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무부가 공산주의자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내 손에는 그 205명의 명단이 있습니다.” – 조지프 매카시
“1950년 54년 사이에 일어난, 공산주의 혐의자들에 반대하는 떠들썩한 반대 캠페인으로, 대부분의 경우 공산주의자와 관련이 없었지만, 많은 사람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거나 직업을 잃었다.”
– 옥스퍼드 영어사전 ‘매카시즘’ 항목
1950년 2월 9일, 미국의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은 국무부에 수백 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연설했다. 그래서 이 날은 이른바 ‘매카시즘’이 시작된 날이다. 미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의 전개 과정을 들여다보자.
1950년께는 소련 간첩과, 미국 내 기관에 대한 공산주의의 영향을 두려워하던 시기였다. 민주당의 뉴딜동맹 아래서 노동·여성운동, 소수민족 세력, 공산당 등이 성장하자 보수 세력은 이들 진보세력의 성장을 우려하고 있었다. 대략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말까지를 ‘제2차 적색 공포(Red Scare) 시대’로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매카시의 연설로 촉발된 ‘매카시즘’
1946년 선거에서 처음으로 위스콘신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 1909~1957)는 이 무렵 경력 위조와 상대방에 대한 명예훼손, 로비스트로부터의 금품 수수, 음주 추태 등으로 정치적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상태였다. 그러나 정치 생명이 끝난 것으로 여겨졌던 매카시는 1950년 2월 9일 서부 버지니아 주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 당원 집회에서 ‘205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갖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기사회생했다.
적색 공포에 불을 지른 그의 충격적 폭로로 사건이 부각되면서 상원에서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매카시가 폭로를 계속할 때마다 공산주의자의 숫자도 늘어났고 그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이를 머리기사로 삼은 신문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덕분에 매카시는 대중적인 인지도와 지지를 늘려나가면서 가장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여론의 반응에 고무된 공화당이 공격적으로 가세하자, 민주당은 자신들이 공산주의자와 무관하다는 걸 증명하고자 매카시에 동조하였다. 그리하여 ‘매카시즘(McCarthyism)’이라고 불리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매카시즘이 횡행하는 과정에서 숱한 사람들이 곤욕을 치렀다. 가장 먼저 의심받은 사람은 공무원, 연예 사업자, 교육자, 노동조합 활동가였다.
실직, 투옥, 처벌 …, 그리고 무죄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와 일부 무관한 사람들이 조사를 받기도 했고 혐의가 확정되지 않거나 의심스러운 증거도 확증으로 둔갑했다.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거나 관련되어 있어서 위협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과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고 경력을 망쳤으며, 투옥되기도 했다. 처벌된 사람의 대부분 평결은 나중에 번복되었으며, 위헌적으로 공포된 법과 면직 조처도 나중에 불법으로 결정되거나 소송을 청구할 수 있게 되거나 적법하지 않은 절차로 인정받았다. 또한 이 때문에 기소된 사람들 중 아무도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다.
매카시가 이끄는 비미(非美)활동위원회(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 아래 ‘위원회’)의 공개 청문회에 첫 1년간 소환된 증인은 214명이었던 데 반해 비공개 청문회에는 395명이 소환됐다. 또 공개 청문회 녹취 기록은 5671페이지지만 비공개 청문회 녹취는 8969페이지에 달한다. 이러한 상황은 공산주의자 색출 작업이 얼마나 마구잡이로 이루어졌는지를 웅변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매카시가 지목한 단체나 인사는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게 되면서 매카시는 이후 4년간 미국 정가에서 가장 유력한 인사로 떠올랐다. 매카시가 언급한 ‘국무부 내 공산당원’은 국가기관에서 암약하는 소련 스파이, 공산당 동조자, 그리고 미국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자로까지 대상이 확대되었다.
