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원래는 이러려던 게 아니지만 뭐 어쨌든.
나는 원래 PPSS에 기고할 원고를 하나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도 지난 크리스마스 이후 무려 5개월에 걸쳐서(…). 사실 글도 90% 가까이 써놨고, 제목도 정해놓은 상태였지만 마지막 10%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제논의 역설에 부딪혀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PPSS의 전직 성경험자 리승환님에게 온갖 원고독촉에 시달리며 살다가, 이번에는 쉽게 피해 가기 어려운 주제를 만나고 말았다. 최근 며칠 간 폭풍과도 같은 이슈 메이커로 맹활약(?)하고 있는 팝픽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원래 비장한 각오로 치욕적 비난을 곁들여가며 까버리려던 인간이 하나 따로 있었지만 그 인간은 잠시 방치해 두고 이 사건의 이야기를 좀 해보고자 한다.
1. 팝픽 사건은 무엇인가?
인터넷 검색보다 돈 버는 데 더 관심이 있거나, 생업에 종사하느라 이슈를 볼 여유가 없거나, 이미 알고 있지만 한번 더 듣고 싶어하는 분 등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려하여 현재 진행 중인 팝픽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팝픽은 주로 게임업계 취업을 준비하거나 해당 업계에서 현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주된 활동을 벌이는 네이버 카페 ‘방방 곡곡, 창작을 배우는 사람들(이하 방사)’을 기반(=미네랄)으로, 완성된 일러스트레이션과 작업 과정을 담은 단행본을 출간하며 교육과정, 관련 사업 등을 전개하는 업체로서 다음과 같이 활동해 왔다.
– 실무 지향적인 일러스트레이터 양성 학원 운영을 통한 인재 양성과 자체 인력 확보
– 현직 일러스트레이터와의 협업 관계 구성
– 일러스트레이션 화집 등 단행본 출간을 통해 일러스트레이터의 포트폴리오 보급
– 게임업체의 디자인 외주 작업을 통해 일러스트레이터 저변 확대
– 한국 일러스트레이션 업계의 역량 강화를 통한 세계화 사업
그리고 이러한 일러스트레이션 기반 사업활동에 필수적인 인력인 일러스트레이터의 발굴과 그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국내 최대급의 커뮤니티인 방사를 통한 운영이 매우 중요시되었다. 그런데 카페에 상업 목적의 광고가 붙으면서 회원과 운영자 간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것은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쌓여있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신호였다. 운영자 측은 이 험한 세상에서 모질게 살기 위해서 자신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 오만한 설명을 읽은 회원 중 갈등의 원인에 대해 할 말이 있는 이들을 통해서 팝픽이 전개했던 활동의 다른 모습들이 설명되기 시작하였다.
– 실무 지향적인 일러스트레이터 양성 학원 운영을 통한 인재 양성과 자체 인력 확보 – 학원생들에게 실무교육이라는 명목으로 1일 8시간을 초과하는 장시간 작업을 강요. 그것도 실무능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기술, 지식의 교육 없이 일방적인 작업만을 강요. 이러한 노동 과정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근무태도, 작업물 완성도 등을 문제 삼아 최저임금보다 훨씬 낮은 비용만을 지급.
– 현직 일러스트레이터와의 협업 관계 구성 – 현직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어려운 상황에 대한 협력을 요청하며, 해당 일러스트레이터의 외주 비용보다 훨씬 낮은 비용으로 일러스트레이션을 의뢰하거나 비용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음. 해외 출판 시 판권 등에 대한 보상을 지급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실제 해외 출판이 진행된 사실을 통보하지 않고 이에 대한 비용도 지급하지 않음.
– 일러스트레이션 화집 등 단행본 출간을 통해 일러스트레이터의 포트폴리오 보급 – 단행본 제작과 발행은 스케줄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안정하게 진행. 편집과 발행을 책임진 발행인이자 디자이너, 구매 희망 시 입금계좌주는 송 대표의 친동생이며, 팝픽에서 공개한 자료상으로는 친동생의 주거편의를 위한 오피스텔 보증금으로 공금 1천만 원을 사용하였음.
