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민주 비례 사태
이해찬, 정청래 등 유명 의원들의 컷오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다고 생각했던 더불어민주당의 총선 공천이 뜻밖의 암초에 걸렸다. 아니, 암초에 걸렸다기보다 스스로 암초로 돌진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김종인 본인이 비례 2번으로 나섰을 뿐 아니라, 그 후보들의 매력도 현저히(…) 떨어졌다. 비례 1번을 받은 박경미 교수의 경우 그가 비례 1번으로 나선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자 논문 표절 논란 등 구설수만 거셌다.
언론은 주로 비례 명단을 두고 벌어진 논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정체성 논란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다. 이번에 발표된 더민주 비례대표 후보 명단의 문제는, 인물 면면의 매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지난 총선 때와 비교해보자. 그때도 논란이 있는 인물들이 없지는 않았고 당대표를 당선 안정권에 배치하는 등의 문제로 비판을 받았지만, 이번 명단과 비교하자면 격이 다를 지경이다.
논란들, 다 제쳐놓는다 치자. 그럼 남는 게 없다. 논란을 빼면 화제가 없다. 화제가 되는 인물이 없다. 그만한 중량감있는 인사도 없고 그만하게 참신한 인사도 없다. 논란이고 뭐고 그냥 엉망이란 얘기가 나올 만 하지 않나. 소수 계층 배려야 그냥 갖다 버렸다 치자. 그러나 이번 비례 후보 명단이 정말로 ‘더민주의 정책적 역량이 집결된 전문가들의 풀’이란 말인가.
조선 사설 정도의 지면은 이번 명단에 각계 전문가가 포함되었다고 호평하지만, 이는 19대 비례를 운동권 일색으로 폄하하고 나아가 더민주를 운동권 정당으로 규정하려는 포석으로 읽힌다. 시민단체 출신 대신 학계 인물을 채워넣는 것이 꼭 문제는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 명단이 당내 정책 연구원들을 뽑는 게 아니라 정치를 할 사람을 뽑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며 수학교양서 베스트셀러 작가를 내정하는 것이 정말 전문성을 강조한 인사인가. 이 교수들이 보여줄 비전은 무엇인가. 그런 건 다 필요없고 교수를 세우기만 하면 전문성이 확보되는 것이라면, 한국의 대학교를 수권하게 함이 차라리 합당하지 않겠나.
결국 비례 순번을 정했어야 할 중앙위는 파행으로 치달았고, 김종인 본인의 비례 순번을 밑으로 내리는 건 물론 논란을 일으킨 비례 후보자들을 명단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김종인은 이에 당무를 거부하는 등 격정적으로 대응했고,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도 분노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총선을 코앞에 둔 더민주 내부에 수습할 수 없을 정도의 파열음이 발생하고 있다.
결과도 문제지만, 과정은 더 문제다
김종인 대표는 이해찬, 정청래 등의 컷오프에 대해 “정무적 판단”이라며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 사실 명분이 없는 컷오프는 아니었다. 이해찬은 특정 계파의 좌장을 넘어서서 6선을 한 다선(多選)의원이기도 하다. 정청래는 ‘공갈’ 발언이 주로 구설수에 올랐지만 그 전에도 선을 넘거나 음모론에 힘을 실어주는 언행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문제는 과정이다. 납득할 수 있는 이유와 명분이다. 의정활동만 따지자면 딱히 컷오프될 까닭이 없는 사람들을 컷오프시켰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김종인은 그 모든 걸 “정무적 판단”이라 눙쳐버렸고, 사람들은 그 “정무적 판단” 뒤에 숨은 큰 뜻에 대해 알아서 추론하고 합리화했다. 이 과정에서 홍창선 공천관리위원장은 지난 10일 “정청래의 막말은 귀여운 수준”이라고 하더니, 다음날인 11일에는 “(정청래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처럼 (막말의) 챔피언 수준이 된 것”이라고 말하는 등 오락가락하며 혼란을 부채질했다.
홍창선은 물의를 일으킨 것을 넘어 범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엽기적인 모습도 여러 차례 연출했다. 1차 경선지역 발표 때의 사례를 보자.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그는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것을 보고 “못하겠습니다 눈이 부셔서. (플래시) 없어도 잘 나오던데” 라며 역정을 냈다. 뒤이어 개인 전화기로 전화가 온다 불만을 제기하며 자신의 공적(?) 전화번호를 불러준 뒤, “지금 이 번호로 제일 빨리 전화한 분에게 상을 주겠다”는 엽기적인 발언으로 기자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심지어는 이런 해프닝을 일으켜놓고 하라는 경선지역 발표는 안 하고 단상을 내려가려 하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메일로 이미 발송했다나 뭐래나).
