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권상정 vs. 필리버스터
23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테러방지법을 국회에 직권상정하자, 더불어민주당이 즉각 필리버스터에 돌입하며 맞섰다. 수십 년 만에 연출된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의 필리버스터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첫 타자로 나선 민주당 김광진 의원은 5시간을 넘는 시간 동안 테러방지법의 무용성과 위험성 등에 대해 반대토론을 벌였다. 그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며 네이버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1위에 “김광진 힘내라”, 2위에 “김광진”, 3위에 “필리버스터”가 오르기도 했다.
필리버스터란 무엇인가
필리버스터란 합법적으로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국회선진화법에 의해 ‘무제한 토론’이란 이름으로 도입되었는데, 그 내용과 절차는 다음과 같다.
- 재적의원 1/3 이상이 서명한 무제한 토론 요구서를 의장에게 제출한다.
- 의원 1인당 1회에 한해 무제한 토론을 시작한다. 일단 무제한 토론이 시작되면, 의원들이 죄다 의사당을 떠날지라도 무제한 토론이 이어지고 있는 이상 본회의도 끝나지 않는다.
- 재적의원 1/3 이상이 서명하여 무제한 토론을 끝낼 것을 제안할 수 있지만, 3/5 이상이 찬성해야만 종결할 수 있다.
즉 한국 국회법상 필리버스터란, 안건이 표결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말 그대로 시간에 제한이 없는 무제한 토론을 벌여 의사 진행을 고의로 지연시키는 것이다. 이는 몇날 며칠이든 계속 이어갈 수 있으며, 무제한 토론이 이뤄지는 동안 안건 표결은 이뤄질 수 없다.
국회법에 따라 재적의원 1/3 이상을 확보한 더불어민주당은 즉각 필리버스터를 개시했다. 새누리당은 다수당이면서도 이를 막을 수 없는데, 필리버스터를 강제로 종결시키려면 무려 재적의원의 3/5 이상을 확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새누리당은 퇴장하여 피켓을 들고 더불어민주당의 필리버스터를 규탄했다.
테러방지법, 무엇이 문제인가
필리버스터는 말하자면 소수당이 쓸 수 있는 최후의 필살기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더민주는 왜 필리버스터에 돌입하면서까지 테러방지법을 막으려 했을까. 테러를 막을 수 있는 법이라니, 안보를 위해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민변, 참여연대 등이 참여한 “테러방지법안에 대한 긴급의견서”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테러방지법안에 다수의 인권침해적 독소조항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철우 의원 발의 ‘테러방지법안(국회의장 직권상정안)’에 대한 긴급의견서, 진보네트워크센터
무소불위 국정원에 다시 무소불위의 권한을
이를 요약하자면, 테러방지법안이 정의하는 ‘테러위험인물’의 개념이 과도하게 모호하여 구체적이지 않은 반면, 그에 대한 정보수집 권한은 지나치게 광범위하여 프라이버시 침해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법안에 따르면 국가정보원장이 영장이나 기타 절차 없이 개인정보나 위치정보 등을 요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또한 부칙에 따라 국정원이 금융정보를 조사할 수 있게끔 하고, 본래 국가안전보장에 상당한 위험이 있을 경우에만 가능한 감청을 대테러활동에 필요한 경우 허용할 수 있게 했다. 국정원에 개인정보에 대한 무소불위의 권한이 주어지는데 이를 통제하거나 견제할 수 있는 장치는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
심지어 법안에 따르면 조직, 정원, 운영에 대한 사안을 죄다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하고 있고, 그 인적사항을 공개하지 않을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위원들도 대통령령에 따라 정하도록 되어 있는 등, 법률은 허수아비고 실권은 대통령 맘대로 휘두를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국정원은 이미 지난 대선 등에 깊이 개입해 특정 후보를 비방하는 등의 댓글을 다는 등 정치적 중립 의무를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원칙을 주장하는 박근혜가 국정원 개혁을 위해 요구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국정원이 알아서 개혁할 것이라는 셀프 개혁안이 전부였고, 사실상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두 가지 문제다. 국정원의 권한이 무소불위로 커진다는 것, 그 국정원이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조직이라는 것. 정의화 국회의장은 직권상정 직전 국정원장과 면담을 갖고 “국정원이 스스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후속 조치를 완전하게 시행할 것을 요구했고 국정원장으로부터 확고한 약속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몇 번을 들은 거짓말인지 모른다. 그간 물의를 일으켰을 때마다 나온 국정원의 소위 ‘셀프 개혁’ 안은 단 한 번도 실제로 이뤄진 적이 없었다.
독소조항은, 그냥 독소다
이런 독소조항에 대한 우려는 결코 기우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국가보안법이다. 반국가단체를 찬양하거나 선전한 자를 처벌한다는 그럴듯한 목적을 갖고 있지만, 그 찬양 고무의 기준이 모호하기 그지없어 오랫동안 정권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활용되어왔다. 술 먹고 나라 욕하면 잡혀들어간다며 막걸리 보안법이라 불리던 그 오명은 심지어 2012년 박정근 사건으로 아직 현재진행형임을 다시금 증명했다.
박정근 씨는 트위터에서 ‘우리민족끼리’ 트윗을 리트윗하며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조의의 뜻으로 보내겠다” “김정일 카섹스” “김정일가슴만지고싶다” 등의 조롱성 글을 함께 올렸다. 어이없게도 그는 이 리트윗 행위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며 구속되었고, 심지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기까지 했다. (다만 최종적으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과거의 국가보안법이 막걸리 보안법이었다면, 오늘날의 국가보안법은 말하자면 카섹스 보안법인 셈이다.
