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은 ‘세금’과 ‘요금’의 경계나 구분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고지서를 받아서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은 모두 ‘세금’이다. 그래서 내가 쓴 공공서비스의 대가인 각종 요금도 구분 없이 ‘전기세’, ‘수도세’, ‘오물세’ 따위로 부르는 걸 서슴지 않는다.
‘세금’도, ‘요금’도 아니고 ‘기부 성금’이다
국세청이 세금에 대한 상식을 알아보기 위해 설문조사를 해 보니 ‘전기요금’을 세금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응답자의 4분의 1이나 됐다는 보도가 그 증거다. 서민들로선 납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돈이라는 점에서 요금도 세금과 다르지 않은 걸로 여기는 것이다.
어제 적십자사에서 발행한 ‘적십자 회비’ 납부를 위한 지로 통지서를 받았다. 이름과 주소가 선명히 인쇄된 용지에 회비가 ‘10,000원’이라고 찍혀 있었다. 지금까지 매년 회비를 내 왔고 연말 정산 때 세액공제 혜택을 받아왔으니 회비 납부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통지서를 치우려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그걸 천천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이건 세금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 무슨 준조세의 성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나는 아무 의심 없이 지금껏 회비를 내어 온 거지? 글쎄, 구체적이진 않더라도 적십자사가 어떤 일을 하는가를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십자사는 국내외에서 재난구호 활동을 벌이고 이산가족 찾기 사업 등 남북한 사이에서 인도주의적 교류를 주선하고 혈액사업 등을 편다. 이러한 적십자사의 인도주의 활동을 알고 있기에 나는 지금껏 별 망설임 없이 회비를 납부해 온 것이다.
적십자사는 하는 일은 공공기관에 가깝지만, 공기업이 아닌 비영리 특수법인으로, 전 세계적 국제기구인 국제적십자사연맹의 일원이다. 대한적십자사는 1905년 고종 황제의 칙령으로 ‘대한적십자사 규칙’을 제정하여 반포함으로써 태어났다.
하는 일에 공공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십자사가 국민들에게 회비 납부의 의무를 부과할 수는 없다. 따라서 회비를 납부해 달라는 지로통지서가 각 세대에 배부되어도 회비를 반드시 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로통지서 뒷면에 조그맣게 “적십자 회비는 자율적으로 참여하시는 성금입니다.”라 씌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보통 이를 마치 세금이나 요금처럼 받아들여 납부하곤 한다. 만약 적십자 회비가 ‘내지 않아도 되는 성금’이란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면 납부율이 큰 폭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순하기 순한 국민이다. 각 세대에 부과해서 한 해에 거두어지는 적십자 회비 수입은 거의 500억 원대에 이르고 2007년부터 7년 연속 목표액을 넘겼다니 말이다.
회비 납부 ‘법적 의무’는 없다
물론 적십자사의 사업비는 적십자사회비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1년에 한 차례만 참여하는 회비 말고도 매월 정기 후원금을 내는 이들이 2014년 기준으로 약 24만 명쯤 된다고 한다. 이들에 의해 조성된 후원금은 140억 원이 넘는다.
모금이 이루어지기까지 드는 관리비용도 만만치 않다. 지로용지 제작과 발송, 모금 업무에 참여하는 사람(통장, 반장 등)에게 지급되는 수당으로 수년 동안 수십억이 소요되어 왔기 때문이다. 자발적 성금이라 강변하지만, 적십자 회비가 가히 ‘준조세’가 아니냐는 비아냥거림을 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적십자 회비를 내야 하는 납부의 법적 의무가 없다는 걸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도 있었다. 정부 고위직에 임명된 인사들의 청문회에서 더러는 ‘적십자 회비’ 미납 사실이 확인되면서 곤욕을 치르는 일이 좀 많았는가 말이다.
정동영 후보와 정운찬 전 총리가 각각 대선 무렵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회비 미납 때문에 논란이 있었고, 보건복지부의 유시민, 문형표 장관 역시 적십자 회비 미납으로 입길에 올랐다. 가까이는 지난해에 김성주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5년 동안 회비를 납부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 자격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대선 후보와 서울대 총장을 지낸 국무총리는 물론이고 보건복지 분야 고위 공직인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도 회비를 내지 않았다. 회비 미납 때문에 더 엄중한 추궁을 받은 이는 김성주 대한적십자사 총재였다.
그는 정작 국민으로부터 적십자 회비를 징수하는 주체인 대한적십자사의 수장이 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서민들이 조세처럼 여겨 빼먹지 않고 납부했던 적십자 회비가 내도 그만 내지 않아도 그만인 성금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해마다 국정감사에서 적십자사가 방만한 경영을 지적받는 이유는 그 재원이 전적으로 국민들의 성금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 조직의 수장으로 부름 받은 기업인이 여러 해 회비를 내지 않은 사실이 드러난 것도 자발적이지만은 않은 성금을 낸 국민들의 불신을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로통지서에는 ‘나눔이 희망’이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적십자 회비를 납부하면 소득 금액의 100% 범위 안에서 ‘세액공제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또 홍보대사로 영화배우 송일국을 내세우고, 지난해 회비를 사용한 사업을 소개하며, 모든 사업의 활동과 결과를 법률에 따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회비 내는 시민들 덕에 공공성 유지된다
그러고 보면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불구하고 적십자 회비를 꼬박꼬박 내는 서민들은 꼼짝없이 호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림살이의 규모와 관계없이 이들이 굳이 외면하지 못하고 내는 회비 덕분에 결국은 적십자사가 비영리 법인으로 공공성을 지켜올 수 있었음은 역설적이다. 조직 운영은 말할 것도 없고 성금의 쓰임이 보다 투명해져야 하고 공공성을 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마다 연말이면 공무원들은 이런저런 성금에 참여할 것을 종용받는다. 얼마 전에 학교에서 이루어진 국군장병위문금 모금에 나는 참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성금을 낸 사람들의 선의가 합당한 지출로 이어지는지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훈처가 해마다 공무원과 정부 산하기관 임직원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이 위문금은 모금액도 만만찮아서 작년에는 55억 원이 넘게 걷혔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이 거액의 위문금 사용내역은 공개되지 않는다. 최근 보훈처에서 청와대 경호실에 규정의 26배를 초과하는 2억여 원의 위문금을 지급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불투명한 지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자발적 참여로 진행된 학교와 달리 일반 관공서에서는 모금이 여전히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 반강제적 모금이 불투명한 지출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니 공무원노조 등의 반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금이란 그것을 기탁한 사람의 선의에서 비롯되지만, 그 선의가 온전히 결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투명한 집행과 운영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러나 적지 않은 성금이 사용내역이 공개되지 않은 상태로 불합리하게 집행되고 있어서 모금과 그 주도 기관에 대한 불신이 가시지 않는 것이다.
법률에 따라 투명하게 공개하고 국정감사까지 받고 있지만, 여전히 적십자 회비에 뜨악한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도 비슷하다. 재난 구호와 인도주의적 사업만으로도 마땅히 국민들의 기림을 받아야 하는 적십자사가 이런 국민들의 불신과 의심을 넘어서 거듭나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적십자 회비를 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지로로 금융기관이나 인터넷을 이용하거나 인터넷 뱅킹 등으로 가상계좌에 입금할 수 있고 ARS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나는 지로통지서에서 안내하고 있는 대로 신용카드 포인트로 회비를 냈다. 불신과 미심쩍음을 넘어 적십자사가 본래의 존재 의의로 시민들에게 다가오기를, 그리하여 시민들이 흔쾌히 지갑을 열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