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정으로 인해 새로운 일터로 옮겨서 디자이너라는 직책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이 회사는 중장비를 필요로 하는 현장과 중장비를 가지고 있는 장비주를 온라인으로 연결해주는 서비스로, 미국에서는 최근 이 분야와 관련하여 여러 개의 스타트업이 생겨나고 있다.
이곳에서 일하게 되면서 디자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이곳에 합류하기 전, 이미 제대로 완성된 디자인의 홈페이지 및 안드로이드 앱, 서비스 가이드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전 디자이너의 손길이 매우 정성스레 녹아있는 이 디자인은 최근 스타트업들의 트렌드를 확실히 녹여내며 젊고 세련된 감각으로 보여지는 디자인이었다.
문제는 이 잘 만들어진 디자인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초기 이 서비스를 위해 만들었던 MVP 페이지는 말 그대로 날것의 상태로 서비스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매칭할 수 있는 중장비와 함께하는 협력업체, 그리고 장비 사진 몇 장과 전화번호가 전부였을 때 도리어 엄청난 전화 문의 및 매칭으로 인해 대표님을 비롯해 전 직원이 전화 업무만 진행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야심 차게 베타에서 벗어나, 정식으로 디자인을 입혀놓은 사이트를 오픈한 뒤 콜 수가 떨어지고 매칭 수도 크게 줄었다고 하니, ‘이것은 디자인의 문제가 아닌가’ 하며 내부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실제 우리의 타겟인 중장비업 사업자들, 혹은 중장비를 필요로 하는 현장 직원 및 중기 업체의 사람들에게 정식 오픈 페이지의 디자인이 너무 세련되어 그들과 거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 현장에서 우리의 서비스를 사용해야 하는 분들은 대부분 40~60대의 남성들로 IT와는 거리가 다소 있으신 분들이다. 모바일보다는 웹에 더 친숙하고, 웹보다는 전화가 더 친숙한 분들에게 최신의 모바일 트렌드 디자인의 웹페이지를 선보이다 보니 거부감이 생각보다 심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디자인이라는 게 과연 필요한 작업인가?
기껏 시간과 돈을 들여 근사한 디자인을 뽑아내어 시장에 선을 보였는데 결과적으로 그게 낭비가 되었다면? 안 하느니만 못한 작업이 되었다면 과연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걸까?
디자이너들과 함께 만나 이야기해보면 늘 나오는 주제 중 하나는 시각적인 요소에서 벗어나 경영 / 전략 / 시장 / 기획 등 전체를 아우르는 프로세스를 디자인해야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보여지는 부분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 기획단계부터 디자이너가 함께 참여하여 주체적으로 프로젝트의 전체 프로세스를 디자인해야 하는데 현실이 녹록치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 속에서 디자이너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필요가 있다. 프로젝트에 앞장서서 기획을 주도하고, 프로젝트 구성원 모두에게 디자인적 사고를 심어놓아야 한다. 결과물이 아무리 근사하고 멋지게 포장되었다 하더라도, 그 속에 있는 근본적인 계획/전략과 맞지 않는다면 그 프로젝트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디자이너 본인의 커리어를 위해서라도 욕심을 내서 프로젝트의 기획단계, 혹은 경영전략 단계에서부터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디자이너가 디자인 영역 이외에도 수많은 분야를 공부해야 하겠지만, 모든 디자인의 시작은 바로 ‘근본적 핵심가치’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시작단계에서부터 디자인이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 어떠한 거대 프로젝트도 의미 없는 포장지로 포장만 되어질 뿐이다. 어떤 근본에서 이 디자인이 출발하게 되었는가? 이 디자인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가? 이 디자인의 핵심가치는 무엇인가?
현대사회에서 디자인은 보다 세련되게, 또는 트렌디하게, 멋져 보이게, 혹은 실용적이게 변해 왔다. 이런 시각적 디자인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사용되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디자인은 단순히 보여지는 부분에 집중된 이런 프레임이 아니라 전략을 위한 디자인, 경영을 위한 디자인이 전제가 되어야한다. 또한 이 디자인이라는 도구는 진정으로 사용자-서비스 -기업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매우 전략적으로 선택되어야 한다.
물론 나도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현재 준비 중인 ‘공사마스터’ 서비스를 통해서 단순히 스타일이 아니라 핵심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디자인을 만들어가고 싶다.
원문 : Phillip Don의 미디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