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더스의 값진 승리, 뒤집히지 않은 승기
이제 중반을 넘어선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샌더스가 값진 승리를 거뒀다. 지난 22일 화요일 열린 3개 주(아리조나, 유타, 아이다호) 경선에서, 가장 많은 선거인단이 걸린 아리조나에서는 꽤 큰 차이로 패배했으나 다른 두 개 주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대세를 뒤집을 만한 승리는 아니다. 클린턴은 앞선 슈퍼 화요일과 미니 슈퍼 화요일을 모두 가져가며 이미 승기를 잡은 상황이다. 이 상황을 뒤집으려면 유타나 아이다호처럼 작은 주가 아니라 뉴욕이나 캘리포니아 쯤 되는 초대형 주에서의 승리가 필요하지만, 뉴욕은 힐러리의 텃밭이고 캘리포니아도 쉽지 않다. 샌더스가 이번 승리로 레이스를 이어갈 힘을 얻긴 했지만, 한참 뒤쳐진 위치는 여전히 그대로다. 민주당 주요 인사들은 샌더스에게 경쟁을 그만둘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백인, 비도시, 리버럴, 저연령층
장기간의 경기 침체, 제조업의 쇠락과 함께 녹이 슬어버린 공업지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청년층의 사회 진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대변되는 월 스트리트의 돈놀이. 샌더스의 강력한 힘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샌더스는 오랫동안 사회주의자를 자칭하며 미국의 빈부 격차 문제를 지적하고 월 스트리트를 적대시해왔다. 그의 일관된 행보는 미국의 경제 상황과 맞물려 비도심권, 백인 노동자 계층, 저연령층, 리버럴이라는 그의 주요 지지층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러나 그가 한 주의 상원의원으로서 일관성있고 값진 행보를 보인 것과 별개로, 대통령에 어울리는 정책 기반을 닦았는지는 의문스럽다. 그는 하나만 보고 둘은 못 보는 후보라는 비판을 받는다. 어떤 질문을 받더라도 그건 빈부 격차 때문이며 클린턴과 친하게 지내는 월 스트리트가 만악의 근원이라고 대답한다. 이는 그의 열광적인 지지층–백인, 비도시, 리버럴, 저연령층–을 더욱 열광시키지만, 그 밖의 계층을 납득시키지는 못한다.
포퓰리즘
아래의 칼럼에서 대니 로드릭 하버드 케네디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버니 샌더스를 도널드 트럼프와 함께 포퓰리스트로 규정한다.
상품ㆍ서비스ㆍ자본 시장의 국제화는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범세계주의적이고 전문적이며 기술을 갖춘 그룹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간극을 더욱 벌려놓았다.
이 과정에서 두 가지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됐다. 정체성의 갈라짐, 국적과 민족성 또는 종교 중심으로 돌아가는 정체성의 갈등과 사회적 계급 중심으로 돌아가는 소득의 갈등이 그것이다.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은 두 가지 갈등 중 하나를 이용해 호소력을 끌어올린다. 트럼프 같은 우파 포퓰리스트는 정체성 정치학에 집중한다. 버니 샌더스 같은 좌파 포퓰리스트는 빈부의 격차를 강조한다.
두 부류 모두 분노의 대상이 되는 ‘타자’를 지목한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든가? 당신의 일자리를 중국인들이 빼앗았기 때문이다. 범죄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가? 멕시코인들과 다른 이민자들이 범죄조직 간의 싸움을 이 나라에 가져와서 그런 것이다. 테러리즘? 그거야 당연히 이슬람교도들 때문이 아니겠는가. 정치적 부패? 대형 은행들이 정치 제도에 자금을 대고 있는 상황에서 뭘 기대하는가. 주류 정치 엘리트들과 달리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은 대중의 불행을 이런 용의자들 책임으로 쉽게 돌릴 수 있다.
실제로 샌더스는 거의 대부분의 사회 갈등을 결국 빈부 격차 때문이며 그 주범은 월 스트리트라고 환원해버린다. 지난 2월 11일 밀워키 민주당 대선 경선 토론회로 돌아가보자. 사회자는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조차 인종 갈등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후보자들은 어떻게 인종 갈등 문제를 개선할 것인지 질문하였다.
클린턴은 이에 오바마 집권 하에서 인종 문제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음을 지적하며, 덕분에 어떤 과제가 주어졌는지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퍼거슨 시위를 예로 들며 사법 및 경찰 제도의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한편, 교육과 주거, 직업 제공의 중요성도 함께 강조했다. 한편 샌더스는 아래와 같이 대답했다.
