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초, 희망의 시간
3억 도 이상, 300초 이상. 이 초현실적인 숫자는 한국의 핵융합로, KSTAR가 목표로 하고 있는 숫자다. 저 환경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엄청난 에너지를 위해서, 궁극적으로 그로부터 핵융합 발전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다.
고체, 액체, 기체. 모든 물질은 으레 이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고 여겨지지만, 사실은 한 가지 형태가 더 있다. ‘플라즈마’라고 불리는, 천 단위를 넘어가는 아주 높은 온도에서 비로소 볼 수 있는 상태. 물질이 이온이나 전자까지 분리되어 가스 상태로 존재하는, 그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상태다.
그리고 억 단위에 달하는 엄청난 온도에서 플라즈마는 핵 사이의 반응을 통해 핵융합을 일으키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한다. 대표적으로 1억 도 이상, 아주 높은 온도에서 중수소와 삼중수소 플라즈마는 수소 핵끼리 반응하여 헬륨과 중성자를 생성하는 핵융합 반응을 일으킨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플라즈마 자체의 제어가 어렵다는 것, 그리고 억 단위의 온도 하에서 그 제어가 더욱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이 난제를 극복하고 3억 도 이상의 플라즈마를 300초 이상 유지한다. 이것이 KSTAR의 목표였다.
2012년 12월, KSTAR는 이 목표를 위한 또 하나의 장대한 걸음을 내딛었다. 이를 사람들은 “장시간 운전을 위한 첫 발”이라고 표현한다. H-모드라 불리는 고성능 운전조건에서 플라즈마를 17초간 유지한 것이다. H-모드란 일정 출력 이상의 가열장치를 작동시키며 플라즈마를 D자형으로 제어하여, 플라즈마의 밀도와 온도가 2배씩 증가되는 상태. 말하자면 플라즈마의 성능을 한단계 높이는 작업인 셈이다. 2010년 처음으로 H-모드를 달성한 데 이어, 2012년의 마지막 달에는 이 상태를 무려 17초간 유지함으로써 핵융합 발전의 상용화 가능성에 다시금 청신호를 켰다.
17초, 인고의 시간
마라톤. 무려 42.195km라는 초장거리를 달리는 육상 종목으로, 먼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에 벌어졌던 마라톤 전투에서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약 40km의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렸던 병사의 일화를 기원으로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엄청난 거리를 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무려 2시간 이상. 그야말로 경기 한 번 한 번이 전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올림픽의 꽃이란 별명에 더할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종목이라 하겠다.
단순히 2시간을 달리는 것이라면 보통 사람도 충분한 훈련을 거친다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 제한 없이 42.195km를 달리는 것도, 그보다 힘들기는 하겠지만 이 또한 불가능이라 할 것까진 없을 것이다. 실제로 선수가 아닌 일반인이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하는 경우가 그리 드문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마라톤 선수들이 정말 굉장한 것은, 그들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42.195km를 달리는 것과, 2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이 경주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 코스의 길이와 시간 기록 모두 다른 육상 경기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숫자이기에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평균적으로 100m를 17초대에 주파해야 가능한 기록이다.
2011년 케냐의 패트릭 마카우가 기록한 2시간 3분 38초의 세계기록은 100m를 평균 17.58초만에 달려야만 가능한 기록. 운동을 게을리 한 엔간한 성인에게는 전력질주를 해야 닿을 수 있는 기록이다. 보통 성인의 100m 전력질주와 맞먹는 속도로, 그 400배를 달려야 한 번의 레이스를 마칠 수 있다.
이제 마라톤 선수들에게 남은 것은 2시간의 벽. 100m를 평균 17.06초만에 달려야 넘을 수 있는 벽이다. 인간의 생리적 기능을 고려할 때 불가능한 기록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지만, 과연 이 벽이 언제 깨질 것인지, 불가능해 보이는 17초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지는 현재로서는 아무도 모른다.
17초, 신속의 시간
그건 실로 ‘신속’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대한민국의 중추이자 정부의 상징 – 청와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도리는 없다. 다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이 아니라, 그 일 자체일 따름이다.
이동흡부터 시작된 잇따른 인사 참사로 인해 정계에는 청와대가 사과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팽배했다. 인사의 계속된 실패는 박근혜 정부라는 시스템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불통’은 박근혜를 상징하는 단어로 자리잡았으며 지지도는 급전직하했다. 모든 상황이 청와대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 드디어 청와대는 용단을 내렸다. 그것은 사과의 한 혁명이었다. 한-미 FTA 비준안을 3분만에 통과시키며 의정사의 새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 신속이라 이름붙여 마땅할 전격전이 청와대에서 일어났다. 허태열 비서실장의 이름으로 쓰여진 사과문을 김행 대변인이 대독했다. 그가 사과문을 읽기 시작하며, 초시계 소리는 F1 레이싱의 추격전처럼 째깍대며 말[言]을 뒤쫓기 시작했다.
“새 정부 인사와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 인사위원장으로서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인사 검증 체계를 강화해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17초.
사과문을 모두 읽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7초에 불과했다.
단 두 문장으로 구성된 사과문을 단 17초만에 읽으며 사과는 마무리되었다. 특별한 이야기는 덧붙여지지 않았다. 청와대의 17초는 정국을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17초 동안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
17초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어딘가에서는 핵융합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쾌거가 되기도 하고, 마라톤 선수가 넘어야 할 거대한 벽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역사에 기록되어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 17초는 한 나라를 지탱하는 시스템이 엉망으로 돌아간 데 대해 책임자의 사과를 들을 수 있었던 시간으로 기록되었다.
17초 동안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 때로는 희망이, 때로는 인고가 녹아있는 시간. 청와대는 또 한 번, 불가능이란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다. 17초, 세상은 17초라는 짧은 시간동안에도 끝없이 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