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의 원본 작성일이 작년 12월이어서 약간 뒷북의 감이 있어 수정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났다는 느낌을 받으실 수 있으니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난해 12월 14일 코네티컷주의 샌디 훅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으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충격을 받았고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 글은 게임과 폭력의 상관관계보다 이번 총기 난사 사건과 같은 끔찍한 비극을 통해 자익을 챙기려는 대중매체의 도덕적, 윤리적으로 패악한 사고방식을 규탄하고 짚어보는 데 있습니다.
미국 전문가 “총기 난사를 자극 보도하지 말라. 그것은 유사 모방 범죄를 낳을 뿐이다.”
총기 난사 사건 직후 (주로 CNN과 같은 미국의) 대중매체들은 어김없이 사건의 정황과 살인범의 인적사항을 비롯한 모든 세부사항까지 낱낱이 설명하기 위해 항시 보도에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비극적인 사건의 정치화는 물론 허위적 또는 무관한 영상/음성자료를 활용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합니다. 이에 더하여 이번 사건에서 대중매체가 본질적으로 공범 역할을 했다는 논란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아래 영상은 2009년 3월 독일의 한 학교에서 있었던 총기 난사 사건과 그 사건을 다룬 미디어를 비판하는 내용의 BBC의 뉴스 리뷰 프로그램의 한 장면입니다. 번역은 1분 30초부터 동영상 끝까지입니다.
파크 디츠(Park Dietz) 박사 : 지난 20년간 대량 살인마들이 나타났을 때마다 제가 거듭 CNN을 비롯한 다른 대중매체들에 말한 것이 있습니다. 만약 대량 학살의 증가를 막고 싶다면 요란한 사이렌 소리로 보도를 시작하지 마십시오. 범인의 사진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지 마십시오. 사건을 주제로 24시간 항시 보도하지 마십시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피해 사망자 수가 헤드라인으로 장식되는 일을 막으십시오. 살인마를 마치 반영웅(Anti-hero)처럼 표현하는 것을 피하십시오. 반드시 사건에 의해 직접적 영향을 받은 지역 사회에 한해 보도를 제한하고 나머지 사회에게는 최대한 지루한 이야기가 되게 만드십시오. 왜냐하면, 모든 채널이 동시에 계속하여 대량 학살과 같은 사건을 보도해 TV가 포화상태에 이를 때마다 1주 이내에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고 봐도 좋기 때문입니다.』
디츠 박사의 증언을 입증이라도 하듯 실제로 코네티컷주 샌디 훅 초등학교 참사 바로 다음 날 캘리포니아 주 뉴포트 비치의 한 쇼핑몰에서 40대 한 남성이 무차별 총기 난사를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뒤이어 필라델피아에서 또 다른 총격사건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국 이상으로 자극적인 외신의 게임 보도
위 영상의 나머지 부분은 대중매체가 사건 현장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상세하게 재현하고 분초 단위로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지, 범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비록 뉴스에서 보여준 범인의 유언마저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 핸드폰으로 찍은 무장괴한의 마지막 모습을 영상 자료로 보도한 사실 등등, 제2의 대량 살인마를 부추기고 모방범죄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데 가능한 일을 모두 이행하였음을 설명합니다.
이렇듯 TV를 비롯한 대중매체들은 시청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자극적인 자료의 보도에만 집착하고, 결과적으로 대중의 시선과 관심이 범인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낳습니다. 정작 이번 총기 난사 사건과 같은 참극에서 피해자들이야말로 일체의 관심을 받아야 마땅한 당사자들이라는 사실을 자주 망각하는 실태 속에, 대중매체의 피해자를 향한 유일한 관심의 유형은 사건 당시 겁에 질린 7살짜리 어린이들의 목소리를 녹화한 음성 자료를 보도에 내보내는 것밖에 없는 듯합니다.
TV 뉴스와 신문과 같은 형태의 대중매체의 또 다른 특징은 이러한 강력범죄가 있을 때마다 다른 형태의 매체를 탓하고 비난한다는 데 있습니다.영국 내 판매율 1위 타블로이드지(라 쓰고 찌라시라 읽습니다)인 ‘더 선’을 볼까요?
