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문 기사를 보니 US News & World Report 라는 해외 언론사에서 “최고의 나라들(Best Countries)”이라는 거창한 순위를 발표했는데, 우리나라가 65개국 중에 19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더군요. 원래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불행해지기 마련이지만,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인은 어려서부터 순위에 목을 매고 살아서 그런지 그런 순위 경쟁에 솔깃해 합니다.
65개국 중 19위라는 것이 과연 기뻐해야 할 순위인지 아닌지, 또 대체 이 느닷없는 ‘최고의 나라 순위’라는 것은 대체 어떤 근거로 어떻게 뽑은 것인지 국내 뉴스에는 별다른 설명이 없길래, 한번 구글링을 해서 원문 기사를 봤습니다. 재미있더군요. 그래서 여기에 그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순위 자체는 의미가 없다, 항목을 보자
저는 ‘최고의 나라’라는 순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가령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의 나라 둘을 뽑으라면 요즘은 다들 미국과 중국을 뽑습니다만, 그렇다고 대부분의 미국인과 중국인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우리반 평균 성적이 아무리 높아도, 내 성적이 전교 바닥을 긁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듯이, 우리나라가 65개국 중 19위를 했다고 그것이 내 삶에 무슨 영향을 준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더 바람직한 사회를 이룬 나라에 대해 배우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입니다. 혹자는 ‘우리나라 정도면 세계에서 아주 잘 사는 나라에 속한다, 헬조선이니 뭐니 하며 선동질 하는 인간들은 북한으로 가라’ 라고 비난하지만, 저는 그것이야 말로 북한 지도자나 지껄일 헛소리라고 봅니다. 발전하는 사회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고민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 그 중 배울 점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 본문을 읽어보니, 의미가 있는 순위 항목도 있다고 생각되어, 여기에 소개합니다. 바로 ‘시민 의식’과 ‘삶의 질’입니다. 아무리 제가 돈 많고 교양있고 건강하다고 해도,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주변 사람들이 예의없고 가난하고 흉악하면 행복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또 공기 오염이 극심한 베이징 시내에 사는 돈 많은 중국인 의사가 뉴질랜드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는 뉴질랜드 농부보다 더 행복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시민 의식’과 ‘삶의 질’은 국민 개개인에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런 항목들은 어떤 것을 평가해서 채점되는지 보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조사 기관에서는 어떤 점이 ‘시민 의식’과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으니까요.
우리나라는 기업 정신과 역동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고, 사업하기 좋은 환경 및 국력 측면에서도 괜찮은 점수를 받았습니다만, 풍경이 볼만한가, 사람들은 친절한가, 날씨는 좋은가, 사람들이 섹시하냐 등을 평가하는 adventure 항목에서는 바닥권 점수를 받았습니다. 특히 Sexy 항목에서는 자존심 상하게도 빵점!
먼저, 전체 나라를 다 보는 것은 너무 번잡스러워 그냥 제가 우리나라와 비교할 만하거나 본받을 목표로 삼을 만한 나라 몇 개국만 뽑았습니다. 당연히 일본은 들어갑니다. 그리고 네덜란드와 스페인, 아일랜드와 칠레를 뽑았습니다. 덴마크나 노르웨이 같은 나라들은 너무 선진국인 데다 석유까지 나는 부자 나라인지라, 우리나라와는 비교되지 않아서 아예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말레이시아나 과테말라 같은 나라들은 본받을 대상도 아닌 듯 하므로 뽑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렇게 뽑다보면 너무 유럽 국가만 뽑게 되므로, 저는 개인적으로 방문해 본 적 있는 칠레를 뽑았습니다. 칠레는 남미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우리나라와 비슷한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남미 국가 중에서는 가장 부존 자원도 없고 가장 산업화된 나라이며, 우리나라처럼 긴 군부독재에 시달린 경험이 있고, 또 남미스럽지 않게 우리나라처럼 부지런하고 장시간 노동을 하는 나라입니다.
먼저 이 국가의 구매력 기준 1인당 GDP (GDP per capita, PPP)와 이 연구에서 채점한 “최고의 나라” 순위를 보시지요.