– 게임업체의 디자인 외주 작업을 통해 일러스트레이터 저변 확대 – 일부 게임업체가 일러스트레이션 외주 업무를 의뢰하였으나, 작업자 현황 등 회사 리소스에 대해 거짓 보고. 완성도가 떨어지는 납품으로 의뢰업체의 사업진행에 차질을 줌.
– 한국 일러스트레이션 업계의 역량 강화를 통한 세계화 사업 – 일본, 중국 등지에 현지어로 재편집한 서적을 발행하였으나, 일러스트레이터와 관련자들에게 해당 사실을 통보하지 않음. 이로 인한 수익규모와 재분배 등에 대해서도 불확실한 상태.
여기에 소득 신고와 세무 관련 의혹 등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으나, 팝픽 측은 5월 10일 금요일 오후 세무서 확인이 필요하므로 주말에는 입장 표명이 곤란하다는 답변을 하였을 뿐이며, 5월 13일 월요일 카페 방사의 운영자 권한을 방사 회원에게 양도한 후 현재까지 일체의 외부 활동을 중지하고 침묵하고 있다.
2. 이 이야기는 가해자나 피해자 둘 중 누구 하나를 까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 살다 보면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힘들 때도 있습니다.”라는 미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이 해를 입는 사람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또 설령 그런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더 측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다 보면 가해자를 작살내기보다는 피해자를 조지는데 더 주력하는 상황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중년남성이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가해자가 욕을 먹는 장면보다는 피해자를 상대로 “젊은 여자애가 처신을 어떻게 하길래 그런 꼴을 당하느냐.”라던가 “당하는 쪽도 문제가 있다.”라는 다이나믹한 비난에 시달리는 모습을 더욱 많이 보게 되는 경우이다. 이와 비슷하게 돈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으면 돈을 안 주는 사람이 비난을 받을 뿐 아니라 돈을 못 받는 사람조차 ‘자기 밥그릇도 못 챙기는 등신’소리를 듣는 억울한 꼴을 겪게 된다.
사람마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야 여럿 있겠지만, 분명히 하고 넘어가자. 천지자지 아기자지, 아, 이건 이현세 만화에 나오는 드립이고… 천지지지 자지아지(天知地知 子知我知),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안다는 말처럼 돈에 얽힌 문제에서는 돈을 지급하는 측의 책임이 더 무거운 법이다. 헌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돈을 제때 제값으로 주지 못한다면 그에 대한 납득할만한 이유를 설명해 줘야 한다. 팝픽 측은 이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감성과 개인사가 중심이 된 장황한 문장만을 늘어놓았으며, 객관적인 자료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끊임없이 터져 나오던 각종 증언을 보는 것만으로도 개인적으로 대단히 화가 나는 일이었다. 허나 조금은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본다면 팝픽 측이 잠수를 탔을 뿐이지, 결론이 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팝픽을 비난하거나 그들의 잘못을 꼬집기보다는, 이런 상황의 피해자 입장에 서게 되는 어린 문화생산자들이 왜 ‘삥’을 뜯기고, 그들이 뜯어 먹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3. 일단 자기과시나 자기애가 쩌는 사람하곤 일을 하지 마라.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과시가 강하고 자기애가 강한 사람은 사회초년생이 가까이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혐오보단 낫고, 주장이 강하고 행동력이 강한 사람은 남들이 도전하지 못 하는 목표를 달성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과 입만 산 사기꾼을 구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최소한 4~5년, 길게는 10년 정도는 이런저런 일도 해보고 뒤통수도 맞아봐야 ‘선수’를 알아볼 수 있다.
선수들은 선수들끼리 싸워야 한다. 만약 산전수전 겪은 선수라 하더라도 사회 초년생을 보면 챙겨주고 다독여줘야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과시용 블로그에 남들 보라고 써놓는 글에나 들어갈 만한 도덕론일 뿐, 그런 글 쓰는 색… 흥분할 뻔했다. 암튼 그런 사람들도 돈이 걸린 문제에선 둥글둥글 넘어가는 경우가 없다.
