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교육청이 관내 중고등학교에 『친일인명사전』(아래 『사전』) 배포에 나서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2014년 말, 서울시의회는 2015년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사전』을 보급하기로 하고 예산을 책정했다. 이미 『사전』을 보유하고 있는 학교를 뺀 583개 중·고교가 배포 대상이었다.
그런데 여당 소속 시의원들까지 동의하여 만장일치로 통과된 이 예산은 1년 넘게 집행되지 못했다. 이른바 ‘보수를 참칭하는 극우세력’들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해를 넘겨 예산이 불용 처리되게 되자, 서울시교육청은 구입 예산 교부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도 보수 진영에서 딴지를 걸었다.
『사전』 예산 교부 방침이 알려지자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등 보수 학부모단체들이 ‘정치 사전’ 운운하며 배포에 제동을 걸었다. 여기에 보수 언론들이 일제히 부당한 ‘강제배포’라고 거들었다. 끝내는 자율교육학부모연대라는 낯선 이름의 단체가 서울행정법원에 예산집행정지가처분신청을 냈다. 교육부도 서울시교육청에 공문을 보내 절차를 문제 삼으며 배포중단을 종용하고 있다.
일선 학교의 반란?
여기까지는 제1막이었다. 제2막은 말하자면 ‘일선 학교의 반란’이다. 10여 개 중고교에서 서울시교육청에서 내려보낸 『사전』 구입 예산을 거부하거나 집행 보류 방침을 밝혔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사전』 구입을 거부하거나 예산 사용을 유보하겠다는 입장을 정한 학교는 서울디지텍고 등 고교 4곳, 창동중 등 중학교 6곳이라고 한다.
<동아일보>는 친절하게도 학교별 반응을 전하고 있는데 이들 학교의 입장이란 게 묘하다. “사회적 논란이 있으니 당장 구입하지 않고 다시 논의하겠다.”는 그나마 양반이다. “예산 편성은 하겠지만 실제 구입은 하지 않을 것”이라거나 “사라고 하니까 사긴 하겠지만 교장실 창고에 놔둘 것”이라는 반응은 한마디로 ‘배 째라’는 속내가 드러난다.
단위학교에서 감독기관의 지시나 방침을 어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단위학교나 학교장이란 자리는 이 나라 교육 행정 조직의 최말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지엄한 지시를 거부하려면 그야말로 대단한 소신이 있거나 명백하게 그 지시가 부당한 것이어야 한다.
관점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교육청에서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사전』을 보급하기로 한 결정에 문제가 있거나 그게 부당한 방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광복 70년이 지났어도 그 오욕의 식민지시기를 청산하지 못한 게 우리 부끄러운 현대사다. 정부 대신 그 청산되지 못한 역사를 정리한 게 민간단체 민족문제연구소(아래 민문연)고 그 결과물이 『사전』이기 때문이다.
이들 보수단체들이 『사전』 배포를 반대하는 논리를 민문연 조세열 사무총장은 회보 『민족사랑』 2월호에서 실은 글(‘난신적자’들이 떨었다고 전해라)을 통해서 세 가지로 정리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보수단체들의 반대논리는 『사전』의 정치적 편향성, 민간단체인 민문연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 그리고 교육현장의 자율권 침해 등으로 정리되는데 조 사무총장은 이 논리를 매우 명쾌하게 뒤엎어버린다. (표 참조)
특히 그는 『사전』에 민문연 관계자들과 밀접한 이들이 다수 포함된 사실을 상기시킨다. 민문연의 정신적 지주인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의 부친 임문호,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의 스승 백철을 비롯해 다수 지도위원 운영위원들의 선대와 스승들이 『사전』에 등재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사전』의 공정성을 의심하는 게 터무니없는 시비라는 그의 지적에는 아무 무리가 없다. 『사전』은 일제강점기 공문서, 신문, 잡지 등 3천여 종의 문헌자료와 250만 건의 인물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해 만든 ‘사실’ 중심의 인물사전이다.
수록 대상자의 유족과 보수단체가 ‘발행 또는 게재의 금지를 구하는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지만 2010년 대법원은 최종 기각 판결을 내렸고 일부 유족이 제기한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 역시 기각된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각각 “『친일인명사전』은 특정 개인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를 공정하게 기록하고 평가하기 위한 것”이고 “표현 내용이 진실하고 목적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시했던 것이다.
민간단체인 민문연의 공신력에 대한 시비도 터무니없긴 매일반이다. 정부부처나 사법부,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검찰조차 연구소에 인물정보를 조회하고 있는 현실은 민문연의 공신력에 대한 설명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교육부의 ‘이달의 스승’ 사업, 국가보훈처의 서훈 심사대상자에 대한 친일행적 조회, 문화관광부의 ‘이달의 문화인물’, 여성가족부의 ‘한국 최초의 여성인물’ 등의 검증이 연구소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국가보훈처가 2011년 4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을 취소한 것도 『사전』과 연구소의 공신력을 웅변으로 증빙하는 것이다.
한편, 『사전』 구입 예산을 거부하거나 집행을 보류하겠다는 이들 학교가 무슨 대단한 소신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앞서 살펴보았듯 이들 학교는 “정치적 논란이 있는 책을 학교에 비치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해명 뒤에 숨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떠오른 ‘정치적 논란’은 일별해 보았듯 보수 단체들의 터무니없는 억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교육부의 비호 아래 ‘교육현장의 자율권’을 강변하고 있지만,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전체 고교에서 철저하게 외면받았던 상황을 뒤집어 생각하면 간단히 풀리는 문제다.
대상학교 583개 가운데 오직 10개교가 이 사업을 거부하고 나선 이면을 상상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그들이 우려하는 ‘정치적 논란’은 나머지 573개 학교와는 무관한 것일까. 이들 10개교의 선택이 매우 정치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을 그들도 미루어 짐작하고 있지는 않을까.
97돌 삼일절… 초등 사회과 교과서
올해로 삼일절은 97돌을 맞았다. 97년 전 이날, 들불처럼 타오른 민족적 저항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헌법 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나라의 존립 근거라는 사실의 확인이다.
그런데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면서 1948년 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포장하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지 못해 안달하는 세력들이 현재의 집권 세력이고 이들은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결정했다.
역사교육연대회의가 공개한 초등 역사교과서 분석 결과는 이들의 저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위안부’ 용어를 삭제해 논란을 빚은 초등 사회과 국정교과서는 ‘5·16쿠데타와 10월 유신을 비호하는 등 박정희 정권 찬양 일색’이라고 한다. 퇴행이 명확한 교과서 국정화에 목을 맨 이유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박정희 정권에 대해 ‘독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5·16쿠데타를 긍정적으로 서술하는가 하면 박정희 정부는 국가 안보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10월 유신을 선포했다”고 썼다.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유신 헌법’이라는 종전 기술을 삭제했지만, 헌법과 민주주의를 유린한 유신의 부당성에 대한 설명은 없다. 5·16과 유신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대통령의 인식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특정 목적을 위한 역사 왜곡은 국정교과서가 권력의 입김에 휘둘릴 수 있다는 그간의 우려가 입증된 셈이다. 이처럼 역사 왜곡이 시도되는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사실’ 중심의 인물사전인 『친일인명사전』의 존재 이유는 빛난다.
스마트폰 어플 <친일인명사전>에서 ‘박정희’ 항목을 검색해 일별하면서 “한 사회가 어떤 역사를 쓰느냐, 어떤 역사를 쓰지 않느냐 하는 것보다 더 그 사회의 성격을 뜻깊게 암시하는 것은 없다.”는 E. H. 카의 일갈을 곰곰 생각해 본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