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22일 제이티비시(JTBC) 뉴스룸의 <내일>에서는 에이케이(AK) 소총을 개발한 미하일 칼라시니코프(1919~2013)를 불러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 기계공은 2년 전인 2013년 12월 23일에 사망했던 것이다.
연 25만명 살상하는 치명적 무기 AK-47
소련이 만든 치명적 무기로 연 25만 명을 죽인다는 이 돌격형 소총은 핵폭탄보다 더 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개발한 지 70년이 넘었지만 이 소총은 전 세계에 1억 정이 유통되었다. AK는 평균 가격 100~300달러로 스마트폰보다 싼 살상무기로 암시장에선 10달러에 거래되기도 했다.
AK의 성공 비결은 분해와 조립이 매우 간단하여 1시간이면 조작법을 습득할 수 있는 단순함이었다. 미국에서 개발된 M16 소총 역시 매우 단순한 구조였지만 AK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특전사 화기병으로 복무했던 나는 1977년 특수전 교육에서 ‘적성화기’를 배우면서 AK소총을 기본으로 익힐 수 있었다. 워낙 오래된 일이지만 분해할 때 부품이 한꺼번에 주르르 쏟아지곤 했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몇 발이었던가, 우리는 AK소총의 실탄 사격도 했다. 탄피가 용수철처럼 세차게 튀어나왔던 기억도 아련하다.
AK 개발자 칼라시니코프 사망일, 12월 23일
그리 고릿적 사람도 아니고 얼마 전에 사망한 인물인데도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에 대한 이력은 자료마다 상이하다. 러시아 알타이 지방에서 태어난 칼라시니코프를 <JTBC>에선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그의 아버지가 부농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에 앞서 부농에 대한 숙청이 이루어질 때 그의 부친은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JTBC>에선 그의 학력을 초등학교 졸업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중졸이라는 사람도 있고, 그가 공업 전문 학교에서 제대로 기계 제작을 배웠다는 말도 나온다.
최종학력이 어땠든 간에 그는 기계에 각별한 재능을 보였던 모양이다. 14살에 브라우닝 권총을 혼자서 수리하는 기염을 토했고 공업학교를 졸업 후 철도공으로 근무하면서도 틈틈이 취미로 총기를 분해 조립하곤 했다. 그는 1938년 소련군에 입대, 전차병으로 근무하면서 본격적인 기계 설계와 제작 능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칼라시니코프는 1941년 독소전쟁 때 전차장으로 참전했다가 중상을 입고 후송된 후 총기 설계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패주 당시 소대장이 독일군의 기관단총 MP40 같은 총기가 필요하다며 안타까워하자 거기에 대응할 만한 총기의 개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처음 만든 기관단총은 결함이 많아 실패했다. 이미 ‘따발총’이라고 불리는 PPSh-41이 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라시니코프의 총기 설계 재능을 인정한 소련군은 그를 조병창에 배치하여 총기 개발에 전념하게 하였다.
소련군의 돌격소총 AK-47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군은 전쟁 말기 독일군의 신무기인 자동소총 MP-44(STG44)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와 비슷한 신형 무기를 장차 소련군 주력 개인화기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이 총기에 붙은 STG는 ‘돌격소총’을 뜻하는 독일어 슈투름게베르(Sturmgewehr)의 줄임말로 히틀러가 직접 붙인 이름이었다.
돌격소총은 전투소총탄과 권총탄의 중간 정도 위력을 가지는 탄을 사용하는 자동소총이다. 기관단총보다 강력한 화력을 제공하면서 경기관총보다 가벼우며, 기존의 전투소총보다 전장이 짧으며 다량의 실탄을 휴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현재 대부분 국가들이 채택한 제식소총은 돌격소총이다.
1946년, 출시된 설계안 가운데 칼라시니코프가 설계한 소총이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아 소련군 제식 소총으로 채택되었다. 이 총기는 1947년 첫 배치를 시작하면서 AK-47(Avtomat+Kalashnikov+1947년)이라고 명명되었다.
이 공로로 칼라시니코프는 1949년 스탈린 훈장을 받았고 1951년 육군 상사로 전역했다. 전역 후에도 그는 설계관으로 일하며 AK-47의 개량형 소총 AKM, AK-47을 베이스로 한 RPK 분대지원화기, PK 다목적 기관총 등 소련군의 주력 총기들을 설계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그는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 2회에다 레닌 훈장까지 받았다. 1969년에는 육군 대령 계급이 수여되었고 1971년에는 대학을 다니지 못했으나 공학박사 학위가 수여되었다. 소련 붕괴 후에도 그는 민영화된 조병창의 주임 설계관으로 재직하였다.
1994년에는 75세 생일 축하 선물로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종신 육군 중장계급을 수여받았다. 2009년 11월에는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칼라시니코프에게 러시아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아들도 그의 뒤를 이었는데 빅터 칼라시니코프는 Bizon PP-19 기관단총을 개발해냈다.
소련에 돌격소총 AK-47이 있었다면 미국에는 유진 스토너(Eugene Stoner, 1922~1997)가 개발한 M16이 있다. 둘 다 소련·동구권과 서방세계를 대표하는 소총으로 각각 1억 정이 넘게 제작되어 팔렸다. 자본주의 미국의 유진 스토너는 큰돈을 벌었지만 특허를 인정하지 않는 소련의 제도 때문에 칼라시니코프는 소액의 연금으로 생활해야 했으며, 생활고 때문에 자기 이름을 붙인 보드카를 판매하기도 했다.
사망자들에 대한 책임, 말년에 참회 편지
이 동서 진영을 대표하는 자동소총의 개발자들은 1997년에 러시아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이 개발한 소총을 각각 평가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개발한 병기가 얼마나 많은 병사와 민간인을 살상한 것인지를 성찰하고 있었을까.
러시아 일간 <이즈베스티야>의 보도에 따르면 미하일 칼라시니코프는 사망하기 몇 달 전 키릴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에게 AK-47에 의한 사망자들에 대한 책임이 있는지를 묻는 참회의 편지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신문은 “키릴 총대주교는 칼라시니코프를 위로했고 그를 진정한 애국자로 평가했다.”고 전했다.
과거 칼라시니코프는 자신이 AK-47을 만든 것은 조국을 지키기 위한 것이며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입장을 반복해서 밝혔었다. 죽음에 임박해서야 그는 자신이 만든 총기가 초래한 숱한 죽음에 대한 책임 소재를 떠올린 것일까.
AK-47은 숱한 생명을 앗았지만 칼라시니코프는 천수를 누리고 2013년 12월 23일 자신의 거주지인 러시아 자치공화국 우드무르티야 수도 이제프스크 한 병원에서 숨졌다. 향년 94세. <러시아의 소리> 방송은 그의 장례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소비에트 전설의 무기 설계자,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위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AK-47 자동소총 일제사격으로 배웅했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