이러한 자기과시형 인간은 목표 설정도 상당히 높게 잡고, 그 목적을 향해서 주변 사람을 희생시키며 끌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정신이 박힌(…) 선수라면 어리버리한 사회초년생을 엄청 굴려서 키워서 잡아먹기라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스스로 나가겠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혹독하게 부려먹고서는 “실망이다. 이 정도였구나.”같은 미친 대사를 들려주고 더럽게 마무리를 짓고 자기 지인들에게 “걔 정말 실망이다.”로 운을 떼는 뒷말을 퍼뜨리거나 한발 더 나아가서 없는 죄도 뒤집어씌우는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상황이 이러하건만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거나, 성장을 위해 배울 점을 찾는 사람이라면, 이미 왕성한 활동을 하는 이의 매체 인터뷰나 인터넷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 동경의 대상으로 삼기가 쉽다. 특히 트위터가 그런 점에서 위험한 매체이다.
자신의 행동에 자신감을 보이며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사람도 특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죄지은 거 없으니 당당하게 얼굴 보며 이야기하자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정말 문제없는 사람은 귀찮게시리 만나서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는다. 문제가 발생하면 만날 필요도 없이 얼굴 안 보고도 해결할 수 있게 일을 풀어나가지, 상황이 꼬였는데 구태여 만납시다, 얼굴 보며 이야기합시다, 오해를 풀겠습니다… 이러면서 비공개적인 장소에서 말빨로 해결하려는 사람은 굉장히 위험하다.
간혹가다가 “길 가다가 만나면 쌍욕을 해도 좋습니다. 근데 저한테 그런 얘길 하실 수 있는 분도 자격을 갖추셔야 한다는 겁니다.”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당신이 사회생활을 이제 막 시작하거나 경험이 부족하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기회나 인간관계를 기대하지 말고, 이런 이와의 접촉을 최대한 멀리해야 한다.
4. 돈으로 장난치는 장난꾸러기와는 일을 하지 마라.
무슨 일을 하더라도 고용자의 요구에 비해 피고용자의 업무능력이 낮을 수는 있다. 그래서 야단을 맞을 수도 있고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화풀이로 필요 이상의 공격적인 발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업무능력을 이유로 원래 지급하게 되어 있는 급여나 비용을 지급하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 음식물 쓰레기 같은 XX야. 우리 집 냉장고 탈취제가 너보단 보고서 잘 쓰겠다.”같은 소리도 들어봤다. 대단히 신선(?)하고 모욕적인 비난이었는데, 그런 치욕적 비난을 듣던 시절에도 돈은 제때 들어왔다.
이건 욕먹는 게 당연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적인 모욕보다도 돈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이걸 보면 발끈할 양반들이 있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한다. 돈을 받으면 돈 만큼의 일을 해야 하고, 일을 했으면 일 만큼의 돈을 줘야 한다. 어차피 인간대우 받기는 힘든 세상, 돈이 아니면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는가?
그런데 그런 마지막 보루인 돈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은 최악의 장난꾸러기이다. 열심히 일을 했는데 업무 결과가 안 좋다고 돈을 깎거나 안 주겠다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사회초년생 입장에서는 돈 몇만 원이 족쇄가 되어 관계를 못 끊는 경우가 많다. 또 스스로를 평가할 때 아직 사회경험이 많지 않고 스스로 업무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억울한 마음이 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각오를 다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말고 그냥 다른 일 찾아보는 게 낫다. 동종업계의 다른 직장을 찾던지 아예 그냥 다른 직업으로 갈아타든지 하는 게 맞다. 물론 실제로 업무능력이 떨어져서 업무할당량을 못 채우거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 했을 수도 있다. 이럴 때 제대로 된 작업 관리자는 아직 사회경험이 부족한 작업자의 업무능력 부족을 초기에 파악하고, 업무 능력을 개선해 주거나 업무를 당장 중단시킨다.
급여를 지급해야 할 때까지 계속 일을 시켜놓고 ‘결과적으로 돈 줄 실력이 아니었다’라거나, (다소 과장된 예시일 수는 있겠지만) 그림을 그리는 일을 시켜놓고, “과연 그 그림을 돈 받고 팔 자신은 있는 겁니까?”하면서 급여 지급을 미루거나 비용을 깎는다는 건 관리자 역량이 없는 자임을 스스로 인증하는 행위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모 매장의 아르바이트를 갔다가 하루 만에 잘려본 사람이다(…). 잘리는 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 매장 매니저는 나에게 업무와 내가 안 맞는 점을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해 줬으며 그 하루만큼의 노동의 대가로 받을 급여를 지급해 줬다. 업무 관리자라면 자신의 작업장에 들어온 작업자가 그 일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최대한 빨리 파악해서 작업장과 작업자 양쪽에 리스크가 최대한 적은 판단과 행동을 해야 한다.
