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짜장면집을 알게 된 것은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요리연구가 백종원의 이름을 딴 한 공중파의 요리 예능프로그램에서다. ‘돼지고기와 야채를 잘게 썰어 만든 유니[肉泥]짜장’으로 유명하다는 충북의 그 중국집은 군청 소재지인 영동읍이 아니라 황간면에 있었다.
황간의 중국집과 유니짜장면
이내 잊어버리고 만 그 중국집을 다시 기억하게 된 것은 조만간 거길 찾겠다는 동료 덕분이었다. 식구들과 함께 맛난 것을 찾아가는 여행을 즐기는 이였다. 그러나, 조금 멀지 않느냐고 했더니 동료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뇨, 황간은 여기서 50Km, 사오십 분이면 갈 수 있어요. 대구 가는 셈밖에 안 되지요.”
“아, 거기가 황간이었던가? 황간이라면, 노근리가 있는 데 아니우?”
“그럴걸요. 아이들과 언젠가 거기에 갔었던 기억도 있는데…….”
“그렇다면 나도 한번 가 봐야겠는걸. 겸사겸사 노근리도 들르고.”
그런데 정작 황간을 찾은 건 내가 먼저였다. 고등학교 입시일이었던 금요일에 선발고사 업무에서 놓여난 나는 연가를 냈고, 아내와 함께 경부고속도로를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그 중국집 앞은 상상했던 거와는 달리 한산했다. 주말이 아닌 평일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내엔 빈자리가 없었다.
우리는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 남녀와 같은 원탁에 앉아서 하나밖에 없는 메뉴 짜장면을 시켰다. 짜장면을 먹고 있는 남자에게 맛있냐고 물었더니 그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어디서 왔냐니까 마산에서 왔다고 했다. 아내가 입을 딱 벌렸다.
짜장면은 이내 나왔고 맛은 괜찮았다. 짜장면 맛이 어디 가겠는가. 좀 가늘다 싶은 면발도 좋았고, 잘게 간 돼지고기와 썬 야채도 감칠맛이 있었다.
짜장은 먹지 말아요, 짜요!
아내는 면만 건져 먹고 얌전하게 젓가락을 놓았다. 정말, 양념은 많이 짰다.
우리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잔 빼먹고 이내 중국집에서 나왔다. 소계리의 중국집에서 노근리까지는 2.4km쯤이었다. 한적한 도로를 달려 우리는 금방 노근리평화공원에 닿았다. 공원의 면적은 만만찮아 보였지만 찾는 이 없는 공원 주변은 썰렁하기만 했다.
텅 빈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우리는 평화기념관과 위령탑, 그리고 쌍굴다리를 둘러보았다. 노근리 학살은 65년 전에 미군이 무고한 피난민들을 살상한 전쟁 범죄다. 그러나 그 흔적은 당시 만행이 저질러진 쌍굴다리에 탄흔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다. 정작 학살의 피해자들은 죽었고,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사람도 몇 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1950. 7. 26∼7. 29.)
노근리 민간인 학살(No Gun Ri Massacre)은 한국전쟁 발발 한 달 만인 1950년 7월 26일부터 7월 29일까지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지역에서 벌어졌다. 개전 초기에 인민군과의 교전에서 패배한 이후 충격과 혼란에 빠져 후퇴를 거듭하고 있던 미 24사단 병력이 새로 도착한 1기갑사단에 영동 방어진지를 인계한 것은 7월 22일이었다.
거침없이 남진을 계속한 인민군에 밀려 미군 1기갑사단도 후퇴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7월 23일 정오, 영동읍 주곡리 마을 주민들에게 임계리로 피난하라는 소개명령을 내린다. 이틀 후, 이들은 다시 임계리에 모인 피난민 500∼600명을 남쪽으로 피난하도록 유도했다. 26일, 미군은 탱크로 도로를 차단하고 피난민들에게 철로를 따라 남하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날 정오께, 노근리 쌍굴다리 근처에서 미군은 피난민들의 짐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아무 이상이 없자, 미군들은 어디론가 무전을 친 뒤 사라졌다. 얼마 뒤 남쪽 하늘에 비행기 두 대가 나타나 갑자기 폭탄을 투하했다. 폭격과 기총소사는 20여 분간 계속됐다.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100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날 오후에 미군은 400∼500명의 피난민들을 다시 모아 100여m 떨어진 쌍굴다리로 밀어 넣었다. 사람들은 7월의 무더위 찜통 같은 굴속에서 생사를 오가야 했다. 미군은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고 물이라도 마시겠다고 밖으로 나간 사람은 모두 사살되었다.
가끔씩 미군은 굴속의 동정을 살폈고,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공포 속에 굴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밤이면 청장년들이 탈출을 감행하기도 했으나 총격에 사살되는 경우가 많았다. 탈출이 어렵게 되자 사람들은 시체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미군은 굴다리 앞에서 총을 난사하는 마지막 살육을 저지르고 패주했다. 굴속에 있던 피난민 가운데 절반이 그렇게 죽었다.
