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리는 백수의 왕 수사자, 그 진실은 그냥 백수(…)
동물의 세계에도 절대 권력이 있을까? 특정 동물 종이나 집단을 가리켜 “동물의 왕국”이니 “백수(百獸)의 왕”이니 하는 말들을 흔히 하지만, 이런 개념은 디즈니 만화나 전래동화, 심지어 일부 자연 다큐멘터리가 만들어낸 허구에 가깝다.
백수의 왕으로 불리는 사자의 경우를 보자. 수사자의 실제 모습은 백 가지 동물을 거느리는 제왕이 아니라, 자기가 거느린 조그만 가족 집단의 암컷들이 사냥해온 먹이를 먹고 낮잠이나 자는 백수건달(白手乾達)에 가깝다. 게다가 이런 생활을 하는 수컷이 대부분 무리에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니 절대 권력과는 거리가 멀다.
무리에 속하지 못한 수사자는 암사자들의 무리를 찾은 뒤, 교미의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 힘없는 새끼들을 물어 죽이기까지 한다. 잔인함도 제왕의 조건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어쨌든 동물 종마다 살아가는 방식과 전략이 있는데 절대 권력으로 치켜세우는 것이나 백수건달이라 깎아내리는 것이나, 쓸데없는 짓이긴 마찬가지이다.
실제 동물 세계의 우두머리는 암컷
그럼에도 동물의 세계에도 정말 절대 권력이란 것이 존재하기는 한다. 그런 경우 무리의 제왕은 어김없이 암컷이다. 특히 벌이나 개미 같은 진사회성(eusociality) 곤충은 이를 잘 보여준다.
진사회성이란 특정 개체가 자식을 낳고, 다른 개체들은 그들 개체를 공동으로 기르는 것이다. 해밀턴(W.D. Hamilton)이 구체화한 혈연선택(kin selection) 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번식 방식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친족의 번식과 생존을 도움으로써 무리의 모든 개체가 자신의 적응도를 높이는 전략이 진화한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포유류 중에도 진사회성 전략으로 살아가는 종이 있다. 바로 동아프리카 초원지대에 땅굴을 파고 살아가는 벌거숭이두더지쥐이다.
여왕이 이끄는 벌거숭이두더지쥐 사회
벌거숭이두더지쥐는 많게는 300마리가 무리를 이루어 함께 같은 굴에서 살아가는데, 포유동물이라도 살아가는 방식은 개미와 상당히 비슷하다. 단 한 마리의 절대 권력, 여왕과 땅굴을 지키는 힘 센 군사들과 굴을 파고 먹이를 찾아오는 등 잡다한 일을 하는 일꾼들이 차례로 카스트를 이룬다. 여왕은 일꾼들과 달리 십 수년간 장수하며 새끼를 낳아 무리를 유지한다. 여왕이 낳는 모든 새끼의 아빠는 무리의 수컷 중 가장 힘이 센 군사 출신인데 끊임없이 교미만 하다가 비교적 단명하고 만다.
모든 진사회성 동물에서 제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리의 암컷 중 홀로 번식한다는 것이다. 벌이나 개미의 경우에 발달 과정에서 여왕이 되지 못하고 일꾼이 된 암컷은 애초부터 생물학적으로 불임이다(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불임의 딸들은 제 어미의 번식을 도와 생물학적 이익을 챙길 뿐, 권력에 맞서 불복종을 꿈꿀 이유가 없다.
벌거숭이두더지쥐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여왕이 아닌 무리의 암컷들은 처음부터 번식할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절대 권력에 대한 복종의 의미로 스스로 호르몬을 조절하여 일시적으로 불임이 된 것이다. 예민한 벌거숭이두더지쥐 여왕은 번식을 가능하게 하는 호르몬을 분비하는 무리의 암컷을 금세 감지해서 몸소 호된 처벌을 내린다. 여왕이 제 수명을 다하고 죽은 뒤에야 딸들도 절대 권력의 기회를 노릴 수 있게 된다.
동물의 왕국에서 제왕의 절대 권력은 이렇게 유지된다. 절대 권력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불임까지 감수하는 절대 비권력이 필요하다. 권력을 꿈꾸는 사회 구성원, 즉 역적은 단호히 처벌한다. 천만다행 아닌가? 우리가 사는 사회가 벌거숭이두더지쥐의 왕국은 아니니까.
참고
- Wilson, E. O. (1971). The insect societies.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Massachusetts.
- Hamilton, W. D. (1964). “The Genetical Evolution of Social Behavior”. Journal of Theoretical Biology, 7: 1–16.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