 발생하는데, 이 나라에선 그게 참 쉽지 않은 겁니다.
저는 당선 될만한 후보와 당에게 표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이후에도 지지에 대해 책임질 후보와 당에 표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게 ‘사표’와 ‘사표 아님’에 대한 제 기준입니다.
2. 3%는 얼마나 큰 수?
2008년 진보신당은 창당 1개월 만에 급하게 총선에 임해서 3%에 0.06% 못 미치는 득표를 했습니다. 이 원내 진입 실패의 결과로 진보정치의 역사가 어두운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열흘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신문광고 세 번만 더 했더라면…’ 땅을 쳤습니다.
3%가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큰 숫자인지를 아마 2016년 4월 13일 밤이 되면 깨닫는 분들도 있겠죠. 참고로 19대 총선(2012년)에서 녹색당은 정당 득표율 0.48%, 진보신당(노동당의 전신)은 1.13%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몇 년 사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도 다 없어졌습니다. 이 이합집산은 지지에 대해 ‘책임’을 지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2012년 대선에서의 김순자·김소연 대통령 후보에게 준 표와 그 선거전략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됐는지? 그 표들은 뭔가 ‘살아서’ 무엇에 대한 자양분이 됐는지요?
실패한 선거에 대해 진보정당이 제대로된 평가를 하는 경우를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3. 그 표들은 어디로?
후보자 개인은 더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진정 이 사회의 소금 같은 존재들이지만 전망 없는 조직에서 줄창 희생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아가 자기 삶(생계)을 책임지기도 버거운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벌써 몇 번째 출마한 어느 진보정당 후보에게서 ‘나는 총알받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선 가능성도 없고 정치인으로서의 미래도 어둡지만, 당의 방침과 의무감에 따라 뛰는 겁니다.
그가 전의 선거에서 얻었던 3%, 5%의 표들은 현재 그의 삶과 진보정치에 도움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왜 그 표들은 왜 기억되지도 축적되지 않고, 어디로 다 녹아 사라졌는지?
더구나 ‘생활정치’의 수단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그는 친구와 가족들에게 기생하는 정치를 해야합니다.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아니라도 그 ‘무책임’을 반복합니다. ‘표’는 그렇게 ‘사표’가 됩니다.
4. 누구를 지지?
또 큰 문제는 정당투표권이 우리에게 하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정의당·노동당·녹색당·민중연합당 간의 차이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겠지만, 어느 하나에 대한 선택은 다른 하나에 대한 배제입니다. 노동당(의 용혜인)을 선택하면 녹색당의 20대 후보 김주온이나 정의당의 ‘청년 후보’ 조성주를 배제하게 되는 겁니다.
그들 중 어느 후보가 더 나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상하게 토론이 없고 더 이상한 것은 후보들이 ‘저를(저만을) 지지해주세요’ 라고 말하는 겁니다. 명시적으로 다른 진보정당을 비판하지는 않으면서 말입니다. 이 논쟁 없는 선택/배제는 바람직한 건지요?
5. 진보정치의 책임
반복해서 말하고 싶은 건 이 선택/배제의 구조와 비용에 대해 우선 철저히 인식하고, 나아가 다른 방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준 표는 사표가 아니’라는 자족과 환상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진보정당 지지 표가 부스러기 사표가 되어버리는 이 실제적인 문제야말로 진보정치 세력 전체의 ‘책임’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녹색당은 자기가 ‘진보’가 아니라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현재 진보정당들은 후원금도 내고 지지해준 사람들한테 어떤 ‘책임의 계획’을 갖고 있는지요? 이번에는 비록 1%를 얻더라도 다음 선거 때 어떻게 지지율을 배가할 건지? 듣기 좋고 논리적으론 훌륭한(그러나 사실은 실현 불가능하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무책임한) 공약·정책이 아니라, 실현시킬 방도까지 말해야 ‘책임’을 지는 것이고, 표를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봅니다.
결국 이 당들의 미래를 예측해보는 수밖에 없네요. 정의당·녹색당은 분명 더 성장할 거라 봅니다…만.
그리고 3%라는 기적 같은 득표를 해서 두 사람쯤의 국회의원을 만들더라도 실제론 별 거 못합니다. 한국 진보진영은 무려 네 회기(16년)의 원내 진출 역사를 갖고 있고, 김선동의 최루탄도 강기갑의 공중부양도 이미 봤지요.
그래도 하승수·용혜인 같은 이가 국회의원이 되는 일이 우리 사회에 진짜 필요하다면, 정말 그들이 믿을 만한 호민관이라면, 진짜 계획을 짜야죠. 본인 스스로도 그래야 합니다. 지역 주민에게나 광역의 유권자에게나 ‘대체불가능한’ 진짜 정치가가 되어야죠.
6. 그 ‘미래’가 이런 ‘현재’…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가훈보다 중요한 금과옥조로 알고, 전위정당과 의회정치의 역사를 ‘글로’ 배워, 계속 진보정당을 후원했고 늘 ‘미래’에 투표한다고 자위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뀌었습니다. ‘가능한 현재’에 ‘전략 투표’하는 것으로. 이명박근혜 시대에 말입니다. ‘미래’가 이런 ‘현재’일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돈선거와 소선구제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합니다. (소선구제가 아니라면 지금 쓰고 있는 말들이 다 필요 없지만요.) 정치판 헬조선을 구성하는 매트릭스의 어느 한 고리는 확실히 끊어내야 하는데, 그 복잡한 방책은 단지 ‘독자 노선’에 있지 않은 거 같습니다. 그 당 혼자 힘으로도 불가능합니다. 그 당 자체도 준비가 안 돼 있고요.
어떤 형태로든 이 나라에서 ‘연대’는 정언명령이며, 정치란 끝없는 ‘협상’입니다. 이게 지난 30년 진보정치 운동의 역사를 나름 지켜본 깨달음입니다. 진보정당 관계자들이나 지지자들이나 정말 ‘정치’할 것을 바라 봅니다. 오늘은 정말 2008년, 2012년의 미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