소대장은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총을 쏴라. 모두 쏴 죽여라.”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
이태 후, 전쟁이 끝났지만 사건은 묻혔다. 유족들은 서슬 푸른 독재정권 치하에 숨을 죽이고 살았다. 노근리 사건이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1999년 <AP통신>에서 이를 보도한 뒤부터였다. 이전에도 <한겨레>와 <말>지 등에서 이 사건을 보도했지만, AP의 보도 이후 미국의 유수 신문들이 머리기사로 이를 다루자 국내의 주류언론도 태도를 바꾸었던 것이다.
학살의 진상은 노근리에서 5살 아들과 2살배기 딸을 잃은 정은용(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사건 대책위원장)이라는 기록자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1960년부터 미군에 손해배상을 요구하기 시작하여 고희를 넘긴 1994년,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펴내어 노근리를 햇볕 속으로 불러냈다.
정은용, ‘노근리의 진실’을 불러내다
이 책이 나온 뒤, 오연호 기자(현 <오마이뉴스> 대표)의 취재로 <말>지 7월호에 ‘6·25 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00여 명 학살사건’이라는 특집 기사가 실리게 된 것이다. 이후 AP통신 최상훈 기자 등의 탐사보도를 통해 사건의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 기자와 취재팀은 이 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갖가지 증거와 증언이 나오자 한국과 미국 정부도 노근리 사건의 진상 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은 객관적 사실 자체를 부인하지 못하면서도 이 사건을 ‘우발적 사고’로 몰아가려 했다. 미국 쪽 조사단의 조사가 시작되면서 미군은 발포 병사들의 증언 여하에 따라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함으로써 증언에 참여하고자 한 병사들의 입을 막아 버렸다.
결국 2001년 1월, 한미 양국은 조사결과를 동시에 발표하면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 결론지었다. 미국 정부는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이라는 실체를 인정하고, 민간인 희생에 대한 깊은 유감을 표명하였다. 생존자들은 사망, 부상 또는 실종 인원을 총 248명이라 신고하였으나 조사단이 추정한 숫자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
피해자들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 2004년에는 사건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법안인 ‘노근리사건 특별법’이 제정되는 등 비극적 희생에 대한 신원(伸冤)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앞서 2003년 6월에는 사건의 현장인 경부선 노근리 쌍굴다리가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북도에서도 노근리 학살 사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쌍굴다리 앞 옛 노송초등학교 터를 포함한 부지에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 사건 관련 기록·문서·사진·증언 등을 담은 평화기념관 등을 건립하여 2011년 10월 노근리평화공원의 문을 열었다.
진실, 불평등 한미관계에 막히다
미국은 우리에게 ‘분단’을 포함하긴 했지만 해방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 군대는 동족 간의 끔찍한 한국전쟁에 참전해 싸웠다. 우방(友邦)이었던 미국이 ‘혈맹(血盟)’이라 불리게 된 사연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희생이 기려지듯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도 물어야 마땅하다.
명백한 전쟁범죄, 학살로 밝혀졌지만 그 고의성이 입증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근리의 비극은 특별법과 노근리평화공원 조성으로 얼버무려졌다. 한미 양국이 수혜·시혜 관계로 규정되는 이 불평등 구조 속에서 진실이 햇볕 속으로 드러나는데 무려 반세기 이상이 시간이 필요했다.
위령탑 왼쪽 도로 아래에 학살의 현장인 쌍굴다리가 있다. 이 도로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 경부선 철도 개통과 함께 노근리와 영동읍 주곡리를 연결하기 위해 개근천 위에 세워진 철도 교각이다.
여전히 도로로 쓰이고 있는 쌍굴다리의 양쪽 콘크리트 위에는 탄환 자국을 하얀 페인트로 표시해 두었다. 그것은 마치 천연두를 앓고 나은 사람의 마마자국처럼 흉하고 슬펐다. 도로 위에서 쌍굴다리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잠깐 씁쓸해졌다.
노근리의 비극이 결국 봉합된 것처럼 그 피로 맹서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한미 양국 관계는 여전히 평등하지 못하다. 올봄에 경기 오산 미군기지로 살아 있는 탄저균이 배달된 사건과 관련해 한·미 조사단이 발표한 조사 결과도 석연찮기는 마찬가지다.
미군은 사건 발생 직후 탄저균 실험이 처음이라고 했으나 탄저균 샘플은 2009년부터 서울 용산기지에 15차례나 더 배달된 것으로 드러나 미군이 거짓말을 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는 우리 정부가 이 실험에 대해 몰랐다면 주권국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알고도 묵인했다면 정부의 자격이 없다는 비판을 받게 된 배경이다.
조사단의 한국 쪽 단장이 오산 사건과 관련해 ‘주한미군이 관련 규정과 절차를 준수했다’고 미국 쪽을 옹호했다고 하니, 갑을 관계는 여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우리가 이 실험의 필요성과 안전성에 대해 확신하고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왔을 때까지 새로운 방문자는 보이지 않았다. 쌍굴다리 앞 도로로 간간이 자동차들이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노근리의 비극은 65년 전의 사건으로 바야흐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어 가고 있는 것이다.
평화공원을 빠져나와 황간 나들목으로 들어갈 때였다. 아내가 심드렁하게 물었고 나 역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지금도 그 중국집에는 짜장면을 먹으러 온 사람들이 이어지겠지?”
“아무렴, 이제 먹고살 만한 차원은 넘었고, 맛집을 찾아다닐 만큼의 여유는 찾은 거겠지…….”
원문 :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