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늪지대를 지나가야 하는 것일까.”
<나나>와 <목로주점>의 프랑스 작가 에밀 프랑수아 졸라(Émile François Zola, 1840~1902)가 생전에 내뱉은 한탄이다. 그는 드레퓌스(Dreyfus) 사건 때 드레퓌스를 옹호하여 죽는 날까지 프랑스 군부와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았고 야유와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19세기 후반의 여러 해 동안 프랑스를 휩쓸었던 반유대주의와 이로 말미암아 희생된 드레퓌스의 무죄 여부를 놓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군부 등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이 격돌했던 사건이다.
1898년 1월 13일, 에밀 졸라 <나는 고발한다> 발표
나는 1984년 초임 시절에 한길사에서 발행한 N.할라즈의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을 통해서 이 사건을 처음 만났다. 책의 부제는 ‘역사적 전개과정과 집단발작’. 나는 지금도 이 책을, 리영희 교수의 저작들, 특히 <베트남 전쟁>과 함께 내 독서편력에서 가장 강렬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 준 책으로 꼽고 있다.
유대인인 프랑스 육군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1894년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간첩이 쓴 문건 때문에 반역죄로 기소된다. 무고한 그가 기소된 것은 정보 유출에 사용된 문건에서 발견된 암호명 ‘디(D)’가 드레퓌스의 이니셜과 일치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드레퓌스는 종신형과 치욕적인 군적 박탈을 선고받아 불명예 전역한 뒤,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으로 유배당하게 된다.
그가 간첩으로 지목된 것은 순전히 유대인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 당시 고급 장교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덮으려고 사실을 은폐했고 반유대적인 가톨릭교회와 보수주의 언론들도 이 사건을 침소봉대했던 것이다. 2년 뒤에 진범이 적발되었으나 참모본부는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해 버렸다.
그 무렵,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동으로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가톨릭 계열 신문들을 통해 “유대인은 프랑스의 적이다. 매점매석한다. 신을 살해한 민족이다. 그들은 저주 받았고 우리는 기독교인이다”며 반유대주의를 조장했다. 결국 드레퓌스 사건은 민족주의, 국수주의와 결합하여 온 프랑스를 휩쓴 이 반유대주의가 만들어낸 정치적 추문이었던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이 일반에 알려지면서 프랑스는 드레퓌스의 유죄를 믿는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보수층과 무죄를 믿는 개신교인과 지식인층으로 갈라졌다. 드레퓌스의 유무죄는 심지어 가족 친지 사이조차 갈라놓았다.
당시 졸라는 이미 그가 쓴 40여권의 책이 유럽에서 수백만 권씩 팔린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그는 1898년 1월 7일 ‘프랑스에 보내는 편지’라는 팸플릿을 통해 “프랑스여, 그대는 교회가 지배하던 과거로 되돌아가려 하는가”라고 하며 현실을 통탄했다.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문학 신문 <로로르>지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으로 당시 대통령 페릭스 포레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발표하면서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다. 졸라는 프랑스 정부의 반유대주의와 불법적인 투옥, 사법당국의 증거 부족으로 인한 판결의 오류 등을 조목조목 짚어나가며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문학적 성과와 명예와 목숨을 걸고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드레퓌스에 대한 찬반논란이 거세지는 가운데 진보 지식인 졸라가 공개적으로 드레퓌스를 지지하고 나서면서 이 논란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드레퓌스가 무고하다는 건 명백했지만 권력자들은 인종적 편견에 바탕을 둔 오판을 뒤집지 않았다.
재판대에 오른 것은 ‘프랑스’다
오히려 권력에 도전한 졸라가 군법회의를 중상했다는 혐의로 법정에 회부되었다. 그는 법정에서 재판대에 오른 것은 자기도, 드레퓌스도 아니고 프랑스라고 단언했다. 문제는 프랑스가 아직도 정의와 인도주의의 수호자라는 이 나라의 특성에 충실한가 아닌가 하는 것이라 했다. 그는 “프랑스의 운명이 이 법정의 결단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그러나 법정은 졸라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그는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살해 위협에 시달렸고 경매에 집이 넘어가고 명예훼손 소송에 시달리게 되자 결국 항소 중에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이듬해 귀국한다.
진실과 정의의 편에 선 지식인은 에밀 졸라뿐이 아니었다. 정치가 조르주 클레망소,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를 비롯한 앙리 푸앵카레, 장 조레스 등의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프랑스 군부와 정부에 비판에 나서면서 정부의 부담은 가중되기 시작했다.