만약 사회에 발을 내딛는 사람이 그런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억울하고 해온 일이 아깝고 미련이 남더라도 그런 곳과는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체계적이며 논리적인 업무 관리를 하는 곳을 찾는 길을 권해줄 것이다.
5. 업무에 가족 이야기를 끌어넣는 자와는 일을 하지 마라.
일하는 곳에는 가족이 필요 없다. ‘가족 같은 회사가 족같은 회사’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일할 때는 가족 이야기 꺼내는 게 아니라는 건 전쟁영화만 봐도 알 수 있다. 참호에서 가족이나 약혼자 사진을 꺼내는 녀석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기억해 보자.
가족은 최후의 인질이다. 맞닥뜨린 상황을 해결하고 싶지만, 돈이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최후의 방법이 가족이다. 이건 무척 슬프고 냉정한 이야기이다. 정리해고 대상자가 “제가 잘리면 가족들이 길바닥에서 자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직장 상사의 바짓가랑이를 잡는 노동자 역시 자신의 업무능력이나 정치적 능력으로는 사형선고를 벗어날 수 없기에 가족을 들고일어나는 것이다.
그나마 부양가족에 대한 고민도 고용자가 피고용자에게 가져야 하는 고민이지, 피고용자가 고용자의 가족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없다. 물론 사회생활하다 보면 조문을 갈 일도 있고, 회사 동료의 가족사로 술자리에서 같이 고민을 나눌 일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먼 미래의 일, 사회인으로서 자리를 잡은 후의 일이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고용자가 애 키우느라 얼마나 힘든지 어떤지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다. 세상의 쓴맛을 보기도 전에 남의 가족의 쓴맛에 취해줄 여유는 없지 않은가?
인간은 자신의 안녕을 위해 얼마든지 가족을 이용해먹을 수 있는 동물이다. 설령 일터에서 알게 된 사람이 동생 같고 형제 같다고 잘해주겠다는 말에도 곧이 넘어가선 안 된다. 일단 형제자매 사이라는 게 거지 같다는 건 형제자매가 있는 사람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정말 자기 형제자매 같다고 생각하면 회사 돈 뜯어다가 원룸 보증금이라도 빚어주겠지, 그렇게 몸이 망가지도록 일을 시키겠는가.
6. ‘그래도 이 바닥에서 먹고 살려면…’
업무 경험이 적은 문화생산자들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노동력을 빨아먹을 뿐인 악덕 작업장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후환’이다. 그들은 간접경험을 통해 한국의 문화 업계가 좁은 영역 안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들끼리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네트워크의 구성원에게 밉보일 경우 앞으로의 업계 생활이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공포 때문에 그들의 포악한 관리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경력이 올곧지 않아 여러 분야의 업종에서 일을 해봤다. 분야는 각기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이 바닥은 좁다’는 말이다. 실제로 한국은 무척 좁은 나라이고, 5천만에 불과한 인구 안에서 한 직종의 종사자들 간의 커뮤니티도 오밀조밀하게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누군가 돈을 떼어먹거나 사고를 치거나 전화로 쌍욕을 퍼붓거나 하는 식의 사고를 치면 며칠 사이로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져 나가게 된다.
이러다 보니 경력이 짧은 사람이 자기 뜻대로 안 되거나, 자신이 원치 않는 타이밍에 회사를 관둘 때 저주처럼 내뱉는 말이 있다. “이 바닥 좁다.”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다. 실제로 어느 업계든 바닥이 좁아서 아는 이름 몇 개만 말해보면 금방 겹치는 이름이 나오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뜻대로 움직일 필요는 없다.
7. “그럼 그 돈은 포기해야 하나요??? ㅠㅠ”
받아야 할 돈이 있는데 줄 사람은 줄 생각은 안 한다. 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둘 중 하나이다. 가슴에 칼을 품고 포기하는 방법과 걔네 엄마 멱살을 잡고 흔들어서라도 받아내는 방법이다. 비싼 수업료를 치를 생각이 되어 있다면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만약 전념을 다해 집중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다면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정 포기할 수 없다면 독하게 돈을 받아내야 한다.
