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권조례에 이어 차별금지법이 또 한 번 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시끄러운 것은 기독교, 그중에서도 개신교 교회다. 이들의 반대 여론은 외부에서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거센 것이어서, 국회 입법예고 시스템에는 일주일새 십만 개에 이르는 의견이 폭주하고 있으며, 개중 대부분은 반대 요지의 의견, 그것도 개신교 교회에 돌고 있는 전형적인 음모론 – 학교에서 항문 성교를 가르칠 것이라거나 – 에 기반을 둔 것이 대부분이다.
개신교 교회가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 이 법안이 ‘종교’와 ‘성적 지향/성적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하는 행위를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개신교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설교나 전도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거나 “우리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항문 성교를 가르치게 될 것” 등의 근거를 내세워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주장을 펴는데 사실 이는 법안의 내용과 관계가 없는 음모론에 불과한 터라 논의의 여지가 거의 없다.
다만 학생인권조례에 이어 이번에 또 한 번 ‘성적 지향/성적 정체성’이라는 단어, 좀 더 노골적으로 축소하자면 ‘동성애’에 대해 이렇게 개신교 교회가 민감하게 나서는 까닭에 대해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성경에서 동성애는 어떻게 묘사되는가
학생인권조례에 이어 차별금지법도 개신교 교회가 ‘동성애를 허용하는 악법’으로 규정하고 치열한 반대 투쟁에 나설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이 내거는 근거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역시 성경이다. 성경에 동성애를 죄로 규정한 구절이 여럿 발견된다는 것이다.
개신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일화라면 역시 소돔의 일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동성 간의 성 접촉, 특히 항문 성교를 지칭할 때 쓰이는 ‘소도미’ 같은 용어가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소돔은 창세기의 배경이 되는 지명으로, 죄악이 많은 땅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동성애와 관련된 일화가 19장에서 자세히 묘사되고 있는데,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롯이 두 사람의 남자를 손님으로 맞아 대접을 하고 있는데, 소돔의 여러 마을에서 남자들이 몰려와 “오늘 밤 당신의 집에 온 남자들이 어디 있는가, 우리가 관계를 해야겠다”고 소리쳤다. 롯은 이에 그것이 악한 짓이라 타이르고 대신 성 경험이 없던 자신의 두 딸을 내어주려 했으나, 몰려온 남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문을 부수려 들었다. 그런데 사실 롯의 집에 찾아온 손님들은 천사였다. 이 천사들은 소돔을 멸망시키기 전에 혹 소돔에도 의로운 사람이 있는지를 알기 위해 찾아왔던 것이다. 천사들은 롯에게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곧 소돔은 유황불이 떨어져 멸망했다.
소돔의 멸망을 초래한 이 일화에서 롯은 손님으로 찾아온 두 남자를 다른 남자들이 범하는 일을 정확히 지적해 ‘악한 짓’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19장 1절부터 11절까지, 성경에서도 비교적 긴 분량을 할애해 이 일화를 다루고 있는 것은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부정적인 입장을 비교적 명백히 드러내는 방증으로 보인다.
레위기는 좀 더 직설적으로 동성애를 비난한다. 레위기 18장 22절의 “너는 여자와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안 된다. 그것은 망측한 짓이다”, 레위기 20장 13절의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죗값으로 죽는 것이다” 등의 구절은 소돔의 일화에 비해 명확히 직설적으로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들에게 쓰는 편지의 형태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 있다. 1장 27절의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라는 구절이다.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간접적으로 동성애를 비난할 소재가 될 만한 구절도 많다. 창세기 2장, 아담과 이브의 창조 이야기에서부터 이미 ‘남자는 여자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는 구절이 있으며, 그 이후로도 성경에서는 남성과 여성 사이 결혼의 신성성을 보장하는 구절이 여럿 발견된다.