1898년, 공범이 옥중에서 자살하자 드레퓌스는 재심을 받게 되지만 감형만 되었을 뿐 유죄판결은 뒤집히지 않았다. 선고 뒤 대통령의 사면으로 드레퓌스가 석방된 뒤에도 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드레퓌스의 재심이 다시 청구된 것은 1904년이었고, 이태 뒤인 1906년, 12년 만에 그는 무죄를 선고받고 복권되었다.
그러나 드레퓌스를 옹호하느라 온갖 고난을 감수했던 에밀 졸라는 그의 무죄선고와 복권을 보지 못한 채 1902년에 가스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그의 유해는 프랑스 위인들의 안식처인 팡테옹에 안치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 특히 광부 대표단이 세 시간 넘게 졸라의 묘혈 앞을 돌면서 ‘제르미날!'(광부의 삶을 다룬 졸라의 소설)을 연호한 것은 그에게 바치는 노동자들의 경의였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성향 때문이었던가. 히틀러의 나치당은 베를린 분서 때 루터의 책, 유대인들의 서적과 함께 졸라의 저서를 모두 불태웠다.
졸라의 ‘고발’을 일러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프랑스의 사회정의, 공화국의 이념, 자유정신을 질식시키기 위해 손을 잡은 모든 폭력적, 억압적 세력의 음모를 드러낸 것”으로 평가했다. 졸라에 대한 평가의 압권은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것이다.
“나는 졸라를 향한 존경과 가없는 찬사에 사무쳐 있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1998년 1월 13일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발표 100돌이었다. 국가이성의 이름으로 한 무고한 인간에 가해졌던 인권유린의 대표적 예로 기록되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졸라가 살던 집에 현판식을 갖고 기념비를 헌정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졸라가 쓴 <나는 고발한다> 원본과 드레퓌스 사건 관련 문서들을 진열했다. 또 졸라가 안치된 팡테옹에선 당시 왜곡된 공권력의 상징이던 법무부와 국방부의 수장이 참석해 다시는 국가 권력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될 것임을 다짐하며 졸라에게 경의를 표했다.
한국판 드레퓌스, 강기훈의 24년
1991년 봄, 노태우 정권의 실정과 공권력의 폭력에 항의하는 대학생·노동자들의 시위와 분신이 잇따를 때다. 그해 5월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도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자살했다. 정권에 항의하는 분신이 연일 계속되자 일부 언론에서는 운동권 사이에 죽음을 찬미하는 소영웅주의 허무주의적 분위기가 집단 감염되듯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인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는 글을 발표했고, 예수회 신부인 서강대학교 박홍 총장은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성경에 손을 올리고 기자회견을 벌이기도 했다. 기자회견 뒤부터 김기설의 분신자살 배후설이 언론에 도배질되고 검경의 대대적 공안몰이 수사가 시작되었다.
강기훈 전민련 총무부장의 이름이 용의선상에 오르는가 싶더니 검찰은 그를 자살 배후로 지목하고 그가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로 수사에 착수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유서와 강씨의 필적이 같다는 감정결과를 내놓으면서 그해 7월 강기훈은 자살 방조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이듬해 징역 3년이 확정되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했지만 사건의 성격도 전개과정도 다르긴 했지만 그의 무죄를 주장하며 치열하게 싸운 에밀 졸라 같은 지식인은 없었다. 이 사건이 대필사건으로 비화되는데 되레 기름을 끼얹은 이는 저항시인으로 불리었던 김지하와 예수회 신부 박홍이었다. 이들의 행위가 직접적으로 강기훈의 유죄 판결과 인과관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국가폭력, 피해자는 있지만 사죄는 없다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진 것은 16년 만인 2007년 11월, 대한민국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의해서였다. 그러고도 재심이 시작된 것은 5년 뒤인 2012년이었고, 2014년에 서울고법은 이 사건에 대해 무혐의·무죄 판결을 내렸다. 2015년 5월에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강기훈의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고, 강기훈의 잃어버린 24년에 대해서도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100주년에 프랑스 정부는 “다시는 국가 권력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될 것”을 다짐했지만 2015년 한국에서는 이 국가폭력에 대한 사죄는 없었다. “상처투성이 삶과, 암 투병에 지친 육신 앞에 ‘피고인은 무죄’라는 말은 너무 늦게 찾아온 정의”(<한겨레>)였을 뿐이다.
19세기 말의 드레퓌스 사건과 20세기 말의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은 그렇게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게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과 그 작동 방식의 차이 때문인지 무엇인지는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