우선 계약서가 없이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계약서 없이 일부터 하자는 곳이 많은데 결국 그런 일들은 돈 못 받고 흐지부지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내가 그런 식으로 돈 많이 못 받아본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돈과 관련된 문제는 전화가 아닌 이메일로 항상 공손하고 정확한 내용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 좋다. 아직 어린 학생이라면 어른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집안 어른에게 도와달라고 하기 어렵다면 주변의 지인에게라도 부탁해야 한다.
그러나 일러스트레이터 등의 직업을 희망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절차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그 과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돈을 밝히는 행동으로 보일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일러스트레이터 등 문화생산업 종사자를 지원해 주고 그들의 권익을 보호해주는 에이전시나 조합 등의 단체의 필요성이 이전부터 대두되어 왔다. 그런데 그런 단체의 역할을 해주리라 생각한 곳에서 설마 이런 문제가 터졌으니, 세상은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하는 야생정글이다.
다행히도(?) IT 업계와 영화, 소설 등 문화생산계 종사자 중 개발, 창작 관련 업무를 진행하고 그 급여와 수당 등을 받아야 하건만 돈을 못 받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법률상담사례로도 이와 같은 사례를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 고민거리가 있다고 네이버 지식인에 징징대고 자기가 활동하는 게시판에 징징대지만 말고 정확한 상담과 정보를 선택해야 한다.
서울시 무료법률상담실은 국번 없이 120번으로 전화예약을 할 수 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공공서비스로 도움 받겠는가? 오세훈이 남겨 둔 유일한 업적을 이때 아니면 언제 써먹겠는가? 돈을 안 주는 사람 입장에서도 “인터넷에 물어봤어요”나 “제가 아는 동호회 형이 그래요”보다는 “서울시 법률상담소에 문의하였습니다.”라는 말 쪽이 더욱 압박감이 크다.
아니면 돈 안 주는 놈 집 앞에 엎어져서 배 째는 방법 밖에 없는데, 이것도 못 받은 돈이 500만원을 넘어서는 정도는 되어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므로 어린 친구들은 구경만 하고 절대로 따라하지 않기를 바란다(…).
8. 그래서요?
나는 게임, 애니메이션, 모바일, IT 개발, 출판, 소품 제작 등 다양한 업종에서 일하며 지금까지 1000만 원이 넘는 돈을 못 받았다(…).
지금이야 밥벌이를 하니까 열 받으면서도 당장 밥값을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 부담을 덜어낼 수 있다. 그러나 당장 밥 한 끼를 못 사 먹어 쫄쫄 굶고 인터넷으로 뭘 해보려고 해도 인터넷 요금을 못 내서 아무것도 못 하던 시절엔 1만 원, 5만 원 받을 돈 못 받고 여기저기에 돈 빌리러 다니는 자신이 증오스러워서 죽어버리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렇기에 받아야 할 돈을 못 받고 경력과 능력을 삥뜯긴 젊은 친구들의 피해담이 속속들이 등장하는 이번 사건을 보며 재미있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하다. 지나고 나면 쓰디쓴 추억이 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증오와 인간불신이 더욱 커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젊은 친구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자신의 경력과 경험, 돈을 소중히 하라고 말이다. 아무리 열정이 몸을 감싸 돌더라도 그 열정에 몸을 맡기지 않기를 바란다. 현실은 열정 따위로 몸을 덥힐 수 없을 정도로 차갑다.
9. 어린 친구들 앞에서 ‘무슨 짓거리야?’
문제가 일어나기 불과 한 달 전 시사투데이에 게재된 보도자료에 의하면 팝픽 송 대표는 ‘자신이 직접 터득한 노하우를 중심으로 실무형 인재양성’을 하겠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정도 이슈화가 되도록 그가 강의했던 청강대학교 만화일러스트레이션과 학생들과 팝픽아카데미 학생들 중 누구 한 명 그의 교육성과를 인정하는 이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가 인재양성을 자처한 교육자로서 부족한 사람이라고 해석될 뿐이다. 그는 아마도 학생들에게 실무형 인재가 되는 데에 필요한 것을 가르쳐주지 못했을 것이다.
