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살인마의 인권은 존중해서는 안 된다.”
영화 <짚의 방패’(藁の楯)>에는 희대의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기요마루가 등장한다. 힘없는 여자아이를 범행대상으로 삼아온 그는 어느 날, 일본 재계 거물인 니나가와의 손녀딸을 무참하게 죽인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니나가와는 자신이 가진 재력으로 신문사와 방송사를 움직여 기요마루를 죽이는 자에게 현상금 10억 엔을 준다는 TV 방송과 신문 광고를 전면 게재한다. 큐슈의 후쿠오카에서 은둔하다가 전국적인 광고로 인해 모두의 표적이 되어 생명의 위협을 느낀 기요마루는 아이러니하게 경찰의 보호를 받고자 자수하게 된다.
일본 경시청 수뇌부는 기요마루를 기소하여 법정에 세우기 위해 최정예 경호 요원 메카리와 시라이와를 파견하여 또 다른 두 명의 형사와 함께 기요마루를 후쿠오카에서 1,200km나 떨어져 있는 도쿄로 압송해오라는 임무를 부여한다.
하지만 현상금에 눈이 먼 시민들 (심지어 경찰까지도)의 습격으로 비행기와 기차를 이용하지 못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극비에 부쳐진 기요마루의 위치가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되는 상황에서 4인의 주인공들 내부에서도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법은 지켜져야 한다는 눈물겨운 직업정신을 가지고 있는 메카리와 시라이와조차도 극한의 상황에 다다르자 이런 쓰레기만도 못한 살인마를 보호하기 위해 내 목숨을 희생할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된다.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 하나 보호하려고 주인공들이 고군분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면서 ‘살인마조차도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가?’, ‘법은 정말로 비인간적인 범죄에 대해 정당한 처벌을 할 수 있는가?’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오히려 저런 범죄자는 법적인 과정을 생략하고 극도의 고통을 주어 피해자가 당한 대로 갚아주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처벌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강호순의 엽기적인 연쇄 살인 사건, 오원춘 토막살인 사건, 조두순의 여아 성폭행 사건, 고종석 나주 어린이 성폭행 사건과 이에 준하는 경악스러운 범죄들에 대해 대한민국의 법은 누가 보기에도 다소 미흡한 처벌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러한 솜방망이 판결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이렇게 목소리를 높인다.
저런 살인마의 인권은 존중해서는 안 된다. 극도의 고통을 주면서 죽여야 한다.
이러한 과거 ‘응보적 정의’에 대한 향수는 피해자의 자력구제(복수)를 금지하고 사법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처벌하는 오늘날의 법치제도에 대해 국민들이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누구도 범죄행위의 대가로 소중한 생명을 뺏는 건 부당하다라든지, 과도한 처벌은 범죄감소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형제 폐지조차 전 세계적 대세로 되어가는 21세기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응보적 정의’를 주장하는 것은 타당한가? 이러한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이제 사회는 법을 믿지 못한다
영화 <테이큰>, <아저씨>, <세븐 데이즈> 등 국내외를 막론한 액션 스릴러를 보면 범죄자를 엄벌해서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할 경찰, 사법 집단이 정의를 세우기는커녕 무능함과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법당국의 무책임에 대해 분노하고, 주인공의 사적인 복수로 인해 권선징악이라는 원초적 정의가 회복되는 순간 시청자들은 극도의 희열감을 느낀다.
물론 주인공은 복수를 하기 위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한 과정에서 불법구금, 불법감청, 인명 살상, 공공기물파손 등 수많은 불법범죄 행위를 자행했음에도 말이다. 그래도 그 정도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 불가피하게 발생한 비용으로 용인되고 주인공의 행위는 정당화된다. 적어도 원칙과 절차를 따지다가 피해자를 구할 시기를 놓치는 등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의 답답한 관료주의가 몸에 배어있는 영화 속 무능한 경찰, 사법 당국보다는 나으니까.
이와 같은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야 상관없다.’는 논리는 필자가 고3때 즐겨봤던 만화 <데스노트>에도 드러난다. 정의감이 넘치는 주인공 라이토는 법의 허점을 교묘히 빠져나오거나 법으로도 교화할 수 없는 극악 범죄자들을 사신이 준 데스노트(여기에 이름을 적힌 사람은 무조건 죽는 노트)로 처단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살인행위를 정당화한다. 라이토의 행동을 막기 위해 투입된 사설탐정 L은 라이토에게 반박한다.
