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부심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국 사회
학벌/학력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어떤 자격이 필요하다면(왠지 요즘 분위기는 그런 자격을 요구하는 것 같다. 무슨 자격인지 이해는 안되지만), 어쨌든 아마도 나는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 중 한 명일 것이다. 어쩌다보니, 며칠전 ppss에 관련 글을 썼던 어느분과도 프로필이 비슷한 걸 보니, 역시 그런 자격이 있기는 한가보다.
우선 나는 학벌을 논할 때 빼먹을 수 없는 서울대(무려 그시절엔 의대보다 커트라인 높았던 공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고, 4학년때 우스운 성적으로 중퇴했다. 그해 바로 재수 없는 천재들만 간다는 한예종 영상원에 재수없이 한번에 합격했고, 역시 4년째 되는 해 미련없이 그만뒀다. 즉, 나는 고졸이다.
일부러 헛웃음 나오게 시작해보았지만, 나도 별로 웃기지 않은 이야기라는 거 안다. 어쨌든 이것도 humblebrag(겸손한 자랑질)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으니까. 지방대 자퇴한 사람은 아예 이런 이야기 꺼낼 수도 없는 현실을 아냐고 누군가 손가락질 하겠지. 또는, 뭐 어디 거창한 타이틀 달아본 것도 아니고, 고작 그런 정도로 학벌부심이냐고 비웃는 사람도 있을만 하겠다.
그럼에도, 한국의 학벌중심주의 구조사회에서 어떤 때는 가해자(?)의 입장으로, 어떤 때는 피해자(?)의 입장으로 서봤다, 그러니 나는 학벌폐해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 라고 이야기를 풀려다보니, 이야말로 가장 얼척없는 상황이 아닌가.
학벌 자랑을 문신처럼 과잠에 새기는 현실: 욕하기보다 안타까운
이건 마치 남성은 여성이 살면서 마주쳐야하는 성차별의 진짜 괴로움을 이해할 수 없고, 여성은 남성으로서 받아야하는 과중한 남성중심사회의 사회적 압력을 알 수 없으니, 페미니즘이나 가부장적남성중심사회에 관한 논의를 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트랜스젠더만 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아니, 역시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꼰대스럽게 옛날 이야기를 해보자. 요즘은 학교잠바가 대학생들의 MUSTHAVE 아이템인 것 같은데, 옛날에는 ‘누가 촌스럽게!!!’였는데 격세지감이라 해야할까. 아마도 요즘도 촌스럽게 느끼긴 할 거다. 입을 때마다 살짝 부끄러움도 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와 다르게 (상대적으로) 좋은 학교를 다녀!를 문신처럼 언제나 등짝에 새기고 살아야만 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현실이 이처럼 팍팍 느껴지는 아이템이 있겠는가. 이런 분리와 과시를 통해 상대를 눌러야만 내 자신의 평안함을 얻을 수 있는 삶이라니.
‘똑같은 대학생으로 치지 마세요, 저는 더 노력(?)해서 더 좋은 대학에 갔으니 더 나은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에요’를 다른 사람들이 몰라줄까봐 언제나 온 몸으로 표출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잖아. 힙합스웨거들이 금반지 금팔찌 치렁치렁 걸고 다니는 것처럼. 졸부아줌마가 호피무늬 모피코트 걸치고 다니는 것 처럼.
사실 안타깝고 안스러운 일이지, 욕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 알량한 연세대, 한양대 본캠 잠바 하나 입었다고 고작 20몇년 사는 동안 – 대학에 입학한걸로는 겨우 몇 년 – 유세를 했으면 얼마나 유세를 했고, 이익을 보았다면 또 얼마나 거창한 이익을 받았겠는가. 지하철 요금 할인해주는 것도 아닌데.
급진적 주장은 모두의 입을 닫게 하고, 생산적 논쟁마저 막는다
물론, 사회에 나가서 좋은 학벌로 이익을 보고, 또 누군가에게 간접적인 피해가 되는 일, 그리고 학벌이 나쁘다고 불이익을 받고 능력보다 과소평가되는 일, 한국사회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이 분명히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게 좋은 학교, 나쁜 학교를 나왔다는 그 자체로써 문제인가?
개인이 SKY 나와서 사회의 기득권의 덕을 보았다든가, 또는 최소한 좁쌀만큼이라도 문화권력을 행사했다든가 하는 부분은, 그래 분명 비판할 부분이 있긴 하다. 당사자라면 좀 쪽팔리고 겸연쩍어해야 할 일이고, 개인적 반성이 필요한 정도라면 하면 좋을 일이긴 하지. 그런데 딱 그 정도뿐인 사안이다.
개인 페북 프로필에 학교를 적는 걸로 학벌주의를 조장하니 차단하네 마네 왈가왈부한다는 건, 이미 모든 논의를 거부하자는 것.
남성권력중심의 가부장제폐해 논의에, 일단 남자로 태어났으니 온갖 기득권은 다 누리고 있는 니들은 닥치고 있어로 시작하면 무슨 발전적인 이야기가 가능하겠나. 그저 다짜고짜 한남충은 삼일에 한번 패야 맛… 수준에 머무르는 거지.
뭐, 그것도 나름 사이다같은 말초적 의미는 있겠으나 결국 긍정적인 사회적 구조변화는 아무것도 이끌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출신학교 자체를 가지고 공격하는 것은 개인의 학벌 컴플렉스 해소에는 좋겠지만, 그걸로 고슴도치처럼 아무나 찌른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학벌폐해 논란이 정말로 필요한 곳
그러니 먼저 학벌폐해논란의 망치를 휘둘러야 할 곳은, 채용과 승진에 부적절한 학벌기준을 두고 있는 기업의 인사제도여야 하고, 폐쇄된 학벌네트워크로 돌아가는 각종 조직의 카르텔이어야 하고, ‘이래서 지잡대 출신은 안 돼’를 입에 달고 사는 꼰대들이어야 한다. 그런 것들은 지금 당장 현실 사회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고 있는 구조적 원인이자 결과이니까.
진짜 학벌차별폐해의 구조적 문제가 잡히고 나면, 그 다음에는 페북 프로필로 학교부심을 부리든, 본캠야구잠바를 넘어서 교모,교표를 쓰고 다니든 간에, ‘어이구, 그러셨어요. 뉘에뉘에~’ 한마디로 쌩까서 쪽팔리게 만들어 주는 걸로 충분한 일이 될 테니까.
남자(또는 여자)여서 죄송합니다. 정상인이어서 죄송합니다. 경상도(또는 전라도) 살아서 죄송합니다. 금수저라서 죄송합니다… 를 요구하는 사회란 뭔가 잘못되었다. 그 출신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출신을 어떻게 실제로 악용하는가, 문제를 삼고 타격해야 하는 지점은 바로 그 곳이다.
남자여서 죄송한 게 아니라, 남자로써 입과 손과 좇을 함부로 휘두른 것이 죄송한 것어야 하고, 경상도 살아서 죄송한게 아니라 서울살더라도 홍어홍어거리며 시시덕댄게 죄송한 일이어야 한다.
혹시 모를 학벌주의를 조장할지 모르니 좋은 학교 나온 걸 페북 프로필에 걸어두었는지 감시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정작 감시해야 할 것은, 우리 회사 채용규정이나 승진심사에는 혹시 이런 학벌중심주의의 폐해가 반영되고 있지 않은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잘못된 관행에 딴지거는 용기들이 진짜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