선동의 귀재, 매카시의 몰락
매카시는 신문이란 매체와 기자들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가를 알았다. 그는 사실을 흥미 있고 모호하게 재구성하여 뉴스거리가 될 만한 사건으로 만들어내는데 타고난 능력을 발휘했다. 뉴스에 굶주린 기자들은 별 볼일 없는 자료를 가지고 엄청난 뉴스를 만들어내는 그의 능력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조작할 사실도 마땅찮고, 기자들에게 줄 사실이 없을 때도, 매카시는 뉴스를 일으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가령, 그는 오후에 기자회견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발표할 목적으로만 오전에 기자회견을 했다. 그가 기자회견을 한다고 발표하면, 기자들은 걸어 들어오게 되어 있다. 이는 마치 종소리에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기자들은 매카시의 호출 소리만 들으면 자동으로 반응하는 개와 같았다.
매카시는 다음날 아침 신문을 겨냥해, 오늘 오후에 중대한 무엇인가를 발표할 예정이라는 말을 오전에 한다. 그러면 그는 당장 그날 오후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을 얻는데 성공한다. “매카시의 새로운 폭로가 의회에서 있을 예정이다.”
“기자들은 매카시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왜냐하면, 기자들은 매카시가 만든 가짜 사건의 공동 연출자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자들은 매카시가 연출한 놀음의 거미줄에 스스로 걸려들었다.”
당시 워싱턴 기자였던 리처드 로비어의 회고는 매카시즘이 한 극우 정치인의 무책임한 언론 플레이와 뉴스에 목말라하던 기자들이 합작으로 만든 선동적 정치행위라는 걸 시사해 준다. 이는 한편으로 매카시즘이 ‘정적(政敵)의 성격이나 애국심에 대해 비난을 선동하거나 무분별하고 근거 없는 고발’을 이르는 말로 통용되는 이유다.
이 나날이 상승하던 극우적 사회 분위기는 1952년 공화당이 민주당 정권을 뒤집고 집권에 성공하고 다수당이 되면서 반전되기 시작했다. 양당은 오랜 매카시즘의 광풍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데다가 집권에 성공한 공화당이 매카시즘에 대한 매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매카시가 점점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 것도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이에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양심선언을 통해 “독재자의 방법으로 자유를 지켜서는 안 된다.”고 개탄했다. 연방대법원도 미국 헌법 제정 정신에 따라 국가 안보보다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판결을 내리기 시작했다.
언론을 이용해 매카시가 유력 정치인으로 떠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몰락도 언론을 통해서였다. 1954년 3월 9일 CBS의 시사 프로그램 <시 잇 나우(See It Now)>에서 에드워드 머로((Edward R. Murrow, 1908~1965)가 매카시에게 카운터펀치를 날린 것이다. 머로는 이 프로그램에서 매카시의 주장을 일일이 따지며 그것을 허위라고 주장했다.
그럴수록 매카시의 공격성은 심해져서 마침내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양당 지도부까지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육군 내에도 친공 세력과 간첩들이 득세하고 있다며 육군에 대한 청문회를 열어 현역 군인들에게 인신공격을 퍼부었던 매카시는 1954년 4월 자신의 청문회에 출석해야 했다. 그는 청문회에서 주장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이성을 잃은 행동을 하기도 하면서 그동안 쌓았던 신뢰를 거의 까먹어 버렸다.
1954년 12월, 상원이 그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의결한 이후 그의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고 매카시는 ‘미치광이’ 혹은 ‘간신모리배’ 등에 비유되면서 대중으로부터 버림받기 시작했다. 상심한 그는 알코올 중독의 나락에 빠지게 되었고 당으로부터도 외면당한 채 1957년 만 4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매카시가 적극적으로 활동한 시간, 매카시즘이 시민들을 억압하고 핍박한 시간은 4년 남짓이지만 그 피해는 적지 않았다. 매카시즘에 동조한 유명 인사로는 반공주의자로 뒷날 40대 대통령이 된 배우 로널드 레이건, <에덴의 동쪽>·<워터프론트>의 영화감독 엘리야 카잔, <백설공주>의 월트 디즈니를 꼽을 수 있다. 레이건과 엘리아 카잔, 게리 쿠퍼 등은 동료 배우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갈린 유명인사들
반대로 매카시즘의 피해를 본 이로는 영화인 찰리 채플린, 극작가 아서 밀러,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시인 겸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이 있다. 히틀러를 풍자한 영화 <위대한 독재자>(1940)을 만들었던 채플린은 공산주의 사상에 동의하였다는 의심을 받아 1952년에 연방수사국(FBI)로부터 입국을 거부당했다.
