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디어드리 맥클로스키는 이번 주 뉴욕 타임스 글에서 “사람들이 세상이 망해가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 못 하겠다.”라고 말했다.
세상이 망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는 어렵다. 세상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에게 더 좋아져 왔지만, 낙관론보다 오히려 비관론이 더 우세를 점하고 있음은 물론 더 현명하다고 여겨지기까지 한다. 비관론은 지적이며 매혹적으로 들린다. 낙관론보다 더 큰 주목을 받고 낙관론자를 앞뒤 못 가리는 멍청이로 치부하게 한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150년 전 이렇게 썼다.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절망할 때 희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희망할 때 절망하는 사람이 대중에게 현인으로 추앙받는다.”
매트 리들리는 <The Rational Optimist(이성적 낙관주의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만일 여러분이 세상은 더 좋아져 왔다고 말한다면, 순진하고 무감각하다는 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세상은 더 좋아져 가고 있다고 말한다면 무안하리만큼 미쳤다는 취급을 받을 것이다. 만일 반대로 세상에 재앙이 임박했다고 말한다면 맥아더 천재상 혹은 노벨 평화상까지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투자에서 강세론은 분별없는 치어리더의 응원 소리처럼 들리는 반면, 약세론은 예리한 지성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지난 한 세기 동안 S&P 500은 18,000 배 상승을 기록했음에도 말이다 . 제레미 시겔 와튼 스쿨 교수는 종종 영원한 주식 강세론자이며, TV에 출현할 때마다 맹목적으로 주가 상승을 응원한다는 비난을 받곤 한다. 하지만, 그의 말은 주식 시장의 가치가 40배 이상 상승했던 기간인 1980년대 초 이후 나온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누군가가 다음의 대공황에 대해 경고할 때 과거의 결과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투자에서뿐만이 아니다. 하버드 대학의 테레사 아마빌레 교수에 따르면, 같은 책에 대해 긍정적인 서평을 게시하는 이들보다 부정적인 서평을 게시하는 이들이 더 똑똑하고 유능해 보인다고 한다. 아마빌레 교수는 “오직 비관론만이 심오하게 들린다. 낙관론은 피상적으로 들린다.”라고 쓰고 있다.
비관론에 마음이 더 끌리는 이유
분명 비관론이 위급하기 때문이다. 대니얼 카네만은 사람들이 이익보다 손실에 더 강한 반응을 나타낸다는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런 반응이 진화에서 방패 역할을 했다. 카네만은 “기회보다 위험을 더 긴급하게 다루는 생명체가 살아남아 자손을 남길 가능성이 더 크다.”라고 썼다.
다음은 비관론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몇 가지 다른 이유이다.
1. 낙관론은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비관론이 더 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낙관론자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다. 대부분의 낙관론자는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며 경기침체, 약세장, 전쟁, 패닉 및 전염병이 닥칠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낙관론을 유지한다.
그 이유는 이런 불리한 면을 견딜 수 있도록 포트폴리오와 경력 및 성향을 미리 만들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비관론자에게는 나쁜 사건이 이야기 전부지만, 낙관론자에게는 다른 훌륭한 책들에서처럼 도입부에 불과하다. 낙관론자에게 있고 비관론자에게 없는 것은 인내와 시간이다.
2. 비관론은 모든 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며, 이것은 우리 모두 개인적 단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합리화시킬 수 있게 해준다. 흔히 말하는 동병상련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이 자기 통제 범위 밖에 있는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편안한 기분을 가진다. 그래서 우리는 비관론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3. 비관론에는 행동이 필요하지만 낙관론은 힘들더라도 끝까지 버틴다는 의미가 있다. 비관론은 “팔고 빠져나와 도망가라.”라는 식이며, 이는 지금 당장 취해야만 할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의 이목을 끌게 된다. 반면 낙관론은 대부분 “걱정할 것 없다. 끝까지 버티면 모든 게 잘 될 것이다.”라는 식이며, 여기에는 어떤 행동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무시된다.
4. 낙관론은 마치 장사치의 고함처럼 들리지만, 비관론은 누군가가 마치 여러분을 도와주려는 소리로 들린다. 그리고 종종 맞기도 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낙관론은 정확한 중심 추 역할을 하는 반면, 비관론은 다른 무엇보다 더 큰 장사치의 고함이 될 수 있다. 특히 돈과 정치 같은 감정적인 주제를 둘러싼 경우에는 더 그렇다.
5. 비관론자들은 현재의 추세를 그저 미래로 확장할 뿐이지, 시장이 어떻게 적응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는다. 비관적 전망은 종종 합리적 분석을 토대로 시작되며 그에 따른 경고는 무서우리 만치 합리적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2008년 환경 운동가 레스터 브라운은 이렇게 썼다.
“2030년 기준으로 중국은 하루에 9천8백만 배럴의 원유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현재 세계에서는 하루에 8천5백만 배럴의 원유가 생산되고 있으며 이 이상 생산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세계 원유 매장량이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의 시나리오대로 상황이 진행된다면 얼마 가지 않아 원유가 다 떨어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시장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원유 부족은 유가를 끌어올렸고, 높은 유가는 생산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시추 기술 개발의 동기를 부여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현재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원유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 세계 원유 생산량은 하루 9천6백만 배럴이었다. 이미 브라운이 생각했던 최고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비관론자들 대부분의 예측이 헛되게 사라지는 원인은 시장의 적응 능력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관론자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까? 물론이다. 비관론자들의 주장은 상황이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곧 변할 것임을 보여주는 최고의 지표이다. 따라서 상황이 낙관적으로 바뀔 토양이 된다.
출처: 책도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