청년비례 선정 과정은 점입가경이다. 전자가 해프닝이라면 이쪽은 사건이다. 문재인 전 대표의 영입인사이자 당선이 유력시되었던 김빈 후보가 탈락하는 과정에서, 홍창선 위원장의 비서 출신 인물이 공천되고 당직자가 그에게 ‘첨삭지도’를 했다는 의혹이 벌어지며 온갖 잡음이 터져나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매끄럽지 못한 청년비례 선발 과정에 대해 책임자로서 사과를 하는 게 먼저일텐데, 우리의 홍창선 위원장께서는 여기에서도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센스를 보여주었다. 오히려 피해자라 할 청년비례대표들과 문제를 제기한 김광진, 장하나 의원을 두고 “어디 직장이라도 사회 경험을 쌓고 들어와야지, 국회가 청년 일자리 하나 구해 주는 게 아니다”,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된다” 등의 막말을 쏟아낸 것이다. 실로 ‘그분’을 연상시키는 유체이탈 화법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표류하는 야당을 구하기 위한 “정무적 판단”으로 간주되었다. 평시라면 난리가 나도 한참 전에 났을텐데, 이 모든 함량 미달의 발언들이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은 채 넘어갔다.
격앙된 김종인의 “정무적 판단”
김종인은 그동안 꾸준히 대표로서의 권한에 집착했다. 공동선대위원장 얘기가 나올 때부터 “단일 체제로 갈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표는 선대위 발족과 함께 권한을 모두 내려놓는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며 완전한 1인 체제를 못박았다. 비상사태임을 주장하며 “공천과 관련해 내가 (일하는 데) 장애가 있으면 안 된다”며 비대위에 공천 관련 권한을 일임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의 뜻대로, 당규는 개정되었고 비대위의 권한은 계속해서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비상사태라는 주장 덕에 용인되었다. 적어도 여기까지라면 김종인이 말하는 “비상시”의 “정무적 판단”으로 여길 여지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례대표 사태가 터진 이후 김종인의 모습은 그간 그가 내세운 명분이, 노욕(老慾)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한다.
그는 위 인터뷰에서 스스로에게 비례 2번을 부여한 “정무적 판단”의 근거가 무엇인지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민주화를 선명한 기치로 내걸기 위해서”, “비대위 대표로서 선봉에서 총선을 진두지휘하기 위해서” 같은 핑계라도 기대했는데 그조차도 없다. 그저 억지를 부릴 뿐이다. 비례 2번을 받는 것과 후순위를 받는 것 사이의 차이를 다 마찬가지라며 대강 눙쳐버린다. 자기가 아니라면 당이 수권정당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위험해보인다.
더욱 심각한 것은 중앙위가 당헌대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마치 월권인 양 묘사하는 부분이다. 당이 비상이라는 이유로 비대위를 만들었고, 비대위장에 권한을 집중시켰으며, 당규까지 비대위에 유리하게 개정했다. 문제삼자면 얼마든지 문제삼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모든 것은 온당한 절차에 의해 이루어져왔다. 하지만 당헌을 무시하고 중앙위를 무시하며, 중앙위가 정당한 권한을 행사하려 하자 당무를 거부하기까지 한 것은 당내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당헌은 당의 최고 규율이다. 비상시라면 헌법이라도 무시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는 너그럽기가 부처 수준이다. 박종헌 전 참모총장의 비리 사실에 대해 묻자, “내가 무슨 수사기관도 아니고, 몰라” 라고 반응한다. 이제라도 재고 가능성이 있냐는 질문에는 “그건 중앙위가 알아서 할 건데 나한테 물어보”느냐고 말한다. 권한은 비대위에 있지만, 문제가 드러나면 그건 문제를 제기한 중앙위가 책임질 일이라니, 이 권력과 책임의 이분법 역시 실로 완벽히 청와대의 ‘그분’을 본딴 것 같다.
이 격앙된 인터뷰는 “정무적 판단”이란 외피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래서야 수습이나 할 수 있을까 싶다. 논란이 되는 행보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사실 큰 뜻이 있는 것이다, 숨은 뜻이 있는 것이다, “정무적 판단” 이다… 이와 같은 얘기를 되풀이하는 것은 얼마나 덧없는 일인지. 당내 사정에 빠삭한 내부인이라면 몰라도, 우리로선 그저 겉으로 드러난 지향과 가치만을 평가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쯤 되니 부가세니 뭐니 다 변명이었고 그냥 국보위에나 어울리는 인물이었구나, 싶을 뿐이다.
이렇게 된 이상
사실 이 모든 게 문재인의 노림수로, 손 더럽히는 공천작업을 남의 손으로 끝내고 스스로 비대위원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하면서 아무도 반대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갓-비례대표-명단을 내놓으려는 것이다. … 물론 농담이다. 이 모든 게 “정무적 판단”이라면 이런 시나리오라도 써 볼 수 있겠지만. 김종인은 분명 의미있는 인사였고, 또 위험성도 있는 인사였다. 그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며 그 위험성이 한 번에 폭발한 느낌이다.
어찌 될 것인가. 이대로 파열음에 시달리다 침몰할 것인가, 늘 그렇듯이 대강 봉합하고 겉으로나마 단합된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 최종적으로 총선에는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무슨 일만 생기면 “정무적 판단”이라 합리화하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떤 사태를 두고 정치적 유불리부터 따지는 것도 내겐 영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 그저 옳고 그름을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리고 분명히 말하건대, 지금 김종인의 모습은 글러먹었다.
원문: 임예인의 새벽 내리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