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총선에 쓰일 투표용지가 인쇄되기 시작했다. 그 중 비례대표 투표용지에 실릴 정당의 수는 21개, 한국 총선 역사상 가장 많은 개수다. 기입할 정당이 늘어나니 용지도 길어졌다. 33.5cm, 이 역시 한국 총선 역사상 가장 긴 길이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각 정당이 배정받은 번호는 낯선 듯 익숙하다. 노동당이 14번, 녹색당은 15번, 민중연합당은 16번이다. 원내정당의 경우에는 정의당이 4번, 국민의당이 3번, 더불어민주당이 2번, 새누리당이 1번이다.
배정된 정당기호를 각 정당들의 역사와 함께 잠시 들여다 보자.
- 2012년에 창당하여 2015년에는 ‘같은 이름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당’이 된 녹색당은 15번째 칸에 적힐 예정이다.
- 2008년 진보신당으로 창당해 8년 동안 명맥을 이어온 노동당은 그 한 칸 위다.
- 2016년 2월 2일에 창당한 국민의당은 세 번째 칸에 자리 잡았다.
- 2012년 진보정의당으로 창당해 나름 원내 제3당으로 꾸준히 활동해온 정의당은 국민의당에 밀려 4번을 배정받았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공교육에서 성별이나 키 순서로 학생들에게 번호를 부여하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상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줄 세우기의 원칙이 조금 더 섬세해야 한다는 명제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무리 익숙한 줄 세우기의 원칙이라 하더라도 다시 한 번 검토해볼 필요는 있다는 거다.
투표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다. ‘원내정당-원외정당 순, 원내정당은 의석수 순, 원외정당은 가나다순’이라는 거친 원칙에 대한 의문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발통문을 돌려 정당투표를 하게 할 게 아니라면, 선거 종류를 막론하고 1번이 많은 표를 득표할 가능성이 크다는 경험적 사실을 알고 있다면, 특히 스무 개가 넘는 선택지의 투표용지 속에서 위편에 존재하는 정당들이 더욱 ‘쉬운’ 선택지가 될 것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면, 투표라는 행위 자체의 한계를 고려하고서라도, 더 나은 번호 배정의 기준을 마련해서 위와 같은 아이러니가 양산되는 것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아래 기사를 참고하여 다른 나라의 사례를 살펴보자. 우선 프랑스·일본·영국·미국 같은 나라에는 거대정당을 우선으로 하는 정당기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은 한국과 거의 비슷한 원칙을 채택하고 있지만, 정당의 정책을 보고 투표하는 문화가 더 정착되어 있는 편이라 상황이 다르다. 사실 굳이 다른 나라 사례까지 볼 필요도 없다. 1969년 대통령 선거법이 개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선거기호는 중앙선거위원회위원장의 추첨에 의해 결정됐다.
정당이 많은 게 문제인가
순서에 대해 논하다 보니 어쩐지 비례대표를 낸 정당이 21개나 되는 게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사지선다나 오지선다 정도만 됐어도 14번 같은 애매한 기호는 안 나왔을 게 아닌가. 이미 언급했듯, 이번 투표용지에 적힐 정당은 총 21개다. 이 정도 개수라면 아주 오랫동안 양당 정치 지형을 갖고 있는 나라라는 정의가 무색할 지경이다. 바야흐로 정당 전성시대다.
그런데 이게 한국의 ‘소수정당의 활동을 보장하는 몇몇 정치제도들의 효과로 발생한 군소정치의 난립’이라 판단한다면 오산이다. 한국의 정치관계법에는 오히려 소수정당의 활동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위헌 결정을 받고 사라졌지만 2년 전까지만 해도 버젓이 존재했던 ‘정당등록 취소조항’은 아주 대표적인 예다. 이 조항으로 인해 등록 취소가 돼버린 정당들은 ‘제도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엄청난 행정비용을 지출해야 했다. 그런데 정치관계법에 따르면 국고보조금은 (생존의 걱정이 없는) 원내정당에만 지급된단다. ‘국회 의석수’를 제외하고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자원을 배분하는 다른 기준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소수정당들은 국고보조금의 지급 기준인 원내 진입을 최우선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다. 선천적으로 지역구 선거에 불리한 입장이니 비례 쪽이 조금 더 나은 선택이다. 그런데 이제 턱없이 부족한 비례의석이 장벽이 된다. 안 그래도 부족한 비례 의석은 심지어 최근 줄어들기까지 했다. (무려 7석이나…)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선거를 치를 때의 장벽들―후보등록 기탁금, 비례대표 후보 선거운동 제한, 소수정당 TV 토론회 출연권 제한―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문제는 1, 2번에 ‘몰빵’하는 제도다
그래서 원외 소수정당의 입지는 극도로 불안하다. 같은 이름으로 비슷한 구성원을 유지한 채 생존하는 소수정당들은 점점 드물어지는데, 힘들게 생존하더라도 선거 단타를 노리고 (그리고 ㄱ으로 시작하는 이름 빨로) 횡행하는 유령정당들에 가려서 정당투표 순번도 뒤로 밀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실제로 1번, 2번과 다른 정치를 해보겠다고 만들어졌던 한국의 진보정당들은, 과거에 복잡한 이합집산과 당명 개정의 과정을 되풀이해야 했다. 여기에는 소수정당이 생존하기 힘든 한국 정치의 ‘생태계’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쉽게 말하자면 먹고 살기가 힘드니까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자꾸 다른 길을 모색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군소정당의 난립 같아 보이는 현재 상황이 오히려 거대양당에 힘을 실어주는 정치관계법 때문이고, 이건 ‘진짜’ 군소정당의 난립이 결코 아니라는 거다. 선거철 지나서 평소 정치활동들을 살펴보면 어떤 정당들이 정말 ‘유효한’ 정당들인지 추려진다. 문제는, 그 유효한 활동의 총체적인 양이 투표용지에 반영이 안 된다는 사실이다.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군소정당의 난립’
이쯤 되니 이런 의문이 든다. 아 근데, 군소 정당 좀, 난립하면 안 되나?
한국 정치 역사에서 진짜 제대로 된 군소정당들이 난립하면서 치열하게 정치 노선으로 경쟁하고 충분히 정치화된 시민들의 지지와 외면으로 생존이 막 결정되고 그랬던 적이 정말 있었나? 아이스크림은 31개나 넘게 골라 먹는 재미를 강조하면서, 왜 5천만 시민들의 정치적 태도는 기껏해야 두세 개 정도의 선택지 안에 가두려고 하는가? 그런 제도는 대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
주인공은 역시 그 제도에 힘입어 세를 잃지 않고 있는 1번, 2번이다. 그들이 제도의 유지를 위한 정치적 행위들을 적극적으로 또는 남모르게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1번과 2번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제도 아래서는 ‘소신투표’라는 단어의 모순도, 투표의 모순을 강화하는 ‘사표 심리’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 총선 사상 역대 최장 투표용지’가 가진 의미는 꽤 심오하다. 원내정당이 됐든 원외정당이 됐든, 1번과 2번에 맞서 끈질기게 활동해 온, 그러나 항상 ‘야권을 통째로 궤멸시킨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한국의 소수정당들이 겪은 곤란한 시간들. 그 긴 투표용지 속에는 긴 고난의 시간이 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