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사진 중 어떤 게 가장 잘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마도 맨 오른쪽 사진이겠죠. 흔히 인쇄물을 접할 때 위의 왼쪽 사진처럼 핀이 어긋나거나 가운데의 사진처럼 망점이 보이는 경우는 잘못 인쇄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인쇄 기술의 발달로 위 문제는 거의 발생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독특한 인쇄 방식들이 주목받습니다. 완벽한 인쇄물보다는 조금 삐뚤어지고 선명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인쇄 방식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리소그라프
리소그라프라는 이름은 일본의 리소과학공업주식회사에서 개발한 실크스크린 방식의 디지털 공판인쇄기의 이름인데요. 미세한 구멍으로 잉크를 통과시켜 종이에 이미지가 인쇄되는 방식으로 스텐실 원리를 디지털로 변환한 기술이라고 합니다.
리소그라프 인쇄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콩기름 잉크를 사용해 친환경적이며 밝고 선명한 색의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한 번에 여러 색상을 인쇄할 수 있는 기존 오프셋 인쇄방식과는 달리 리소그라프는 한 번에 하나의 색상만 인쇄할 수 있기 때문에 핀을 완벽히 맞추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리소그라프 특유의 아날로그 느낌이 생겨납니다. 사실 리소그라프 공판인쇄기는 학교, 교회, 관공서 등에서 주로 사용했는데요, 특유의 빈티지한 매력을 느낀 젊은 디자이너들이 사용하면서 더 많이 알려졌습니다.
실크스크린
실크스크린은 판화의 종류이기도 한데요, 리소그라프와도 비슷한 스텐실의 원리입니다. 간단한 원리는 이렇습니다. 실크천을 나무틀에 고정시킨 뒤 원하는 형태를 제외한 부분에 약품을 사용해 잉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막습니다. 그리고나서 실크의 망사에 잉크가 새어나가도록 하면 원하는 모양으로 잉크가 찍혀 나옵니다.
실크스크린은 앤디 워홀의 작업에 쓰였을 만큼 오래된 작업 방식이지만 제작 방식이 비교적 간편해 누구나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틀을 한 개만 만들어 놓으면 종이 외에 다양한 곳에 여러 번 찍어낼 수 있어 천 가방, 티셔츠 등에 원하는 모양을 직접 찍어볼 수 있도록 다양한 클래스도 많이 생겼습니다.
- 실크스크린 클래스: db판화작업실
- 참고: 두산백과
- 이미지 출처: harvest textile
레터프레스
레터프레스는 볼록판 인쇄방식으로 활판에 원하는 글씨나 이미지를 조각한 후 돌출되는 부분에 잉크를 바르고 종이 한 장 한 장에 압력을 주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인쇄 방식이라고 합니다.
레터프레스의 인쇄 기계는 초기 활자판이 마모되는 단점을 보완한 단단하고 무거운 활자판부터 그 후에 고무와 플라스틱처럼 가볍고 저렴한 판들이 개발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했어요. 레터프레스 인쇄방식에 대한 연구는 계속됩니다. 현재는 가벼운 플라스틱 소재의 수지판을 이용해 원가를 절감하고 효율을 높였습니다.
레터프레스는 빠르게 변화하는 인쇄 기술의 속도와 정밀함을 따라가지 못해 구식 기술 취급을 받았지만, 1990년대 전 세계적인 ‘소규모 프레스 운동’이 일어나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요즘은 청첩장, 명함 등 고급스러운 인쇄물에 많이 쓰입니다.
활판인쇄
활판인쇄는 1980년대 현재 인쇄방식인 오프셋 인쇄가 국내에 들어오기 전까지 널리 사용되었던 인쇄방식입니다. 불과 30여 년 전까지 사용되었던 방식인데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2007년 활판인쇄소가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근대 활판 인쇄술의 가치를 알리고자 파주 출판단지에 개관한 국내 유일의 활판 인쇄소인데요. 직접 방문해 체험도 해볼 수 있는 곳입니다.
활판인쇄의 방식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납으로 만들어진 활자들에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어내는 방식인데 그 과정을 살펴보면 엄청난 수고가 들어갑니다. 활판인쇄의 과정은 크게 주조-문선-조판-인쇄의 과정으로 나누어집니다.
주조
활자 주조기에 글씨의 원형을 넣고 납을 녹여 납 활자를 제조합니다. 이 납 활자는 천 번의 인쇄를 거치면 마모된다고 합니다. 활자의 크기는 7가지이며, 가장 작은 크기는 2.6mm, 가장 큰 크기는 14.6mm입니다.
문선
만들어진 수많은 납 활자 중에서 원고를 확인하며 활자들을 일일이 뽑아서 문선 상자에 담습니다. 보통 한 페이지당 한 개의 문선 상자가 필요합니다. 200페이지의 책 한 권을 만들 경우 200개의 문선 상자를 만들게 됩니다.
조판
문선 상자가 도착하면 본격적인 조판 작업을 합니다. 사진과 같은 판에 띄어쓰기, 행간, 자간, 약물 등을 일일이 조정하면서 판을 만듭니다. 저는 간단한 명함 만들기를 체험해 본 적이 있는데 작은 띄어쓰기조차 납으로 조정해야 해서 ‘스페이스 바’가 간절해집니다. 엄청난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인쇄
이렇게 만들어진 조판을 인쇄기에 걸어 종이에 찍습니다.
활판공방의 납 활자는 총 한글 2,200자, 한문 1만 5,000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 수많은 활자를 하나하나 골라 인쇄하는 활판인쇄는 그 수고만큼 500년이 넘는 시간 보존된다고 하네요. 오프셋 인쇄처럼 고르고 깨끗한 느낌은 아니지만 글씨 하나하나에 정성이 깃든 느낌입니다.
오늘 소개한 인쇄 방식은 기존 인쇄에 비해 매끄럽지 못하고 다소 불편할지 모르지만 왠지 인쇄물 한 장도 더 특별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원문: 슬로워크 / 필자: 산비둘기발자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