이는 테러방지법안이 담고 있는 독소조항에 대한 세간의 우려가 결코 기우가 아님을 증명한다. 정부는 독소조항을 언제든지 자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박정근 사건이 먼 과거도 아니고 바로 삼사 년 전 일이다. 게다가 박근혜가 국정원의 정치 개입에 대해 셀프 개혁을 주문했을 뿐 사실상 손을 놓아버렸었음을 생각하면, 그가 독소조항을 독소로 활용하지 않을 거라고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있는 제도도 버려두고 대테러 주장
박근혜는 우리나라가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기본적인 법체계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이슬람국가(IS)도 알아버렸다고 주장하며 테러방지법안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일차원적인 인식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테러방지법안이 있다고 해서 테러집단의 타겟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이미 한국에도 다양한 테러 대응 제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김광진 의원이 필리버스터에서 여러 차례 지적한 것처럼 이미 88년 대테러활동지침이 제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국가테러대책회의 등의 조직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행정부는 이런 제도가 있음을 잊어버린 것 같다. 김광진 의원은 반기 1회 정기적으로 열려야 할 국가테러대책회의가 2015년간 한 번도 열리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김광진 의원이 국가테러대책회의의 의장이 누구인지 물었는데 바로 그 의장인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답하지 못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있는 제도도 전혀 활용하지 않고 있는 모양새다.
엉터리 직권상정
정의화 국회의장은 ‘법률자문과 검토 결과 북한 도발 상태를 볼 때 국민 안위와 국가 질서가 심각한 위협에 이르렀다는 판단을 했다”며, 지금을 국가비상사태로 규정하고 직권상정을 감행했다.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국회의장이 법안을 직권상정하려면 천재지변, 국가비상사태, 원내교섭단체 대표 합의 등 엄격한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처럼 자의적으로 국가비상사태를 규정할 수 있다면 사실상 1년 365일 언제든지 국가비상사태를 규정하고 직권상정을 할 수 있다. 북한의 도발은 사실상 상수인데다, 굳이 북한이 아니더라도 외국에서 일어난 테러 사태 등 갖가지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국회선진화법이 국가비상사태를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사태로 규정하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매우 잘못된 것이다. 지금이 어딜 봐서 전시, 사변에 준하는 상황인가? 만일 그렇다면 당장 계엄령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란 것인데 정말 그러한가? 박근혜는 지금 계엄이라도 선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심지어 새누리당 지도부와 박근혜는 경제 여건이 쉽지 않다는 이유로 이를 비상사태로 규정하고 원샷법 직권상정을 요구하는 해괴한 짓을 벌이기도 했다. 경제성장률이 떨어지면 계엄이라도 섬포할 기세다. 심심하면 법과 원칙을 들먹이는 박근혜가 얼마나 법을 무시하는지 잘 보여주는 일면이다. 이때만 해도 정의화 의장은 국가비상사태의 요건을 엄격히 해석하여 이를 거부했는데, 이번엔 끝내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국가비상사태를 규정하며 법치를 무너뜨린 셈이다.
필리버스터는 시간 끌기일 뿐이다
이번 필리버스터가 역사에 한 획을 긋긴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필리버스터도 시간을 끌고 여론을 환기할 수 있을 뿐 실제로 테러방지법안을 막을 힘은 없다는 것이다. 필리버스터는 회기가 종료되면 자동으로 종료된다. 한 번 필리버스터가 종료되면 다시 필리버스터를 제안할 수 없으며, 바로 법안 표결이 가능해진다. 이번 회기가 종료되는 3월 10일까지 필리버스터를 이어간다 해도, 그 이후엔 막을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렇게까지 장기간 필리버스터가 이어지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건 말 그대로 최후의 필살기다.
필리버스터는 합법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의사진행을 마비시키며, 선거법 등 다른 법안의 처리까지 전부 봉쇄하는 극단적인 필살기다. 만일 현재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정상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면야 독소조항을 삭제하는 등의 합의를 기대해 볼 수 있겠지만, 박근혜가 대화하고 타협하는 모습이라니 나는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는다. 실제로 새누리당은 독소조항을 빼면 합의가 가능하다는 야권의 태도에 콧방귀만 뀌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야당에 발목잡기라 책임을 돌리고 양비론으로 나가면 새누리당에 정치적으로 불리할 게 없다. 테러방지법안이라니 이름은 좋아 보인다. 맥락을 제대로 짚을 언론이 얼마 없다. 특히 KBS, MBC 등 공영방송이 망가지고 종편의 저질 유사 시사프로그램이 방송을 점령한 상황이라 공론장의 품격이 더욱 끔찍하게 낮아졌다.
결국 필리버스터를 이어가는 동안 테러방지법안이 왜 문제인지, 이번 직권상정안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환기하는 게 중요하다 하겠다. 테러를 방지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데 반대할 목소리는 많지 않다. 여권은 이런 직관적인, 그러나 일차원적인 주장 속에 독소조항을 숨기고 있다. 이 독소에 대해 알리고 설득하는 과정이 시급히 필요하다. 심심하면 국가비상사태를 걸고 넘어지며 법안 처리를 재촉하고 야당에 책임을 돌리려 하는 이 무책임한 행정부를 향해 뚜렷한 반대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 우리 세대 최초의 필리버스터를 통해 촉발된 관심에 우리 스스로 불을 붙여야 한다.
원문: 새벽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