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컬 <위키드>의 초중반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긴 한데, 어차피 ‘오즈의 마법사’의 줄거리를 따라가는 작품이라 이걸 스포일러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스포일러라기보단 (이야기의 호흡이 빠를 수밖에 없는) 뮤지컬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배경 지식 정도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민감하신 분은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키드(Wicked)
위키드는 동화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뮤지컬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즈의 마법사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니까. 이 뮤지컬은 오즈의 마법사의 ‘사악한 서쪽 마녀’를 주인공으로, 그가 왜 그런 악명을 얻게 되었으며,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었는지를 이야기한다. 뮤지컬의 원작이 되는 소설 <위키드>의 캐치프레이즈는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적을 악으로 만드는가”다.
그렇다, 죽음이다. 뮤지컬의 첫 넘버 “No One Mourns the Wicked”는 대중이 사악한 서쪽 마녀의 죽음을 축하하며 부르는 노래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초록색 피부의 사악한 서쪽 마녀는 도로시의 수공(은 훼이크고 그냥 물 끼얹기)에 의해 죽는다.
영화의 주요 스토리는 영화 <오즈의 마법사>(1939)를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 폭풍을 만나 말하는 동물들과 마법사가 있는 환상의 나라 오즈에 떨어진 도로시는 착한 마녀 글린다의 도움으로 사악한 마녀를 쓰러뜨리고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만난다. 그러나 오즈는 사실 마법사가 아니라 각종 도구로 마법을 가장한 보통 사람일 뿐이었다… 는 내용이다.
하지만 위키드는 이 동화를 비틀어 해석한다. 마법적 능력이 없는 오즈는 통치를 위해 말하는 동물들을 차별하고 그들의 권리를 박탈한다. 동물들은 점차 말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이등 시민으로 전락한다. 초록색 피부 때문에 따돌림당하던 소녀 ‘엘파바’는 그 마법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오즈가 사는 수도 에메랄드 시티로 떠나고, 모든 것이 초록색으로 보이는 이 도시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소외감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오즈는 사실 그의 마법을 동물 차별에 악용하려 했던 것이었고, 엘파바는 그에게 거역하여 도주한다. 이에 오즈는 엘파바를 ‘사악한 서쪽 마녀’로 선전하여 대중이 그를 적대하게 만든다.
나를 찾고 싶거든 서쪽 하늘을 봐
일전에 누군가 내게 말하더군
누구나 한번은 날아볼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지금 내가 홀로 날고 있을지언정
적어도 자유롭게 날고 있잖아
날 붙잡으려는 자들에게 내 말을 전해줘
내가 어떻게 중력을 이겨냈는지
그는 이렇게 ‘오즈의 마법사’ 세계관 속의 사악한 서쪽 마녀가 된다. 뮤지컬의 메인 넘버 ‘Defying Gravity’는 바로 그 순간 그가 부르는 노래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특징 때문에 따돌림받던 소녀가 끝내 소속감을 느낄 곳을 발견했지만, 거기 머무르기 위해서는 또 다른 약자를 핍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곳에서 도망쳐 영영 주류에 속할 수 없는 외톨이가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적을 어떻게 악으로 만드는가
이 이야기가 빗대는 바는 너무나도 명백해서 논쟁의 여지가 없을 정도다. 엘파바는 소수자를 상징한다. 그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특징’ 때문에 차별받는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현실 속 유색인종 또는 성 소수자다.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주류 사회에 낄 수는 있지만 완전히 거기에 녹아들 수는 없다. 소수자인 그가 주류 사회에 편입되는 길은 오직 또 다른 소수자, 자신보다도 더 약한 다른 소수자를 핍박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인종과 성소수자 문제에 대한 은유로 가득 차 있다.
오즈의 프로파간다로 사람들은 그를 ‘사악한 서쪽 마녀’로 매도하고 공격한다. 이 평범한 소녀가 대중의 적이 된 것은, 물론 프로파간다에 힘입은 바 크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소녀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지성을 갖춘 말하는 동물들을 쉽게 적대하고 핍박했듯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선량한 보통 사람들과 명백히 구분할 수 있는 잣대가 있었기에 손쉽게 적이자 악인으로 규정된 것이다. 단지 초록색 피부 때문에 마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너무 극단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인종 문제, 성소수자 문제에서, 현실 또한 그렇게 극단적이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했던가. 엘파바가 ‘중력을 벗어나(Defying Gravity)’ 가장 빛났던 순간은, 사실 언젠가 추락할 수밖에 없는 그의 운명을 암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모두 <오즈의 마법사>에서 서쪽 마녀가 맞을 운명을 알고 있지 않은가.
유명 뮤지컬 배우 ‘이디나 멘젤’의 ‘Defying Gravity’
현실은 더욱 잔혹해서, 엘파바가 외치는 “누구나 날아볼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말조차 사치처럼 느껴진다. 사회의 소수자들에겐 아무 힘도 없으며 그래서 날아볼 기회조차 없다.
그렇다고 사회의 적의가 덜한 것도 아니다. 차별받고 따돌림당하며 직접적인 폭력에 시달리던 그들은, 엘파바가 그랬듯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회를 파멸시킬 악마로 선전되고 적으로 규정된다. 다른 소수자를 겁박함으로써 주류에 끼는 척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비상이 아니라 양심을 짓누르는 가장 무거운 중력일 뿐이다.
참으로 잔혹한 동화가 아닌가. 그리고 참으로, 현실은 그보다도 잔혹하지 않은가.
원문: 예인의 새벽 내리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