12월 18일자 커버스토리 머리말을 ‘살인마의 콜오브듀티 집착; Killer’s Call of Duty Obsession’이라는 문구로 장식했습니다. 이에 이어 해당 신문은 ‘블랙 옵스 벙커; Black Ops Bunker’ 라는 문자를 양면에 대문짝만 하게 실어놓으며 범인이 창문이 없고 총기류 포스터에 둘러싸여 폭력적인 게임을 즐기며 학살을 계획했다고 기술합니다. 콜오브듀티는 오늘날 게임시장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는 1인칭 슈팅 프랜차이즈이고 블랙 옵스는 콜오브듀티 시리즈의 게임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총기 난사 전 지난 몇 달간 ‘더 선’은 적극적으로, 심지어 긍정적으로까지 문제의 게임인 ‘콜오브듀티: 블랙 옵스 2’를 평가하고 보도하는데 마다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임의 출시 행사에서부터 그래픽과 같은 기술적 측면까지 상세하게 보도하고 게임을 ‘전적으로 순수한 전투 체험’ (It’s pure, unadulterated warfare.)이라 표현하며 극찬하는 등등… 신문 한 부라도 더 팔기 위해서 상황에 맞춰 입장을 순식간에 바꿔버립니다.
연구 결과를 무시하고 게임을 조지려드는 외신과 정부
이번 총기 난사 사건의 책임은 전적으로 폭력적인 게임에 있다는 양 근거 없는 미디어의 혀놀림에 미국 상원까지 넘어갔습니다. (링크)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폭력적 게임과 실제 폭력적 행동은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현재까지 시행된 과학적, 심리학적 사실에 입각한 수많은 연구결과가 이 사실을 반복적으로 입증했습니다.
폭력적인 게임뿐 아니라 책, 음악 등의 다른 형태의 매체도 사람들로부터 폭력적 행위를 유발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미 같은 연구결과와 통계자료에 의해 증명됐습니다. 아래 도표는 국가별 총기관련 사건들과 비디오 게임 소비량을 비교한 그래프입니다. 만일 정말 게임이 사람들에게서 폭력성을 불러일으킨다면 게임 소비량과 범죄율은 비례해야 맞겠지요. 어? 그런데 미국이 혼자 논다???
게임 산업이 극대화된 지난 10년간 미국 내 범죄율은 오히려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였다는 내용의 자료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어 보시면 간질증상 보이시는 분들을 위해서… 2페이지의 두번째 테이블을 참조하시면 모든 종류의 강력범죄 발생률이 마이너스를 보이고 있음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통계 외에도 범죄와 폭력 게임 사이에 어떠한 직접적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들은 산더미같이 널려 있습니다.
지난 1월 16일 오바마가 직접 의회에 1,000만 달러(!)를 질병 대책 센터(CDC)에 지원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지난해 발생한 총격사건에 대안 정책 중 하나인데, “무지로부터 얻는 이익이란 없다” 라는 말과 함께 폭력 사건의 잠재적 원인 세 가지, 그러니까 영화, TV, 게임을 염두에 두고 그중에서도 특히 게임을 집중적으로 연구조사 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제 CDC의 연구목적은 게임과 물리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 사이에 어떤 직접적인 관계가 있느냐를 증명하는 것인데, 추후 귀결이 주목됩니다.
외신의 선정적인 게임 왜곡, 한국 언론이 할 말이 있을까?
이번 총기 난사와 같은 극도로 충격적인 사건이 있을 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범행자는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피의자를 정신이상자로 간주하고 범행에 대한 처벌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범인을 이와 같은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도록 유도한 요인은 주변인과의 관계, 환경 등을 포함한 여러 복잡한 심리적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게임과 같은 그럴듯한 분야에 책임을 돌리는 행동을 멈춰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관관계는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불변의 법칙을 신문, 뉴스와 같은 주류의 대중매체가 잊고 보도하는, 아니 알면서도 더 큰 수익을 위해 도의적 의무까지 저버려가며 허위보도하는 모습에 혀가 내둘려집니다. 더욱이 스무 명이나 되는 대여섯 살 어린아이들이 희생되었는데 이런 사건마저 기삿거리 기회로 활용하고 싶을까요.
외신 매체뿐만이 아닙니다. 국내 매체도 어떤 선입견에 입각하지 않고 정당 보도하여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 주는 임무를 수행하는 대신 선정주의(Sensationalism)에 물들여져 PC방 전원이나 내리고 폭력성 테스트랍시고 하고 앉아 있으니 욕먹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대중으로 하여금 환멸을 느끼게 하는 모습을 자각하고 각성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총기 난사로 사망한 피해자들, 유족 그리고 그 지역사회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