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례대표제의 명암
정당이 얻은 득표율에 따라 의원 수를 배분하는 비례대표제는 현행 소선거구제, 지역구 위주 선거제도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좋은 완충장치다. 지역구에서 1위를 차지해야만 원내 진입이 가능한 현행 제도는 군소정당과 사회 약자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비례대표제는 비교적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더라도 적어도 얻은 표만큼은 의석을 배분함으로써 표의 비례성을 높일 뿐 아니라 군소정당의 약진을 돕는다. 또한 지역구 제도에서는 당선을 기대하기 힘든 각계 전문가들과 소수자들을 배치함으로써 지역구 위주 정치의 함정에서 벗어나 전문적이고 합리적인 의정활동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례대표제는 당내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을 경우 문제를 일으키기도 쉽다. 유권자들이 후보 하나하나를 뽑는 게 아니라, 후보 자체는 정당이 결정하고 유권자는 정당에만 표를 던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식 정당명부제 등 비례대표 위주의 총선 제도가 현행 지역구 위주 소선거구제보다 더 나은 방식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실제 헬조선에선 실현되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친박연대 공천헌금 사태,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태 등은 비례대표제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극적으로 떨어뜨렸다.
더민주 비례 사태
이번 총선에서 비례대표 추천 명단을 두고 가장 큰 내홍을 겪은 것은 더불어민주당이다. 공중파 뉴스, 조선일보 등을 중심으로 학계 인물들을 포진시켜 더민주의 운동권 색깔을 뺐다는 호평도 나왔으나, 인물 면면의 매력이 없고 정작 어떤 전문성을 확보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혹평도 많았다.
특히 비례 1번에 내정된 박경미 교수는 논란의 중심이었다. 내정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과거 제자 논문을 표절했다는 뉴스가 터졌다. 해명은 궁색했다. 그가 대표하는 전문성이란 것도 모호했다. 김종인 대표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를 비례 1번으로 내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금 시대가 옛날이랑 달라요. 최근에 와서 무슨 알파고인가 뭔가 가지고 떠들어 대는데. 앞으로 모든 우리나라 분야 세계 경제상황이 인공지능이니 뭐니 이런 쪽으로만 가는 거 아니야 컴퓨터나 전부 다 수학하는 사람들이 하는 거야. 그래서 그 분한테 사정해서 본인한테 사정해서 모셔온 건데. 본인한테 다 들었어. 옛날에 있던 사정, 저 무슨 제자 뭐 있던 일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확인하고 내가 한 거야.”
박경미 교수는 칼럼니스트이자 수학 교양서 저자로 활동한 경력이 있으며, 박근혜 정부의 대학구조개혁위원을 지냈다. (그 방향에 공감하든 공감하지 않든) 교육 정책을 위해 내정했다면 말이 되지만, 알파고나 인공지능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다. 홍창선 공천관리위원장 역시 “아이들 수학에 힘들어하고 알파고에 수학도 중요하지 않냐”는 괴상한 이유를 대 빈축을 샀다.
이는 시민사회나 운동권 출신을 배제하고 학계 출신을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전문성을 높였다는 세간의 호평을 무색하게 한다. 심지어 비례 1번조차 후보 본인의 경력과 당 대표·공천관리위원장이 밝히는 영입 이유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단순히 학계 인물을 초빙하는 것만으로 원내에서의 전문성이 확보된다면, 국회를 해산하고 대학교에 정치를 맡기면 그만일 것이다. 그 인물을 통해 어떤 정책을 표방할 것인가, 어떤 정치를 위해 그 전문성을 활용할 것인가가 이 ‘삽질’ 덕분에 완전히 연무 속에 가려져 버렸다.