법이 정의를 확립하고 범죄를 줄이는 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타인의 목숨을 앗아갈 권리가 너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에 나는 라이토의 편이었다. 어떤 처벌과 교육으로도 교화되지 않는 본성, 그 자체로서의 악을 가진 존재는 인권보장과 법적인 절차를 생략하고 거리낌 없이 사회에서 ’청소’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양형제도는 정말 정의를 바로 세우기에 부적합한가?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 시대를 거치면서 서구 세계는 전근대적인 처벌, 고문 제도에서 탈피하였다. 범죄에 따른 대가로서 ‘생명의 박탈’보다는 ‘신체의 구속’이라는 감금형을 선호하였고 인간을 교화의 대상으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세련된 양형제도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범죄에 따른 처벌제도가 약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피고의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불공평하게 적용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아직 원시적 형태의 응보적 정의에 따른 법이 존속되고 있는 중동과 인도 일부의 관습법에 대해 우리나라의 많은 국민들이 부러움을 표시한다. 범죄자를 광장에 꿇려놓고 주민들이 번갈아가면서 돌을 던져 죽이는 투석형이라던가, 살인자는 그가 살인을 저질렀던 방식 그대로 처형하고 강간범은 거세해 버리며 팔을 부러뜨린 자는 똑같이 팔을 부러뜨리는 방식들 말이다.
어쩌면 응보적 정의에 대한 향수는 인간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평등주의’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당한 만큼 똑같이 갚아줘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하여튼 현대의 사법제도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야만성을 억제하고 처벌보다는 범죄의 근본적인 예방과 교화를 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왔다. 또한, 법을 집행하는 인간의 판단에 대한 한계를 체감해왔기에 억울한 피해자를 구제하고자 번거로워 보일 수도 있는 여러 견제 장치를 고안해왔다.(삼심제, 묵비권, 무죄 추정의 원칙 등). 기본적인 틀은 성문법 체계이지만 판단 여지에 따른 재판관 개인의 재량권도 인정하여 복잡하고 다양한 상황에 필요한 법적 유연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법치불신에 대한 근본적 원인은 아마 ‘공감의 부족’일 것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처벌기준이 범죄의 정도에 비해 모자라다고 분노한다. 아마도 피해자의 절박한 관점에서 사건을 처리하려는 재판부의 진정성과 공감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들의 눈에는 재판관의 선고가 마치 수학자처럼 주어진 상황에 알맞은 공식을 이용하여 요소를 투입하는 지극히 기계적인 모습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더구나 사법부는 삼권분립을 이루고 있는 요체 중에서 유일하게 ‘국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그러한 정당성의 태생적인 결함 때문에 오늘날 민주사회에서 소수에 불과한 그들의 법적 판단이 과연 다수 국민의 이성과 정서를 제대로 반영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이다. 실제로도 그들은 건전한 다수 국민의 상식과 괴리되는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인간의 무엇을 앗아가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민주적 정당성도 결여되어 있고 가끔 ‘뻘짓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의 권한을 박탈하고 국민의 이름으로 범죄자에 대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처벌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법이 아무리 허점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최소한 21세기 인류가 갖춰야 할 이성과 명예, 합리적인 사리판단, 냉철한 Legal mind에 입각한 정교한 법치체계,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은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과 성선설에 기반을 둔 휴머니즘을 결코 버려서는 안 된다.
극악 범죄에 대해 국민의 손으로 직접 처단하는 제도가 부활한다면 경각심으로 인한 일시적인 범죄 감소 효과는 있겠지만, (물론 효과가 지속적이진 않을 것이다) 타인에게 ‘직접적인 물리력’을 동원하여 신체적 고통으로 되갚는 행위를 반복한다면 우리는 용서와 포용, 죄책감과 같은 인간성을 서서히 상실해 갈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본능을 추구하는 짐승의 그것으로 채워질 것이다.
양형을 엄하게 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범죄율 감소에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잔인한 형태의 ‘인과응보 식 형벌 시대’로 회귀하자는 것은 전혀 다른 성질의 문제이다. 또한, 법에 명시되어 있는 피고에 대한 최소한의 법적 권리는 결코 범죄자를 옹호하는 수단이 아니다. 만약에 있을 사법부의 오판을 대비하고 냉정한 이성에 입각하여 정해진 원칙과 절차에 의해 범죄자를 엄벌하는 ‘최소한의 질서’를 보호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영화 <짚의 방패>의 중반부쯤에 극비에 부쳐진 기요마루의 위치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시민들에게 중계되자, 동료인 칸바시 경사는 3년 전 음주운전 상습범의 뺑소니 살인으로 인해 아내를 잃은 주인공 메카리 경부보를 의심하게 된다.
메카리가 범죄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같은 살인범인 기요마루를 용서하지 못하여 그의 위치 정보를 대중에게 누설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울분을 가다듬고 잠시 후 냉정을 되찾은 메카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도 물론, 그 살인범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정말 몇 번이고 복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죽인다고 해서 이미 죽은 아내가 살아서 돌아오는가?
원문 : 낙서협동조합 BIG HIP / 필자 : 박성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