음, 저는 이 (인종 갈등) 문제가 월 스트리트의 참담하고 불법적인 행동의 결과로 수백 만의 삶이 훼손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직업을 잃고, 집을 잃고, 노후 자금을 잃었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라티노 집단은 특히 타격이 컸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월 스트리트 붕괴로 부의 절반을 잃었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미성년자의 빈곤율은 35%에 달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청년 실업률은 51%에 달하고, 믿을 수 없이 높은 투옥률로 자녀들이 아버지 또는 어머니 없이 집에 남겨지고 있는 가운데, 우린 제도적인 인종 차별을 분명히 직시할 수 있습니다. 우리 경제는 부익부 빈익빈 상태입니다. 슬프게도, 오늘날 미국 경제에서, 빈곤층 대부분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입니다.
─ Transcription of the Democratic Presidential Debate in Milwaukee, The New York Times
클린턴이 실제 제도적인 인종 차별 문제에 집중하는 반면 샌더스는 인종 차별 문제 또한 월 스트리트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접근한다.
같은 날 샌더스는 “헨리 키신저는 내 친구가 아니”라는 발언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샌더스는 클린턴이 헨리 키신저로부터 조언을 얻었다는 것을 공격하며, 그는 역대 가장 파괴적인 국무장관이며 자신은 결코 그로부터 조언을 얻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이에 클린턴이 헨리 키신저는 비판할 부분도 있지만, 중국의 문호를 연 점 등 뛰어난 업적도 있다고 반박하자, 샌더스는 이렇게 재반박했다.
맞습니다. 그가 중국의 문호를 열었죠. 그리고 수많은 무역 협정을 밀어붙였고, 기업들이 중국으로 옮겨가며 미국인들은 직업을 잃었죠.
인종 차별이 문제인가? 월 스트리트가 흑인들의 직업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경기 침체로 일자리를 잃었는가? 중국이 제조업계의 일자리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샌더스의 주장이 완전히 글러먹은 것까진 아닐지라도, 이런 단순화된 도식은 사회 갈등, 외교, 경제적 이해 관계 등의 기반에 자리한 복잡한 현실을 설명하지 못함은 물론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한다. 한국일보 칼럼이 말하듯 분노의 대상이 되는 ‘타자’를 지목하고 대중의 불행을 손쉽게 책임지우는 일종의 포퓰리즘이다.
기축세력과의 전쟁
한국일보 칼럼은 샌더스와 트럼프를 포퓰리스트로 규정하면서도, 어쨌든 그들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데 주목한다. 장기간 기득권을 잡고 있었던 주류 정치인들이 그 경력에 얽매여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새 말이다. 양당의 지지자들은 여기에서 한 술 더 뜬다. 실제로 양당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두 후보의 지지자들은 양당의 기축세력이 대자본과 기성 주류 정치권과 결탁하여, 심지어는 서로 결탁하여 정치를 가진 자들만의 것으로 전락시킨다고 주장한다.
때때로 그들은 전선을 지나치게 넓게 확대한다. 기축세력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클린턴 지지자들을 곧 기축세력에 복무하는 자들로 규정하거나, 샌더스의 공약을 제대로 모르는 무지렁이로 보는 것이다. 일부 지지자들은 흑인 인구 비중이 높은 주에서 클린턴이 승승장구하자 진짜 자기 편(샌더스)를 놔두고 위선자(클린턴)을 지지한다거나, 공약을 잘 모르고 유명한 사람을 지지한다거나 하는 말들로 흑인들을 비난했다.
프레시안의 기사는 샌더스 열풍이 힘을 못 쓰는 까닭이 ‘기득권 세력이 총 궐기하여 반격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아래는 그 일부다.
워싱턴 정가는 오바마 대통령과 바이든 부통령, 보수 중도 의원들이 샌더스의 민주적 사회주의가 민주당 정체성에 부합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오바마를 넘어서’라고 주장하는 샌더스의 복지 정책이 오바마 유산인 오바마 케어(전 국민 의료 보험 제도)를 훼손한다고 분노합니다.
기득권 세력인 흑인 지도부와 시민 운동 정치가는 학생 때부터 흑인 시민 운동에 참여한 힐러리를 영웅화하면서 흑인 몰표를 몰아주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만들기’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조건 없는 지지를 호소합니다.
결론적으로, 민주당의 보수 제도권과 기득권이 반샌더스 운동의 장벽을 공고히 쌓고 있고 샌더스 돌풍이 여기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민주당의 기축세력이 샌더스보다 클린턴을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민주당의 주축 세력을 상징하는 ‘슈퍼 대의원’들은 클린턴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샌더스의 정책은 실제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비판에 부딪치고 있고, 이 비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합당한 비판마저 기축세력의 궐기로 규정해버리면 대화가 불가능하다.
