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
누군가는 종북에 좌빨이고, 또 누군가는 수구에 꼴통이다. 젊은이들은 철이 없고 늙은이들은 꼰대다. 흙수저와 금수저로 대표되는 경제적 양극화만이 문제가 아니다. 일베 등으로 대표되는 이념적 양극화 역시 우리 곁에 가까이 와 있다.
많은 글은,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그를 저격하며 자신의 논리적인 우월함을 증명하려 한다. 프리미엄 조선의 연재만화 <조이라이드>는 대표적이다. 이 만화는 십중팔구 상대를 무식한 종북주의자들로 상정한 뒤 이를 논박하는 식의 이야기구조를 띈다.
그러나 세계는 복잡하고, 실질적으로 어떤 문제는 다양한 가치가 복합적으로 갈등하는 법이다. 페이스북 페이지 ‘쌤스토리의 특수교육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영상을 보았기에 소개한다. 미국 드라마 ‘굿 와이프’에서, 주인공의 조력자이자 자유주의자 여성 변호사인 다이앤 록하트가 동성 결혼을 주제로 한 모의법정에서 논쟁하는 장면을 편집한 것이다.
이슈: 동성 결혼에의 서비스 제공
첫 장면은, 동성 커플에게 웨딩 케이크를 만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빵집 가게 이야기다. 이에 대해 다이앤 록하트는 “서비스 제공자에겐 서비스를 거부할 권리가 있지만, 인종, 종교, 성적 지향 등에 의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설명한다.
동성간의 결합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이것을 실제 제도로 적용했을 때 생기는 문제다. 동성결혼을 인정하고 차별금지를 법적으로 명문화한다면, 이미 미국에서 일어난 바와 같이 웨딩 케이크 제작을 거부했다가 고소당하는 일이 얼마든지 한국에서도 생길 수 있다.
여기가 바로 종교의 자유와, 성적 지향에 따라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극단적으로 나아가, 기독교인들은 나아가 차별금지가 명문화된다면 교회에서 교리에 의거해 동성애를 비난할 수도 없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두 번째 모의법정은, 동성 커플의 웨딩 플래너 의뢰를 거절해 고소당한 경우다. 웨딩 플래너는 “시간도 많이 들이고, 창조적이어야 하며,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웨딩 케이크를 만들어주는 것보다, 동성 결혼이라는 행위 자체에 훨씬 더 깊숙이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웨딩 플래너는 다만 의뢰를 받았을 뿐이며, 본인의 종교적 자유를 침해당한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드라마에서 다이앤 록하트는 기독교인들이 흔히 저지르는 오류, 성경에서 규정하는 다른 죄악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유독 동성애에 대해서만 종교적 신념을 내세워 강경하게 반대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겨냥한다. 또한 동성 커플이 웨딩 플래너에게 거절당함으로써 받은 정신적, 경제적 손해에 대해 언급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입은 경제적 손해가 그리 크지 않다면 어떨까? 웨딩 플래너가 이혼자에게도 웨딩 플랜을 짜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강경한 원리론자이며 성경무오론자라면 어떨까?
사이다보다 고구마를
때때로 우리는 동성애에 반대하며 부채춤을 추는 사람들을 만난다. 동성애를 다룬 드라마를 보고 내 아들이 동성애에 빠지고 에이즈에 걸릴 거라는 선동을 본다. 이런 퍼포먼스에 사람들은 조롱을 던진다. 동성애는 애당초 선택의 문제도 아니며, 누구와 함께 인생을 보낼 것인지는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인권이다. 쉽고 단순한 얘기다. 이런 시원한 일갈을 일컬어 사람들은 그 청량감을 본따 사이다라고 부른다.
하지만 실제로 그 당연해보이는 가치가 실현되기까지는 많은 난관에 부딪힌다. 동성애를 죄라고 배운 기독교인이 동성 커플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나아가 축하 문구를 새긴 웨딩 케이크를 만들어주거나 웨딩 플래너로서 일하는 것 같은 문제들 말이다. 이는 동성 커플을 대리하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일 뿐이며 서비스 제공자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침해하진 않는 것이다 – 라고 얘기하면 말은 되겠지만, 뒷맛이 씁쓸하다. 정말 그렇게 무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논리를 계속 확장해나가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 설령 그것이 나의 가치와 상충하더라도, 역지사지의 자세에서 사안을 검토해보는 게 필요하다. 동성 결혼 정도면 그래도 사안의 시비가 비교적 분명한 문제인데도, 이렇게 서로 다른 가치들이 충돌한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라는 문제가 말이다. 답답한 일이다. 어려운 일이다. 퍽퍽한 고구마만 씹어먹는 것처럼 말이다.
그 답답함이 싫어서, 우리는 고구마도 먹기 전에 너무 사이다만 찾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반대 진영의 가장 극단적인 목소리를 모아 비웃고 조롱하며 우리편끼리 시원해하는 것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소수든, 다수든, 혹 팽팽한 절반이든, 우리편끼리만 살 수는 없는 법인데. 영양학적으로도 고구마가 사이다보다 나은데. 아, 이건 아닌가.
원문: 예인의 새벽 내리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