진보 교회의 변명
물론 교회 전체가 이런 해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입장이 조금씩이나마 전향적으로 바뀌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일각에서는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성경 구절에 대해 다소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개중에서도 특히 논쟁적인 것이 소돔의 일화다. 소돔이 단죄받은 이유는 남자들이 몰려와 남자와 관계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 아니라, 롯의 집에 찾아온 손님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손님을 성심껏 맞을 것을 설교하는 일화들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러나 소돔의 일화를 다르게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 등 명확하게 동성애(특히 남성과 남성의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는 구절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거의 없다. 결국 이런 점을 변호하기 위해 당시의 시대적인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예를 들어 동성애를 비교적 명백히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는 레위기의 경우 제사부터 시작해 다양한 분야에서 지켜야 할 규율을 27장에 걸쳐 서술하고 있는데, 동성애 금지는 그중 일부다. 그런데 여기에는 “밭에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씨앗을 뿌려서는 안 된다”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재료를 섞어 짠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낙타, 오소리, 토끼, 돼지를 예로 들어) 이런 짐승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들의 주검도 만지지 마라” “구레나룻을 밀어서는 안 된다” 등 오늘날 개신교도 사이에서도 전혀 지켜지지 않는 규율들이 다수 규정되어 있다. 또 레위기에서는 월경하는 여성을 불결한 것으로 여겼으며, 월경하는 여성과 성관계를 가질 경우 남녀 모두를 추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음식이나 생활 양식 등의 문제는 사도행전 10장이나 골로새서 2장 등에서 금지가 풀린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인데다, 성경을 ‘신의 말씀’으로 보고 성스러운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개신교단이 이런 진보적 입장을 얼마나 수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해석의 여지가 있는 구절에서도 역시 다수의 해석은 성경이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입장은?
‘혼인은 남녀 간의 신성한 결합이며, 동성 간의 애정 행위는 비성경적인 행위이다.’
교단에 따라 입장이 다소 다르긴 하나, 대부분의 주류 교단에서는 동성애를 비성경적인 행위로 규정한다. 몇몇 논객을 중심으로 일부에서는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이 대세’라고 주장하긴 하지만, 이는 오히려 진보적인 종파 일부의 움직임을 지나치게 크게 해석하거나, ‘동성애’와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미묘하게) 서로 다른 입장을 뒤섞어 오인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압도적인 최대 종파인 가톨릭은 여전히 성관계에 대해 대단히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동성애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의 성행위에 대해서도 규율이 엄격하다. 명백히 ‘피임을 의도하는 행위’는 배격되어야 하며, 모든 부부 관계는 남녀가 하나 되는 신성한 결합으로서이자 자녀 출산의 목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오직 피임이 가능하다면 이는 부부 사이에서, 책임 있는 양육을 위한 자녀 계획의 일환으로서 배란주기를 이용한 피임법을 시도할 때만 가능하다. 그 외에 허용되는 피임은 금욕뿐이다.
다만 동성애 성향이 자연법에 어긋나는 것임에도 동성애자들에게 있어서는 또한 시련이기도 하기에 그들을 차별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단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동성애를 비난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긴 어렵다. 동성애 자체는 분명한 죄악이므로, 동성애자는 정결(…)을 지킴으로써 주의 뜻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동성과 성관계를 갖는 동성애자까지 가톨릭이 용인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신교회는? 워낙 많은 교단이 있으니만큼 개신교회의 입장을 어느 하나로 뭉뚱그려 설명하긴 어렵다. 진보 교단과 보수 교단의 입장이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미국 최대의 개신교 교단인 남침례교는 2012년 총회에서 혼인을 남녀 간의 결합으로 규정하고 혼외정사를 죄악으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물론 이는 동성애와 동성결혼에 대한 명확한 반대 입장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큰 개신교 교단인 연합감리교도 비슷한 입장이다. 반면 동성애 문제에 비해 비교적 전향적인 미국장로교나 연합그리스도교 등은 역시 큰 교단이긴 하지만 이들에 비해서는 신자의 규모가 훨씬 작다.
이 문제에서 또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동성애를 인정한다(또는 동성결혼을 인정한다)’는 것과 ‘동성애자가 목회자가 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 그리고 ‘동성애자를 존중한다’는 것이 서로 다른 층위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비교적 잘 보여주는 것이, 역시 이 문제에 비해 비교적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는 성공회가 그간 동성애와 동성애자를 둘러싸고 진행해온 논의다.