심지어 대표적인 소수계층인 흑인, 여성까지 클린턴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보수 제도권과 기득권과 같이 묶어버린다. 프레시안의 이 기사는 샌더스의 선거운동이 왜 다양한 계층을 공략하는 데 실패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을 위한 공약을 내걸고 그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메시지를 던지는 대신 그들의 어리석음, 기득권과의 야합을 탓하는 식이다.
왜 흑인(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가
레딧의 한 유저는 “왜 샌더스는 흑인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가”란 질문에 대해 장문의 답변을 남겼다. 샌더스 캠프와 그 지지자들이 외연을 확대하지 못하는 이유를 잘 설명한 글이라 생각해 소개한다.
첫째 이유는 샌더스의 급진적인 정책이 실제 실현 가능하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월 스트리트 개혁으로 대표되는 경제 정책에서도 똑같이 맞부닥친 문제다. 이상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기는 쉽지만, 실제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또한, 샌더스의 지지자들은 샌더스가 늘 시민 인권을 주장해왔으며 흑인들 곁에 있었다고 말하지만, 샌더스는 대선을 앞두고 부각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었다. 반면 힐러리 클린턴은 영부인, 국무장관으로서 중앙 정치권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도 흑인에 우호적인 정치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배우자인 빌 클린턴이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다. 이런 클린턴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이 대체 왜 샌더스를 지지하겠는가.
반면 샌더스의 지지자들은 지나치게 광적이다. 흑인들이 샌더스를 지지하지 않는 것을 무지 때문인 양 공격한다. 인터넷엔 클린턴을 공격하는 글들이 넘쳐나고, 샌더스를 지지하지 않는 것, 샌더스가 당선되지 않는 것이 곧 민주주의의 파괴인 양 과장하는 목소리가 많은 공감을 얻고 최다 추천 댓글 자리를 차지한다.
진보의 외연
물론 샌더스가 벽에 부딪친 것이 온전히 샌더스와 그 지지자들의 탓은 아니다. 경선 돌입 전까지 샌더스는 주류 미디어로부터 거의 주목받지 못했으며, 경선 후에도 주류 TV 미디어들은 그를 클린턴만큼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다. (사실 클린턴도 트럼프에 비하면 한참 비중이 떨어졌다. TV 미디어들이 의도적으로 샌더스를 배제했을 수도 있지만, 그저 화제성이 떨어졌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샌더스 캠프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다. 기존 지지층 사이에서의 광적인 지지는 점점 확대되었지만, 그 외의 계층, 여성, 도시민, 중노년층, 비(非) 백인들은 그 열풍에 동참하지 않았다. 복잡한 사회에 어울리는, 다양한 계층의 이해를 반영한 복합적인 정책을 내는 대신 오직 모든 책임을 월 스트리트(와 그에 영합하는 클린턴)에 돌리는 단순한 메시지만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샌더스를 지지하지 않으면 기득권이거나 무지한 것이라고 공격했다.
최저시급 만 원, 주중 근무시간 단축, 기본소득, 박근혜표 노동개혁 반대… 한국에서도,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내세우는 진보적 정책이 지지받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다만 유념해야 할 것은 외연을 무리하게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회는 복잡하며, 계층의 이해는 다양하다. 이상의 정책에 동의하더라도, 진보의 수권능력에 대한 불신으로 다른 세력을 지지할 수 있다.
또한 저 정책들이 절대선인 것 또한 아니다. 당장 최저시급 만 원 정책은 자영업자는 물론 저소득 노동자 계층을 붕괴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으며, 일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임금 상승으로 인한 경기 활성화가 부작용을 상쇄할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극히 미약하다.
핵심적인 메시지와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외연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여전히 세가 작은 진보 계층이 맞닥뜨린 영원한 숙제라 할 것이다. 샌더스는 좋은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흔들림없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만큼이나, 복잡한 사회, 각계각층의 이해에 고루 접근할 줄 아는 실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지지층의 열광을 이끌어내는 것만큼이나, 조금은 진정된 목소리로 왜 우리의 메시지가 충분한 공감을 얻지 못하는지를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그거다. 울타리를 넓히기 전에, 울타리 밖은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들이 살고 무엇을 요구하는지 들여다보는 것. 우리편의 광적인 목소리에 잡아먹히기 전에 저 너머의 목소리를 먼저 듣는 것. 유례없이 압도적인 팬덤을 얻은 샌더스가 결국 클린턴에게 밀리고 있는 까닭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문: 임예인의 새벽 내리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