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년’을 쓰지 말자는 주장에 대한 논쟁에 의도치 않게 휘말린 김에 평소 고민하던 문제에 대해 좀 끄적여보려고 한다. 어떤 표현이 남에게 피해를 준다고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제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성격이 다른 문제지만 끌고 들어온 분이 계시기에 메갈리아에 대해서도 몇 자 적어야겠다.
1. 어떤 표현이 ‘피해’를 주는가? – 개연성과 상호주관성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어떤 표현이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 선험적이고 절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수단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아직 당사자들의 주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선험적으로 논증할 수 없는 상처는 상처가 아니다’라는 식의 접근은 현실의 인간과는 전혀 괴리된, 누구도 준수하지 않을 공허한 당위적 선언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반대편으로 달려가, 한 사람이라도 상처를 받는다면 무조건 그 표현은 금지해야 한다는 극단적 상대주의로 돌진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는 개연성과 상호주관성이라는, 논리적으로 보다 모호하지만, 현실적으로 훨씬 합리적인 기준이 있다. 모든 표현은 사람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지기에, ‘누구나 상처를 받을 만한 표현’은 애초에 없다.
세상에는 무슨 말을 들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강철 같은 멘탈의 소유자들도 많다. 그러나 듣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상처를 받을 개연성이 높은 표현들은 있고, 문제 제기가 반복될 때에 우리는 그런 표현들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가령 ‘너 그렇게 살쪄서 시집은 가겠냐’는 말을 들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모욕감과 수치심을 호소한다면, 나아가 그 상황을 상상하고 추체험해본 사람들 다수가 ‘그렇게 느낄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이유는 따져봐야겠지만 일단 그 표현이 상처를 줄 개연성이 높다고 인지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같은 식으로, 그들이 호소하는 상처가 크면 클수록 그 표현이 초래할 결과도 중대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을 입 밖에 내고자 한다면, 그런 결과를 감수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필요할 것이다.
2. 어떤 표현이 제재되어야 하는가? – 권리의 침해
‘상처를 줄 개연성이 높은 표현’이라는 말이 ‘금지하고 처벌해야 하는 표현’과 같은 것은 아니다. <만들어진 신>이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든 리처드 도킨스를 법정에 세울 수는 없다. 피해는 ‘사회가 보장해야 할 권리’라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를 침해한 경우에나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에게 무신론을 강요하지 않기로 하고 ‘기독교를 믿을 권리’를 보장할 수는 있지만 ‘기독교에 대한 조롱을 듣지 않을 권리’를 보장할 수는 없다.
‘병신년’의 경우는 어떤가? 우선, 장애인 단체들은 오랫동안 ‘병신’이라는 말을 욕으로 쓰지 말 것을 요청해왔으며, 많은 장애인이나 그 주변인들이 ‘병신’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현상 자체에서 심각한 상처를 받는다고 호소해왔다. ‘병신년’이라는 말이 2016년 내내 운동사회에 돌게 될 때 발생할 상처의 양과 깊이는 그야말로 보통이 아닐 것이다.
이것을 피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사회가 보장해야 할 어떤 권리가 침해되었는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완전히 동등하며, 누구에게나 남보다 열등한 존재로 격하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병신년’이라는 말은 ‘병신’, 그러니까 장애인은 열등하다는 전제를 빼면 욕으로서 성립되지 않는다.
혹자는 여기서 ‘병신’이라는 말이 원래 어원과 충분히 멀어져서 사실상 별개의 단어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병신’은 여전히 ‘장애’와 연동되어 쓰인다. 심지어 ‘장애인’이라는 말조차 ‘병신’과 똑같은 의미로 ‘병신’과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의식적으로 장애를 떠올리지 않고 ‘병신’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에도, ‘어리석음’ ‘비정상’ ‘기형성’, 요컨대 ‘정상적인 인간으로서 수행하지 못함’을 중심으로 뭉친 여러 기의들이 장애와 얼마나 긴밀하게 엮여 있는지를 의식적으로 외면하지 않고서야 그것이 ‘별개의 단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병신’은 본질적으로 장애 그 자체, 또는 장애인이 가진 특질들이 누군가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비하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전제 위에서 성립하며 쓰일 때마다 그 전제를 환기한다. ‘병신’이 욕으로 쓰인다는 사실 자체가 장애인이 동등한 인간이며 비장애인처럼 똑똑하게/유능하게/우아하게/빠르게 움직이고 수행할 수 없다고 해서 인간으로서 열등한 취급을 받을 이유는 없다는 명제와 양립 불가능하다.