동성애자가 독신을 유지한다면 성직자가 될 수 있는가? 가톨릭의 입장을 빌어 얘기해보자면, 동성애 자체는 분명한 죄악이지만, 그것은 동성애자들에게 있어서는 또한 시련이기도 하다. 동성애자들이 실제로 동성에게 애정을 품거나 성관계를 갖지 않고 정결을 지켜낸다면 주의 뜻에 가까이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성애자 주교가 동성 파트너와 시민결합 또는 결혼을 한 상태라면 성직자가 될 수 있는가? 가톨릭에서라면야 당연히 논의조차 필요 없는 이야기겠지만, 가톨릭과 달리 성공회는 성직자도 혼인할 수 있다. 따라서 성공회에서 이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동성 간의 시민결합 또는 결혼, 또는 동성 간의 연인 관계는 종교적으로 축복받을 수 있는가? 이것도 또 다른 문제가 된다. 다시 가톨릭의 입장을 끌어와 보자면, 성공회가 가톨릭처럼 동성애를 자연법에 위배되는 것이나 비성경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정결을 지킨 사람을 성직자로 임명하는 것과, 동성애자들의 결합이나 관계를 축복하는 것은 또 다른 얘기라는 것이다. 이런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가 단순히 ‘동성애 허용’이라는 범주로 묶여 취급되면 교단의 미묘한 입장 차이와 논의의 진행 과정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차별금지법안의 발의자 중 한 사람인 민주당 김한길 의원의 발언은 이런 의미에서 흥미롭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 개인적으로는 동성애를 찬성하지 않는다. 동성애가 조장되고 확산되는 것에 반대한다 (…)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차별받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가 싫어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들을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라고.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과 동성애자를 존중하는 것이 충분히 다른 층위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해석의 여지 없는 최후의 금기
구약에서의 규율은 예수 탄생 이후 신약에서 상당히 많은 변화를 겪는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원래 먹는 것이 금지되었던 동물들이 들어있는 그릇을 하늘로부터 내려받았으며,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 들었다. 골로새서에서는 ‘손으로 행하지 않는 할례’, 즉 ‘그리스도의 할례’가 언급되고, ‘먹고 마시는 일, 명절, 초승달 축제, 안식일 등의 문제’는 ‘그림자일 뿐,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음이 언급되기도 한다.
반면 동성애는 역시 신약 중 하나인 로마서와 고린도전서(둘 다 편지의 형태를 띠고 있다) 등에서 다시 한 번 죄악임이 명확히 언급되고 있다. 일부 진보 교단에서 다른 해석을 내놓긴 하지만, 주류 보수 교단의 해석에 비해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특히 가장 많은 신도들이 믿고 있는 천주교나 미국의 대형 교단에서는 동성애 뿐 아니라 피임과 혼외정사 등 대부분의 성 관련 문제에서 보수적인 해석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성경 내에서는 비교적 확실히 죄악으로 규정되어 있는 동성애지만, 성경에서 한 발자국만 밖으로 나가도 이를 죄악으로 규정할 그 어떤 근거도 찾기 어렵다.
유명한 얘기부터 살펴보면, 이미 동성애는 1973년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미국 정신의학회가 출판한다)에서 삭제되었다. 이에 대해 일부 보수계층, 특히 보수 기독교계에서는 이것이 동성애자들의 조직적 움직임, 나아가 협박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협박설은 논할 가치도 없는 것이고, 동성애자들의 사회적 운동 이전에 이미 수많은 연구들이 동성애를 장애나 비정상으로 간주할 만한 그 어떤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도 찾지 못했던 상태임을 망각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동성애가 선천적인 것인가, 후천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도 상당히 오랜 논쟁거리였다. 아무리 성경이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하나, 그것이 만일 선천적으로 주어진 특질이라면 동성애 성향이 있다는 이유로 그를 도덕적으로 힐난하기는 어려워진다. 이에 대해 명확히 어떤 요소가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이론이 확립된 바는 없으나, 적어도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 의식적인 선택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 현재 정신의학계나 심리학계 등 관련 학계의 주류 입장이다. 과학적으로 엄밀히 ‘선천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이는 과학이 사용하는 용어의 엄밀함 때문이지,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선천적’ ‘후천적’이란 말의 의미를 따져보자면 ‘선천적’이라고 말한다 해도 어폐는 없을 것이다.
또한 동성애나 동성 간의 시민 결합, 혹 결혼 등 세속적인 제도에 대해서도 교회는 장문의 근거를 들어 이를 반대하지만, 그 반대 주장의 가장 근간이 되는 부분은 결국 ‘신성한 혼인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성경이 남녀 간의 혼인을 신성한 것으로 보호했다는 것이 동성애자 간의 모든 종류의 결합을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된다. 성경을 떠나서는 교회의 입장을 설명하기 어렵다. 교회는 동성애자 간의 결합을 인정하면 혼인의 신성성이 떨어지고 결국 혼인과 자녀 출산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의 공동선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적어도 성인으로서 판단력을 갖춘 이성애자라면 옆에서 동성애자가 결혼하는 것을 보고 나도 동성과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적 지향과 정체성이 의식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다.