가르쳐주지 못한 것은 하나가 더 있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쳐주지 못하는 선생과 선배를 구분하고 따라가는 요령을 가르쳐주지 못한 것이다. 의무교육과정의 선생을 골라서 수업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학원의 강사는 선택할 수 있다. 지금도 포털 사이트 곳곳에 온갖 학원의 강사들이 자기는 쓰레기 같은 강의는 만들지 않는다며, 오직 정석만을 찝어내 준다며 비싼 돈 들여서 광고를 퍼붓고 있는 것은 학생들에게 선택받기 위해서이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과 가족, 친지들 사이에서는 어떤 학원이 좋고 어떤 강사가 족집게인지에 대한 정보가 돈다. 노량진 학원가에서도 어느 학원, 어느 강사의 강좌가 효과적인지에 대한 정보가 돈다. 그러나 일러스트레이터를 지망한 학생들은 그 정도의 정보를 교환하거나 강사를 선택하는 고민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요리를 예로 들자면 생선요리 레시피만 가르쳐주고 좋은 생선가게와 생선 고르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은 셈이다. 정말 필요한 건 가르쳐주지 않고 복잡하고 비싼 교육 과정만을 중시하는 비효율 교육은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는 새로이 사회생활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말한다. 의욕을 가지고 도전해라, 대기업만이 전부는 아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선배들 책상을 닦아라, 목소리 크게 인사해라, 전화를 받을 땐 친절하게 받아라, 술자리에선 신나게 놀아라…
이 모든 것이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라며 술자리, 취업설명회, 명절 가족모임 등지에서 흘러나오지만 정작 치사하고 야비한 사회생활을 견뎌 나가야 할 최소한의 생존법조차 가르쳐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치 대한민국 군대에서 고참 신발 챙기는 것과 기수 외우기는 강요하면서 탄창 갈아 끼우기는 직접 하지 못 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다 보니 앞서 업계에 발을 담근 실무자들의 경험 전파가 매우 중요한데 이 또한 그다지 말끔하지가 않다.
최근 게임업계에 유행하는 것이 취업 준비생에게 요령을 설명하는 글이다. 몇 년씩 회사를 다닌 실무 경력자들이 자신의 블로그나 트위터에 ‘게임회사에 들어오려는 분들께’같은 제목으로 글을 쓰는데 나는 그런 사람들이 쓴 글 중에서 정작 도움이 되는 건 별로 본 게 없다.
그런 글들에서는 대부분 ‘너희가 내 밑에서 일하려면 정신 좀 차려야 할 껄?’이라는 문구가 배경에 깔려있는 느낌을 받는다. 정작 적성과 역량에 맞는 취업 준비하는 방법이나 연봉 협상 시 주의사항 등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글은 별로 없다. 물론 동호회에서 알게 된 형이나 친구 따라서 게임회사 들어간 인간들이야 아는 것도 없이 매일 야근한답시고 타사 게임이나 하면서 노니까 해줄 말도 없고 부려 먹을 애가 필요하니 허세나 떨겠지만, 그런 인간들만 회사에 다니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그러니 실무자들과 접촉할 기회도 없이 동경심 만을 가지고 실무교육이라는 낚시에 걸린 어린 학생들이 북한 정치범 수용소 같은 기형적 공간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부끄러운 스캔들에 한쪽 다리가 얽힌 형국으로 옴짝달싹 못 하게 되는 것이다.
10. 마치며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소위 ‘경력자’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나이를 한 살이라도 더 먹고 일을 1년이라도 더 했다면, 이력서나 자기 블로그에 올려놓을 경력이 한 줄이라도 더 있고 자신이 종사하는 직업에 대해 해줄 수 있는 말이 한마디라도 더 있다면, 그 경험과 연륜으로 젊은 친구들 앞에서 가오를 세우기보다는 젊은 친구들이 가오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사실은 일 열심히 하고 싶었지만 정치에 치어서 고생한 업계인’ 코스프레 좀 그만 하고 말이다. 세상물정 모르는 애들 앞에서 폼 잡으면서 무슨 지랄들이냐? 걔네가 회사 들어가서 1년만 굴러보면 너네가 어떤 년놈이었는지 뻔히 알아낼 거다.
천지지지 자지아지(天知地知 子知我知),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