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일 때문에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미국 동부에 전시된 전함을 모두 구경해 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유감스럽게도 예산과 시간 때문에 실패했지만, 어쨌건 동부에 전시된 전함 여섯 척 중 네 척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텍사스 주의 전함 텍사스(BB-35) 앨라배마 주의 전함 앨라배마(BB-60)를 구경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이 이야기는 내가 네 번째로 구경한 전함 노스캐롤라이나(BB-55)에 관한 이야기이다.
노스캐롤라이나급 네임쉽인 노스캐롤라이나가 전시된 윌밍턴에 도착한 것은 일요일 아침이었다. 전날 오후까지 일하고 밤늦게 출발했는지라 정신이 좀 몽롱한 상태였다. 유감스럽게도 하늘은 조금 흐리고 윌밍턴 버스 터미널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다운타운까지 갔다. 버스에서 내려 강변까지 걸어가니 전함이 눈에 들어왔다. 전함 노스캐롤라이나는 케이프 피어 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잠시 강변을 거닐다가 교통비를 아낄 겸 눈앞에 보이는 다리를 걸어서 건너가기로 했다. 내가 선택한 길은 앤드류 잭슨 고속도로였다. 당연히 인도는 없었다. 차도 구석에 딱 붙어 걸었는데 도개교인 케이프 피어 메모리얼 다리를 건너갈 즈음에는 다리 한가운데에 처박힌 이름 모를 새의 주검 때문에 더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터벅터벅 걸어서 전함 노스캐롤라이나 기념공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가 발생했다. 식사하려고 했는데 노스캐롤라이나 기념 공원에는 과자 자판기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침과 점심을 못 먹었는지라 도리토스 세 봉지를 연달아 까먹었다. 여기에 콜라 한 병을 털어 넣고야 비로소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콜라 덕분에 제정신을 찾은 뒤 원래 목적대로 전함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로 구경했던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매사추세츠(BB-59)와 달리 노스캐롤라이나는 관람객들의 이동 동선을 잘 짜놓았고 전함 내부의 조명도 밝아서 구경하는 것이 매우 편했다. 그때까지 구경한 네 척의 전함 중 전시 상태가 가장 훌륭했다! 전함 구경을 마치고 나니 오전의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념품점으로 들어갔다. 전 세계의 모든 박물관 기념품점이 그렇듯 박물관 안에는 Made in China로 가득했다. 이것이야말로 관광객에게 번뇌를 안겨주는 요인이 아닐 수 없었다. 뭔가 좀 쓸만한 기념품이 없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중 뭔가 이상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Ghost on the Battleship North Carolina』
조잡해 보이는 표지를 보니 호기심이 동했다. 계산대의 직원에게 물었다.
도대체 유령이란 게 무슨 소리에요?
음… 이 책을 쓴 대니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아. 마침 저기 있네요. 대니~
전함 노스캐롤라이나 마크가 붙은 야구모자를 쓴 대니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음. 뭐랄까. 얼핏 보면 낮술 한잔 얼큰하게 걸치신 듯하면서도 멀쩡해 보이는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호기심을 일으키는 인상이었다.
안녕하세요, 대니. 도대체 이 유령이라는 게 뭔가요?
Ghost가 Ghost지. 저 배에는 진짜 유령이 있어. 내가 직접 봤어.
내 영어가 짧아 모두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니가 들려준 유령 이야기는 대략 이러했다. 거의 20년 전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 밤이었다. 그때는 여름철 관람 시간이 지금보다 더 길었다고 한다. 대니는 관람 시간이 끝난 뒤 정리를 하고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일과대로 기념품점의 문을 잠근 뒤 노스캐롤라이나의 전기를 끄기 위해 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전기를 끄기 위해 스위치를 내리려는 순간 오싹한 기운을 느꼈다고 한다. 그 무더운 여름밤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한기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대니의 어깨를 툭 쳤고 겁에 질린 대니는 뒤를 돌아봤다. 대니가 들어온 문 앞에 금발의 청년이 서 있었다. 대니가 손전등을 비추는 순간 그 청년은 말없이 대니를 쳐다봤다. 금발 청년은 아무 말 없이 대니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 순간 대니는 겁에 질려 얼어붙었다. 금발 청년은 대니가 들어온 문으로 사라졌고 대니는 그제야 반대쪽 문으로 정신없이 도망쳤다. 그리고는 자동차에 올라타자마자 시동을 걸고 정신없이 달렸다. 대니는 이야기를 마친 뒤 책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난 유령을 한두 번 마주친 게 아니야. 이 책에 내 경험담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지.
솔직히 모두 알아듣진 못했지만, 은근히 호기심을 동하게 했다.
내 이야기가 믿기지 않나? 내 책을 한번 읽어 봐. 12달러 95센트인데, 현찰로 10달러를 주면 내 서명도 해주지.
나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지갑에서 10달러짜리 한 장을 꺼냈다. 대니는 돈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고는 책 표지에 서명을 해서 나에게 줬다.
만나서 반가웠네. 이제 정리할 시간이 다 돼가는군. 그럼 즐거운 여행 되라고.
대니는 돈을 주머니에 넣고는 전함 노스캐롤라이나로 갔다. 내 지갑에서는 10달러가 사라지고 내 손에는 괴서 한 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