<세일즈맨의 죽음>의 극작가 아서 밀러도 고발당해 청문회에 소환되었다. 젊은 시절 공산당에 가입했던 전력이 문제가 된 것인데 그를 고발한 사람은 그의 예술적 동료였다. ‘반체제 작가 조직’의 명단을 자백하라는 당국의 종용에 진술 거부로 맞서자 당국은 그를 국가모독죄로 기소했다.
매카시즘 피해자의 수를 정확하게 집계하기는 어렵다. 수백 명이 수감되었으며 1만~1만2천 명이 직업을 잃어야만 했다. 이들은 대부분의 경우 위원회에 소환되거나 혐의가 제기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되었던 것이다. 동성애 혐의도 매카시즘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어 성적 지향을 이유로 수천 명이 괴롭힘을 당하고 취업이 거부되었다.
매카시즘은 영화산업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300여 명이 넘는 배우 및 작가, 감독들이 비공식적인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오르며 해고당하여야 했다. 매카시 블랙리스트들은 학교와 대학교 및 다른 문화 산업 분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비교적 짧은 시간 미국 사회를 풍미했지만 매카시즘은 사회 전반을 뒤흔든 광범위한 문화적·사회적 현상이었다. 국가 안보를 빌미로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오직 정치인 한 명의 선동에 휘둘려 수많은 논란과 갈등을 일으켰던 이 현상은 미국 사회에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환기해 주었다.
그리고 2016년 한국, 현실을 규율하는 힘
종주국 미국에선 4년 만에 숙진 매카시즘은 이데올로기 대립이 지속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시시때때로 출몰하는 ‘전가의 보도’다. 이승만 이후 보수 정권은 권력의 위기 때마다 이데올로기의 낙인으로 정치적 반대자와 국민을 억압해 온 것이다.
정부와 정보기관 등에 의해 발표된 간첩과 용공 사건들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대부분이 조작·날조된 것으로 드러났다. 주춤했던 매카시즘은 남북의 갈등이 재현될 때마다 소수의 사상적·정치적 반대자들을 ‘종북(從北) 좌파’로 매도하는 형식으로 다시 대두되고 있다.
특히 요즘 한국사회의 매카시즘은 어떤 사상적·정치적 태도와 무관하게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학자들과 평범한 시민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행사되고 있다. 최근 정부 여당이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이들을 ‘종북좌파’로, 정부 검정을 거친 기존 교과서를 ‘종북좌파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규정한 것은 한국판 매카시즘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 공영방송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의 검사 출신 이사장은 제1야당의 대표를 “공산주의자로 확신한다”로 시작하여 “사법부에 김일성 장학생이 있다”, “공무원 중에도, 검찰에도 (김일성 장학생이) 있을 수 있다고 보고 대비해야 한다”고 기염을 토했다. 이에 한 시사주간지는 매카시와 그를 비교하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이쯤 되면 한국사회에서의 매카시즘은 미국에서 시작되어 역사적 유물이 된 사상이 아니라 엄연히 현실과 삶을 규율하는 힘이고 강제력이다. 매카시 시대에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으로 거기 동조했던 민주당처럼 오늘, 우리는 그 강력한 힘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침묵하고 있지는 않는가. 침묵도 모자라 그 다수파의 힘을 추인하면서 그들의 손을 들어주고 있지는 않은가.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