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은 태생적으로 보수정당
더불어민주당이 좀더 좌파이길, 진보적이길 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김종인 현 대표의 카리스마 지도력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동시에 더민주의 스탠스가 우측으로 옮겨가는 게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80년대 양김씨로 대표되는 통일민주당, 더 거슬러 올라가 신민당 – 민주국민당 – 한국민주당까지 올라가 보면 더민주의 근본은 언제나, 좌파-진보진영이라기 보단 반독재-민주진영이었습니다. 자유당의 사사오입개헌부터 이어지는 반민주독재세력에 대한 저항으로 결집한 부르주아지 엘리트 기반의 보수정당이었죠.
그러니 더민당이 원래 있어야 할 위치는 사실 지금보다 더 한참 오른쪽이어야 하지요. 워낙 반민주독재세력이 상식이하의 정치퇴행을 보이다보니, 상대적으로 좌파-진보적으로 여겨지고, 또 일부 정책이나 행동들이 좌파-진보적으로 보여지긴 하나,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그냥 상식적인 수준의 중도보수 포지션일뿐입니다.
그런 포지션마저도 좌파로 여겨질 정도로, 원래 가졌어야할 중도보수의 호칭을 새누리라는 괴물이 참칭하고 엉덩이 비비적거리고 있으니 자꾸 왼쪽으로 밀려난 것뿐입니다. 몸에 안맞는 좌파-진보 딱지가 붙여진 채 새누리와 스파링하려니 민주계열로서는 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헛주먹만 휘두르고 있었던 이유인거죠.
우리가 보수와 보수의 선거만 봐야 하는 이유: 소선거구제
이것은 한국 정치시스템 – 지역중심 소선거구제가 낳은 구조적 비극입니다.
안철수나 허경영같은 팬클럽 정당, 자민련이나 천정배의 국민회의 같은 지역기반 정당, 사회당이나 노동당 같은 이념중심정당, 녹색당이나 청년당처럼 한가지 문제에 집중하는 원포인트 정당, 정의당 같은 그나마 존재감(?)있는 대안정당까지, 모두 다 존재의 의의가 있고 지지자들에게는 가치있는 정치집단이겠으나… 안타깝게도 현 양당구조에서는 제3당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지역중심 소선거구제에서 다양한 이념을 가지는 다당구도는 불가능합니다. 1등과 1등을 노리는 2등 외의 나머지는 모두 떨거지가 됩니다. 뻔히 사표가 될 것을 알면서 소신투표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나 늘 반민주집단의 독재 위험을 느껴야하는 위기상황에서는요.
참.. 끈질기게도 이 위기는 끝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비판적 지지라는 이름으로 기호 2번을 찍어야 하죠.
이건 반대로 새누리 지지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누리 지지자라고 모두 정신이상이라거나 묻지마 투표를 하는 건 아닙니다. 새누리가 아무리 글러먹었다고 생각해도, 도저히 저 빨갱이(!!)들한테 정권을 넘기는 꼴은 못보겠다고 생각하는 이상, 1번외의 다른 선택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선택을 안하는게 아니라, 선택지가 있음에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인거죠. 아무리 이쪽이 마음에 안들어도 이쪽에 이익이 안되면 바로 저쪽의 이익이 되버리는 구조에서는 제3의 선택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이 모든 세력은 양 극단으로 뭉쳐야 하기에, 서로 지향점과 가치관이 다른 세력들이 단지 반대편을 막는다는 목적만으로 모이다보니 당연히 잡음도 나고 스탠스도 꼬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누구에게 더민주는 너무나 수구적으로 여겨지고, 누구에게는 급진적으로 여겨지고, 여하튼 당연히 누구의 맘에도 흡족치 않은 포지션이 되는거죠. 여러 세력을 다 아우르려다보면 누구의 말도 제대로 들어줄 수 없는 둔중한 공룡이 되는 겁니다.
지역중심소선거구제의 필연적 결말인 이러한 양당체제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다만 그 염증을 느끼는 쪽들이 모두 이쪽이라서 문제죠. 권력이라는 단 하나의 반동적 가치만을 목표로 뭉칠 수 있는 새누리진영은 참 편한 게임을 하는 셈입니다.
사표를 막는 유일한 방법: 선거제도 개혁
도저히 이 잡탕 범야권 체제로는 새누리세력을 몰아내기는 커녕 내 목소리 한번 제대로 내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양당구도를 깨겠다고 나서는 정치집단들이 있습니다. 이러면 보통 2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 만만한 민주당 줘패서 ‘내가 민주당을 대신해서 새누리를 물리치겠소’라는 비전을 내세우거나,
- 혹은 ‘언제까지 볼모정치를 할텐가, 우리도 찍소리 낼 수 있다능’ 이라며 ‘일단 5석이라도!!’ 라는 식으로 각자도생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는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거 그냥 망하는 길입니다.