비례대표 후보는 지역구 후보가 갖기 힘든 전문성을 갖출 수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계층, 특히 소수 계층을 대변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이 비례 1번에 전순옥 참여성복지터 대표를, 2번에 최동익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대표를 배정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전자는 취약 계층이나 영세사업장 노동자를, 후자는 장애인을 대변하는 인사였다. 새누리당은 지난 총선에 이자스민 의원을 비례대표로 공천하기도 했다. (다만 새누리당의 이자스민 공천은 그리 좋은 반응을 얻진 못했다.)
그러나 이번 더민주 비례대표 명단에선 이런 배려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시각장애인인 이재서 총신대 교수가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후퇴했다. 청년 계층을 대변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청년비례 파행 또한 상징적이다.
문제인사 포진한 새누리의 비례 친위대
새누리당은 비례 1번에 송희경 KT 전무를 배치했다. 28년차 워킹맘이자 사물인터넷 전문가로, 여성, IT, 창조경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 만하다. 2번에는 DMZ 수색 작전에서 위험에 처한 후임을 구하려다 지뢰를 밟고 두 다리를 잃은 이종명 전 육군 대령이 자리했다. 그는 사고 후에도 군으로 돌아가 육군대학 교관으로 복무했다. 1, 2번 답게 상징성이 명확한 인사다. 더민주보다 오히려 노동계 인물들이 약진한 점도 눈에 띈다. 한국노총 전현직 임원이 상위권에 포진했다.
그러나 몇몇 인물들로 눈을 돌려보자.
전희경 자유경제원 사무총장이 비례 9번에 포진한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에서 찬성 측에 서서 활동했는데, 그 주장에 근거가 없고 논리가 심각할 정도로 부실했으며 허위사실과 이중잣대로 궤변을 편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몸을 담고 있는 자유경제원 역시 그럴듯한 이름과는 달리 학술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거나 완전히 사실과 다른 주장을 자주 내고 있으며, 심지어 윤서인을 강사로 추천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전경련과의 유착관계도 의심되는 단체다.
비례 5번을 받은 최연혜 전 코레일 사장은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에 반대하는 노조 파업에 강경 대응하며 “어머니의 마음으로 직원들을 직위해제했다”는 유명한 망언을 남겼다. 또 그는 이 사태가 채 진정되기도 전에 새누리당 지도부를 방문, 이 자리에서 자신이 출마했던 지역구의 당협위원장 인선을 부탁해 인사 청탁 의혹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는 비례대표 출마를 위해 코레일 사장직을 사임했다.
16번을 받은 강효상 전 조선일보 편집국장의 경우에도 문제가 크다. 그는 작년 말까지도 편집국장직에 있었다. 정권과 건전한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할 언론인이 바로 정권과 연을 맺는다는 것은 언론과 정계의 신뢰도를 모두 흔드는 중대한 문제다.
14번을 받은 조훈현 프로바둑기사는 왜 저기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 알파고가 진화하여 바둑으로 인류 존망을 결정할 날이 오면 인류의 최종병기로 보낼 계획인 것 같다(…). 그 외에는, 유명해서 표 받기 좋다는 것 말고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유가 없다. (허정무도 있지만 당선권 밖이므로 그냥 넘어가자.)
한겨레는 친박 인사가 대거 포진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유승민 무공천 논란이 대표하듯, 이거야 지역구도 매한가지라 비례만 문제가 아니긴 하다. 하지만 전문성을 확보하고 다양한 계층을 대변해야 할 비례대표가 특정 정치 세력을 위한 친위세력을 무혈입성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청년 계층으로는 신보라 청년이여는미래 대표가 비례 7번을 받았다. 그동안 꾸준히 임금피크제로 대표되는 고용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지지해 온 인물로, 정권이 추구하는 노동 개혁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수로 보인다. 앞서 노동계 인물이 상위 비례 순번을 차지하긴 했지만, 한국노총의 성향상,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권의 노동 개혁 정책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
정의당의 당원투표, 녹색당의 순환제
정의당은 2만여 당원이 온라인, 현장, 문자투표 등을 통해 직접 투표하여 비례대표 후보를 추렸다. 그 결과 이정미 당 부대표, 김종대 정의당 국방개혁단장, 추혜선 당 언론개혁기획단장, 윤서하 전남도당 위원장이 1번에서 4번까지 배정받았다.
