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병영 대한민국
군대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둘 다 겪어보고 나니, 반대로 사회가 군대의 확장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한국은 병영국가인가?
아니다. 병영국가는 병영의 형태를 띤 ‘국가’다. 모든 체계가 병영처럼 돌아가긴 하지만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다. 한국은 그 단계조차 넘어선 국가병영, 즉 국가의 형태를 띤 ‘병영’이 더 옳은 표현인 것 같다.
병영이 입법·사법·행정 체계를 가지고 돌아간다. 대학교는 병사들이 내무생활을 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병영치고는 놀랍도록 훌륭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여대생이 밤에 술집에서 일한다고 혀를 찰 게 아니라, 술집 여자가 낮에는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대견하게 여길 일이다.
군대와 사회는 비슷하다. 그런데 그 이유는 전 국민의 절반도 되지 않는 군필자가 군대 문화를 사회에 퍼뜨린 탓이 아니었다. 오히려 군입대자의 100%를 차지하는 한국 사람이 한국 문화를 군대에 퍼뜨리고 있는 탓이었다!
우리의 상처는 우리에게서 온다
모두가 헬조선을 이야기하고 꼰대를 이야기하지만, 헬조선의 원인은 모두 남에게서 찾지 자신을 반성하는 사람은 없다. 헬조선은 수천억을 가진 부자나 국회의원급 권력자나 나이 지긋한 아저씨 부장에게만 있지 않다.
그들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기에는 너무 수가 적다. 회장이 전 국민의 뺨을 한 번씩 때리려면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다. 우리가 맞는 뺨의 대부분은 우리에게서 온다. 남보다 한 푼 더 가진 자, 한 단계 더 높은 자, 한 살 더 많은 바로 나, 너, 우리가 헬조선의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냥도 살기 힘든 삶을 왜 서로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을까. 남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아서다. 행복이 나에게만 있지 않다. 남이 잘 나가면 배가 아픈 것을 넘어서 남의 배가 아파야 내가 행복해진다.
나보다 약한(‘낮은’이 아니다!) 사람의 행복과 권리를 빼앗음으로써, 내가 가진 것을 늘리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단계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처음에는 물도 마음대로 못 마시고, 화장도 못 하고, 침상에서 눕지도 못하고, 술도 못 마시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상태를 포기하는 등의, 온라인게임 무과금 유저와 같은 제약에서 시작한다.
그러다 하급자는 차츰 제약이 풀리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상급자는 원래부터 금지되지 말았어야 할 것을 허락하는 과정에서 권력의 쾌감을 느낀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단지 시간대에 따라 달리 불리는 같은 집단이다. 끝까지 착한 놈은 집단이 사라지기 전의 최후 편입자밖에 없다.
신입 여학생들이 저녁에 과방에 모여 각자 다이제 한 통을 다 먹어야 집에 보내주는, 그래서 선배들의 미모와 매력을 건방지게 추월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가혹 행위가 없었던 이유가 궁금하다. 그만큼 악랄하지 않아서일까?
지금껏 일어났던 가혹행위와 똥군기의 수준을 생각해보면, 단지 그런 가혹행위를 생각해 낼 머리가 부족했을 뿐이다. 악(惡)이 지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지에서 오는 것이기를 빌어본다.
원문: John Lee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