일단, 우리나라의 구매력 기준 1인당 GDP가 의외로 높아서 일본과 별 차이가 나지도 않고 또 스페인은 이미 제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건 제가 일부러 구매력 기준 1인당 GDP를 끌어 쓴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보는 대부분의 해외 자료에서 국가의 경제 수준을 말할 때는 주로 구매력 기준 1인당 GDP를 사용하며, 이 발표 자료에서도 구매력 기준 1인당 GDP를 주요 지표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스위스 사람들의 소득 수준이 높아도, 버거킹에서 와퍼 세트 하나에 1만8천원을 내야 한다면 빡빡한 것은 마찬가지이니까요. 또 반대로, 한국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보다 반드시 생활 수준이 더 뛰어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매력 기준 1인당 GDP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그만큼 더 잘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스페인에 태어나고 싶으세요, 한국에 태어나고 싶으세요? 저는 솔직히 선택권이 있다면 스페인에 태어나고 싶습니다. 스페인에 가보지 않았고 또 최근 스페인 경제가 어려워 실업률이 장난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래도 그쪽 삶의 질이 더 높을 것 같거든요. 이 발표 자료를 보니 정말 그렇더군요.
일단 스페인은 전체적인 국가 순위에서도 한국을 앞지를 뿐만 아니라, 시민의식 순위와 삶의 질 순위에서도 한국을 여유 있게 앞섭니다. 스페인이 더 낮은 GDP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더 높은 순위를 얻은 것은 이 전체 순위란 문화적 영향력, 기업 정신, 역사 문화적 유산, 인구와 군사 경제력 등에 의한 국력, 심지어 그 나라에 뭐 볼만한 관광 명소와 풍경이 있는지까지도 평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조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딩 홍보 조사 기관인 WPP 그룹 소속의 브랜드 전략 회사인 BAV Consulting에서 이런저런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전세계 약 1만6천 명에게 설문 조사를 벌인 결과입니다. 이 1만6천 명은 전세계에 걸쳐 분포된 사람들이고, 이들 중 절반인 8천 명 정도는 회사나 기관의 중역급 또는 지식인 엘리트 계층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냥 일반 대중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 각각에게는 이 전체 65개국 중 일부 국가들에 대한 평가를 설문지로 받았는데, 만약 설문 조사 대상인 사람이 해당 국가에 대해 경험이 없다면 그 국가들은 채점 결과에서 제외했습니다.
나름 과학적인 방법으로 조사하고 채점했던데, 어떤 분은 ‘전문가도 아닌 일반인들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가 무슨 의미가 있냐’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미가 있습니다. 원래 세상에서 스페인이나 한국이 가지는 이미지는 일부 석학들이나 전문가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반인들이 가지는 이미지니까요.
잡설이 길었는데, 시민의식이라는 항목에서 평가되는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재산권 존중
- 진보성
- 신뢰성
- 양성평등
- 정치권력 분배
- 환경 배려
- 인권 배려
- 종교적 자유
그리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서 진보성이라고 할 때는 보수냐 진보냐 할 때의 그 진보가 아니라, 뭔가 향후 발전 가능성과 그를 위한 노력이라고 보시는 것이 맞겠지요.
우리나라는 진보성(progressive) 측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항목에서 유럽 국가들보다 크게 낮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특히 종교적 자유가 낮게 나온 것이 의외인데, 아마 외국인들 눈에는 기독교와 불교 외에 다른 종교를 찾아보기 힘든 우리 사회가 종교적 관용과 다양성이 별로 없다고 비추어진 모양입니다. 아니면 아직 면면히 살아 있는 유교적 관습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모르겠군요.
특히 양성평등에 있어서는 칠레보다도 낮은 꼴찌를 기록했는데, 저는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고 봅니다. 뉴스에 종종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성희롱, 성추행 사건 그 자체보다는, 그에 대해 법원에서 어떤 판결이 내려지는지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가부장적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느낌이 많이 들거든요.
다른 것을 떠나서, 여러분들의 일터에서 남성과 여성의 비율을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보통 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이 공부를 훨씬 잘하던데, 왜 대기업 사무실에서 여성 비율이 20%가 넘는 경우를 보기 어려울까요? 일본은 전반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높은 평점을 받았는데, 일본도 양성평등에서는 우리나라와 오십보백보 후진성을 면치 못하네요.
제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삶의 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항목들이 평가되었습니다.
- 경제적 안정성
- 일자리
- 물가
- 안전
- 정치적 안정성
- 가족 중심적
- 공공 교육 제도
- 공공 의료 제도
- 소득 불균형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경제적 안정성과 일자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항목에서 역시 비교 대상 중에서는 바닥권의 점수를 받았습니다. 특히 가족 중심적 항목과 소득 불균형 항목, 그리고 물가 항목에서는 칠레와 더불어 꼴찌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점수에서도 수준 이하의 점수를 받았고요. 공공 교육 제도와 공공 의료 제도는 이 비교 그룹 중에서는 낮은 편에 속했습니다만 그래도 점수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체감 온도와도 대략 일치합니다.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점을 어떤 방향으로 더 개선해야 하는지 대략 그림이 보이시는지요?
원문: Nasica의 뜻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