민주당대안을 표방하며 나타났던 문국현이나 안철수의 사례라든가, 미력하게나마 꾸준히 원내진출을 성공했던 민노-통진-정의당 계열이 스스로의 역량에 비해 더이상 활동의 확장이 어려운 상황을 보면 잘 알 수 있죠.
운좋게도 제3당으로써 어느 정도 나름 지분을 확보했었던 자민련, 민노당 등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봄눈 녹듯이 사그라드는 운명인 것은 승자독식의 지역중심소선거구제의 당연한 결말입니다.
그러기에, 양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들이 가장 먼저 쟁취해야할 정치목표는 ‘노원 양보할게, 울산 줘’ 같은 식의 당장의 의석수 1석도 아니고, ‘떨어져도 좋으니 세상의 중심에서 주장을 외치겠어’ 같은 비장의 미학을 선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선거제도 개편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비례대표 중심의 중대선거구제로 개편이 이루어져야 세분화된 각자의 이해를 대변해줄 수 있는 다른 정당들도 원내진출 가능성이 생기게 되고, 일회성 반짝 당선으로 끝나지 않을 지속가능한 정치세력화가 가능해집니다.
지지자들 입장에서도 비판적 지지 같은 거 안해도 됩니다. 거대양당이 왜 좀더 이런 정책에 적극적이지 않냐고 욕할 필요 없이, 내 이해를 대변해주는 제3의 정당에 투표하더라도 충분히 내 표가 사표가 되지 않고 반대세력의 집권에 기여하지않아도 된다는 거죠.
범야권, 공동의 목표로 ‘선거제 개편’을 내세워야 하는 이유
물론 이번 선거제 개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양당이 자발적으로 선거제를 개편할 리는 중이 제 머리 미는 일이나 다름없고. 일단 새누리 쪽에서는 콧방귀도 안뀌겠죠. 대신 지금의 더민주라면, 요즘같은 아슬아슬한 판세에 몸달아하는 입장이니만큼, 선거제도개편을 총선연대의 담보물로 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범야권이 힘을 모아 새누리를 쪼그라트리고, 그 기세로 비례중심의 중대선거구제를 더민주로부터 받아내는 정치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념이 서로 다른 야권 세력들이 단 한가지 동의하여 공동의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선거제도의 개편뿐이겠지요.
한국 정치지형을 정상으로 돌리려면, 반민주독재세력은 저쪽 우측 끝에 적당히 데꿀멍하게 만들고, 더민주를 원래 자기 포지션인 중도보수로 제자리 찾아가게 하면, 그러면 드디어 진짜 진보-좌파진영에도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이 생기게 됩니다.
이를테면 진보정당들이 가장 성공했던 때는 민주계열 세력이 가장 힘을 발휘할 때였어요. 반대로 민주계열이 위축되어 좌측으로 밀리게 되면 진보정당들은 망하는 겁니다. 진보정당 지지자들은 수구반동세력 집권을 막기 위해서 자기들의 후보를 버리고 민주당계열에 비판적지지를 던지거나 아니면 그 와중에 독자세력화하겠다고 발버둥치다가 짜부라지는 꼴을 분통터트리며 지켜봐와야 했죠.
호남에서 영패주의운운하며 빚청산하라는데, 사실 따지고보면 진보정당 지지자들이 울며겨자먹기로 자기후보 버리고 민주당 후보 지지해야했던 빚청산은 어떻게 할건가요.
더불어민주당이 우측으로 가야 하는 이유
더민주가 진보적 의제를 선점하지 않아도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필리버스터 국면에서도 봐왔듯이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새누리는 오른쪽 끝으로 밀어버리고, 이른바 상식이 통하는 보수정당으로 민주당이 그 포지션을 차지했으면 하는 것이고, 그래야 뭔가 진보의제에 대한 카운터파트너로 대화가 통하는 정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요.
그렇다고 더민주가 무슨 대단한 최선의 집단이라는 게 아니에요. 더민주는 그냥 새누리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은 정도의 보수정당일 뿐이죠. 새누리당보다 아주 조금 도덕적으로 정당한 척 하고, 아주 조금 정책적으로 합리적인 척 하며 아주 조금 더 인간적으로 괜찮은 척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정당일 뿐입니다. 세상에, ‘척’하는거라도 어디에요. 아예 철판깔고 욕망을 그대로 노출하는 집단도 있는 마당인데.
그러니 제발, 그놈의 비판적지지좀 그만할 수 있게 비례중심의 중대선거구제의 개편이라는 고양이목의 방울을 이제는 달아야 할 때입니다. 만약 더민주가 이번 총선의 승리를 위해 범야연대를 필요로 한다면, 그건 단지 새누리의 개헌의석수 저지를 목표로만이 아니라, 양당체제 하의 강성대결구도를 벌이지 않고 다양한 세력의 정치참여가 가능한 선거제도 개편을 범야연대의 조건으로 얻어내야 합니다.
아니면 제3 정치세력화라는 건 결국 지금의 안철수씨의 아이돌팬클럽 놀이를 넘어설 수 없을테니까요.
#판사님, 이 글은 지나가던 방울달린 고양이가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