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한을 말하는 영어 중에 “Shelf Life” 라는 것이있다. 말그대로 상점에서 선반에 올려 놓아 팔리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기간을 말한다. 모든 직장인에게도 이런 ‘선반에 올려 놓을 수 있는 기간’이 있다.
직장인으로 나의 유통기한은 얼마일까
이 질문에 나 스스로 답을 하는 것을 옳지 않다. 직장인으로서 가치가 있으려면 사용자에게 가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쓰기에 씁쓸하긴 하지만, 냉정하게 바라보면 직장인은 회사로부터 지속적으로 효용 있음을 인정받아야만 하는 존재다. 회사가 바라보는 내 직장생활 유통기한은 얼마일까. 이런 고민 전혀 없이 나에게서 썩은 악취가 날 때야 비로서 유통기한이 다 했음을 외부의 통보로 깨닫는 경우도 많다. 그때서야 부랴부랴 정치나 처세 등의 임시방편으로 기간을 늘리는 사람들도 많다.
정년퇴직을 한다. 공로패도 하나 받는다. 정년퇴직은 직장인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긴 유통기한인 셈이다. 그런데 가끔 대형마트에서 재고떨이 하듯 회사는 경영상의 어려움, 경영진의 판단 등으로 명예퇴직이라는 방편을 통해 유통기한이 아직 남은 직장인을 폐기한다.
직장에서 나는 폐기처분 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아직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아직 젊고 능력도 출중하고 일할 시간이 많이 남은 년차 직장인이니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국내 대기업인 그룹에서는 신입사원을 명예퇴직 시켰다. 이름이야 무엇이라고 부르던 상관없다.
회사가 유통기한은커녕, 입사시키며 서류에 인쇄한 잉크가 마르지도 않은 신입사원을 내팽개친 것이다. 평생 직장은 없다. 언제든 필요에 따라 처분이 가능한 것이 직장인의 운명이 되었다. 법으로도 그리 될 것이다. 처음이 어려울 뿐, 이후는 쉽다. 여타 다른 회사들은 이 기업에 감사할 것이다. 첫 빠따로 욕을 먹어 주었으니 말이다.
유통기한이 남은 내 직장생활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작정 버티기 위해 처세와 줄서기의 세계로 뛰어 들어야 하나?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도록 더, 더, 더, 노력해야 할까? 많은 자기계발서에는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라하지만, 과연 대체 불가능이란 말이 조직에서 가능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대체 불가능 하려면 1% 이내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또 회사는 특별한 누군가에 의존하는 시스템을 싫어한다. 그렇기에 대체 불가능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보다, 그것이 범용적인 것이 되도록 시스템을 만들려고 할 것이다. 냉정한 시각에서 현재의 나를 본다면 나는 회사에서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존재다. 그저 회사에서는 아직 젊다는 이유로 불평, 불만 없이, 문제 없이 일을 시킬 수 있고 써먹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 회사에 필요한 인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그러나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해도, 어느 순간 회사가 더 이상 내가 필요 없게 되면 나는 버려질 수 있다. 경쟁력을 갖춘 직장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하고, 회계 공부를 하는 것일까? 회사에는 도움이 되지만, 과연 그것이 내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정년 퇴직할 때 ‘그는 회사를 위해 충성을 다한 직원이었다’라는 공로패가 당신에게 어떤 가치를 줄 것인가?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는 일들을 하자
결론만 말하면, 직장인들이 회사를 위해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신 회사를 위해 사용되고 소모되고 버려지지 않고 내 안에 쌓이는 것들을 위해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 그것이 회사가 정하는 유통기한이 존재하지 않는 가치를 가진 사람이 되는 시작이라 믿는다.
열심히 일하고 정시 퇴근해서 보내는 가족과의 단란한 식사, 친구들과의 편안한 술자리, 주말의 여유로운 독서, 그리고 강요받은 것이 아닌, 정말 배우고 싶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들 등. 이런 것들은 직장인으로서의 유통기간이 아닌 내 삶의 유통기간을 늘려줄 것이다. 아니 풍요롭게 해줄 것이다. 내가 만들 수 있고, 쉽게 변하지 않는 가치를 위해 시간을 써야겠다. 회사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말하고 미루기만 했던 것들을 하나씩 시작하겠다.
승진도 좋다. 하지만 사랑, 행복, 충만을 만들어 줄 수 있는 ‘Endless’한 가치에 시간을 쓰고 싶다. 5년차 직장인의 삶에 온전히 나만을 위한 가치에 시간을 쓴 적은 거의 없었다. 내일부터는 너무 늦다. 당장 나를 위해 희생하는 아내를 위해 ‘고맙다’는 말을 해주어야겠다.
내 삶에 남이 찍은 바코드, 남이 찍은 유통기한은 없다.
원문: 직장생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