3. 어떻게 제재되어야 하는가? – 사법처리의 한계와 사회적 압력
일부 국가에서는 극심한 혐오발언으로 규정할 수 있는 표현을 형사 처벌할 수 있는 법을 가지고 있다. 언어적 성희롱 역시 법적, 법 외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규정들이 확산되는 추세다. 내 생각에 이런 식의 제재는 (1) 피해가 예상 가능하고 (2) 예상할 수 있는 피해의 정도가 심할 때에야 타당하고 또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아무도 상처를 줄 수 있다고 예상할 수 없었던 행동이나 또는 개별적인 사례에서 예상할 수 있었더라도 일반적으로 예상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행동을 처벌할 수는 없다. 가령 어떤 사람이 ‘차 조심해!’라는 말 때문에 교통사고로 인한 트라우마가 재발하여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고 해도, 일반적으로 ‘차 조심해!’라는 말이 그런 효과를 불러일으키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고통에 합리적 이유가 있음과 별개로 그 말을 한 사람을 처벌할 수는 없다.
그리고 예를 들어 ‘년’이 ‘놈’보다 훨씬 강한 비하의 뉘앙스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 차별적인 함의가 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년’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을 모두 처벌하는 것은 무척이나 과도한 처사일 것이다.
(2)의 이유에서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차별, 비하, 혐오의 발언들이 이 사회에는 무척 많다. 내 생각에는 ‘병신년’도 이 정도에 들어간다. 법보다는 강도가 약한 사규나 내규 등의 명문화된 규정을 통해 이것들을 제재하는 방안도 있겠지만, 이것 역시 보다 약한 처벌에 속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더구나 일상에 속하는 언어들을 이런 식으로 규율하려면 조만간 모든 법정이나 징계위원회는 잘못된 말에 대한 처벌 요청들에 파묻혀 마비되고 말 것이다. 내 생각에 표현을 제약하는 보다 일반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은 사회적 압력이다. 여기에는 대놓고 비난하는 강한 방식부터 단순히 정색을 하고 동조하지 않음으로써 이의를 표시하는 점잖은 방법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일상 속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개별적인 사건의 당사자를 처벌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유기적이다.
‘병신년이라는 말을 쓰지 않겠습니다’라는 인증샷을 찍는 캠페인도 이런 사회적 압력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캠페인은 아무도 공격하지 않으면서 ‘병신년’이라는 표현의 문제성을 알린다는 점에서 뛰어난 효과가 있지만, 사실 수많은 장애인들이 ‘병신’이라는 말이 욕으로 쓰이는 데 대해 호소하는 상처를 생각하면 더 강한 방식이 등장하더라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썩 효과적이지 않을 수는 있지만.
4. 이 모든 것의 전제는 무엇인가? – 메갈리아를 모방하려는가
지금까지 모든 논의의 전제는, 구성원들끼리 공존을 도모하는 공동체의 존재다. 공동체 전체적으로 합리적인 권리의 일람이 공유되고 있고,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실효성 있게 개입할 힘이 있으며, 피해를 입은 자들이 발화할 수 있고, 듣는 이들은 기꺼이 경청하고 추체험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공동체. 이러한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가 결국은 이 글의 주제이다.
나는 이 사회가 그러한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야 하고, 특히 사회운동은 사회의 다른 영역들 이상으로 이러한 속성을 더욱 완숙하게 갖추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운동은 결국 더 나은 질서,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단계에서도 이미,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장애인들과 공존해야 한다는 것 – 단순히 그들을 추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을 모욕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배제하지 않고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존중하고 모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 – 은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메갈리아 앞에서는 앞서 말한 모든 표현의 거름망이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메갈리아는 그 태생부터가 본질적으로 ‘한국 남성에 맞선 여성들의 연대’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메갈리아에서 이것은 거의 존재론적인 명제이다. ‘갓치’들은 ‘한남충’들과 연대하여 공동체를 꾸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을 ‘거세’하고 ‘번식 탈락’ 시키고 ‘갓양남’이나 ‘탈치남’을 만나 ‘한남충’과 엮이지 않아도 되는 삶으로 떠나고 싶어한다. 그렇기에 ‘한남충’을 대상으로 한 온갖 욕설과 비난이 가능한 것이다.
그들과의 공존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기에. 메갈리아가 ‘메갈리아’라는 공동체 ‘내부’의 구성원들을 대우하는 방식, 그러니까 가령 게이나 트랜스 혐오는 되거나 안 되거나 아무튼 자정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과 대조해보면 이 사실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메갈리아는 (정말로 남성들을 다 거세시켜버리고 여성들만의 지구를 만들지 않는 한) 새로운 질서의 담지자가 될 수 없다. 메갈리아는 그저 성별주의의 바다에서 외롭게 투쟁하는 한 척의 배이고, 한국 최초의 분리주의/급진주의 페미니스트 그룹이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고, 그래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메갈리아의 비판적 지지자들은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을 중요하게 보기에 메갈리아를 지지한다. 그러나 대안사회를 건설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근본적인 한계는 명확하게 있다. 누구도 메갈리아를 새로운 시대를 건설할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다.
메갈리아는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데 나는 하면 안 되는 게 억울해서 대안사회를 건설할, 또는 최소한 지금 사회의 구성원들과 공존할 의지를 버리고 싶다면, 그걸 말릴 힘은 나에게 없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사회주의든 사민주의든 아나키즘이든, 어떤 포괄적인 변혁의 전망도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는 점은 명확히 말해두고 싶다.
원문: 류한수진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