당원들에게 선택을 맡긴다는 점에서는 민주적이지만, 참신한 인재를 발굴하기는 힘들다는 약점이 있다. 과거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태와 같이 계파별 힘싸움이 벌어지고 그 역학관계에 따라 계파의 대표 인물들이 순번을 차지하는 등, 소위 정파투표가 대세를 결정할 우려도 있다. 이번 비례를 두고도 인천연합 등 계파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녹색당은 비례대표에 당선될 경우 2년 임기를 마친 뒤 사퇴하여 후순위 후보자에게 국회의원직을 승계하는 순환제를 당규로 채택했다. 첫 2년간은 1번 후보자가 국회의원, 2번 후보자는 보좌진으로 활동하고, 다음 2년간은 2번 후보자가 국회의원, 1번 후보자가 보좌진이 되는 독특한 방식이다. 그러나 원내에서의 경험이 일천하고 지지 세력도 없는 녹색당 국회의원이 심지어 임기까지 2년 수준으로 짧아서야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있을지가 의문시된다.
노동당은 용혜인, 구교현 후보가 나선다. 용혜인은 알바노조 활동과 “가만히 있으라”의 제안자로 유명한 청년 정치인이며, 구교현은 노동당 대표이자 알바노조 위원장이다. 노동당은 기본소득 30만원, 최저임금 1만원, 노동시간 주 35시간 단축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는데, 그 실행 계획은 구체적이지 않다.
군소정당의 문제는 역시 수권능력 부재일 것이다. 정의당이 수권능력을 증명하겠다며 예비내각을 출범하긴 했지만, 언론개혁부, 동물복지부 등 이상한(?) 부처들을 예비내각에 포함시킨 반면 당연히 있어야 할 외교, 교육, 법무, 경제, 노동, 복지 등의 분야는 비워놓는 등 오히려 수권능력이 없음을 증명하는 반증이 되고 말았던 바 있다.
물론 군소정당은 비례대표 개인의 면면을 떠나 원내진출 자체만으로도 대안세력으로서의 의미가 있는만큼, 거대 양당과 같은 기준을 적용해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만일 비례대표제를 전면적으로 확대한다면야 이들을 향해서도 비판의 날을 더 무섭게 갈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다.
무엇을 위한 비례대표인가
한 표 한 표의 가치가 똑같이 소중하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현행 선거제도는 별로 그렇지가 않다. 시골의 한 표는 도시의 한 표보다 심하면 2배 가까이 값어치가 높다. 호남에서 던지는 새누리 지지 표와 영남에서 던지는 더민주 지지 표는 대부분 쓸모가 없다. 지역을 위한 선심성 공약이 난무한다.
비례대표제는 이런 구멍을 메우기 위한 좋은 대안이지만, 그 암(暗)은 여전히 깊다. 비례대표 명단이 발표될 때마다 각 당은 구설수에 오른다. 더민주는 교수진들을 세웠고, 새누리는 친위대들을 박아넣은 가운데, 소수 계층을 대표할 인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보통 의석수가 많은 거대 양당이 주로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군소정당의 비례대표 명단이라 해서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보수 군소정당에서는 공천헌금 사태가, 진보 군소정당측에서는 부정경선 사태가 터졌다.
결국 비례대표제가 지지받기 위해서는 당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잡아야 하겠지만, 보혁을 막론하고 여전히 정파가 정당을 지배하고 계파간의 알력싸움이 정당의 전부처럼 여겨지는 한국의 풍토에서는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내에서의 인재 육성, 정책능력 양성조차 제대로 되고 있지 못한 현실에서는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원문: 임예인의 새벽 내리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