또한 일부에서는 동성애자였다가 이성애자로 치료받았다고 주장하는 일부 인사의 주장을 들어, 동성애라는 죄악에서 벗어나 신께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정신의학계나 심리학계는 이런 교계의 주장에 전혀 공감하지 않으며,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을 바꾸려는 모든 시도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의학적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이런 시도는 우울증 등 다양한 정신질환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이 일생에 걸쳐 형성되고 변화하는 것임을 감안할 때 정말로 자연스럽게 변화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인위적으로 이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도 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즉, 동성애는 성경 내의 가치와 성경 밖의 가치가 가장 심각하게 충돌하는 지점 중 하나다. 성경 내에서는 명확히 죄악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성경 밖에서는 이를 죄악으로 규정할 그 어떤 근거도 찾을 수가 없다. 또한 기독교가 사랑, 그것도 무한한 사랑을 지향한다는 점과, 신약과 예수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소수자인 동성애자들을 죄인으로 규정한다는 것이 더욱 이상해 보인다. 교회는 성경과 과학을 충돌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이 이슈에서, 양자는 양보의 여지 없이 맞부딪친다.
기독교도이자 동성애자인 사람들은 진보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이런 딜레마를 극복하기도 하지만, 진보 교회의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건 극복하기 어려운 혼란이다. 이성애자인 기독교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정설,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는 몇 줄의 구절이 모두 명백하게 충돌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고 반대하기 위해서는 학계의 정설을 못 들은 척하고 억지 주장을 펴는 수밖에 없다. 결국 보수적인 기독교도가 동성애에 대한 목소리를 낼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그냥 없는 문제인 척 무심히 살거나, 아니면 사회적으로, 과학적으로 명백한 답안이 나온 문제에 대해 벽창호가 되거나.
정말 그것뿐일까?
일부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반대 운동이 전략적인 것이라고 의심하기도 한다. 기독교의 교세가 약해지고 특히 젊은 층에서 기독교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소위 ‘국민 정서’에 위배되는 동성애를 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여론을 주도하고 내부를 단속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좀 더 극단적인 견해도 있다. 기독교 내의 비리와 성적 방종은 심각하며, 하물며 목회자들까지도 이런 문제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더 큰 문제는 교회가 자정작용을 잃었다는 것이다. 대형 교회의 목사나 유력 단체의 대표가 뜬금없이 설교에서 정치적 견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교회 세습 논란이나 비리 논란이 터져 나오는데 교회에서는 오히려 목회자를 변호하기에 바쁘다. 성적 방종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제대로 된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은 물론, 교회 이름만 나와도 명예훼손이라 주장하며 입을 틀어막을 정도로 교회의 반응도 날이 서 있다. 이런 기독교 내부의 심각한 오염을 가리기 위해 동성애라는 외부의 적을 끌어와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심이 사실인지는 아무도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기독교 내부의 상처가 곪을 대로 곪아 심각하게 썩은 상태에서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만 쇳소리를 내며 비난하는 기독교계의 모습이 외부에서 보기에 설득력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전략적으로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의심이 바르다는 얘기는 아니다. 실제로 동성애는 성경과 성경 밖 세상이 충돌하는, 해석의 여지 없는 교회 최후의 금기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교회가 동성애에 대해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딜레마에도, 특히 보수 개신교의 반응은 과연 이런 딜레마에 대해 고민이나 한 것인지 의아할 정도로 질이 떨어진다. 반대 논리가 법안과 상관없는 음모론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 구절을 읊는 수준을 넘어 학계가 합의한 이론을 무시하고 그 어떤 근거도 없는 보수 개신교만의 자의적인 판단을 근거로 내세우기도 한다. 오직 맹목적인 주장만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에게도 나름의 고민이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해주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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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기독교의 어떤 교단, 종파가 동성애에 대해 진보적 입장일까?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덴마크 국교, 스웨덴 국교, 아이슬란드 국교 등임을 알 수 있다. 즉 원래 동성애 문제에 전향적인 사회는 기독교 역시 전향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런 면에서 종교 역시 사회의 한 단면이라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