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마광수 교수 논란이 있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마교수가 자신의 강의에서 교재를 산 영수증을 제출하지 않으면 학점을 주지 않겠다고 공지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에 세연넷(연세대 인터넷)에서 항의와 반발의 의견이 줄을 이었고, 이를 일간지가 기사로 띄우면서 논란으로 떠오른 것이다.
마교수의 방침에 반발한 쪽은 ‘자기가 쓴 책을 교재로 강매하다니 어이가 없다’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물려받을 수 있는데, 그것까지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학생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동’, ‘마교수가 한국의 자유주의적 지식인이란 게 믿기지 않는다’ 등의 반응을 보였고, 반대로 마교수의 방침을 옹호하는 쪽은 ‘한 학기에 2만 원 밖에 되지 않는 교재비를 아끼겠다는 이기적인 학생들’, ‘수업에 교재를 사는 건 기본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등의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요컨대 교수가 교재를 강매하는 ‘황당함’과 ‘교재를 사라는 당연한 요구에 반발하는 학생들에 대한 ‘황당함’의 논란이었다.
논란은 교재 강매가 정당한가, 아닌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실은 학생들의 자유 또는 선택권에 의해 논쟁이 촉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가령 같은 선언이(교재를 사오지 않으면 성적을 주지 않겠다) 교재 구매에 선택권이 없는 중/고등학교에서 일어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논란이 될 가능성은커녕 선언 자체가 무의미해질 지경이다. 따라서 핵심은 교재 강매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적 당위와 자유/선택권의 문제,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당위와 자유의 갈등을 조절할 공론장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들여다보면 다소 혼란스러운 또는 위태로운 우리 시대의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된다. 이것에 관해 짧게나마 이야기해 보려 한다.
간단해 보이는 해결책 : 대학 교육에 공론장을 도입하자
마교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출발하자. 마교수를 반대하는 쪽의 대표적인 비판은 마교수의 방침이 교육적인 목적이 있다고 하나, 학생들의 권리를 원칙적으로 침해한다는 것이다. 즉 학생들은 물려받고, 빌리고, 복사하고, 둘이 같이 보는 등 책을 다양한 형태로 구할 수 있다. 그런 선택이 가능하다면 교재구매비(기회비용?)를 다른 곳에서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데, 이를 교수라는 지위를 이용해 권력으로 침해한다는 시각이다. 더불어 실망의 목소리가 뒤따른다. 가령 ‘한국의 자유주의적 지식인이란 마광수가 어떻게 학생들의 자유주의적인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가?’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이 ‘원칙적 반발’에는 두 가지의 요구가 개입되어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즉 ‘개인의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라는 자유주의적 권리에 대한 요청과 ‘개인의 부는 침해될 수 없다.’는 사적 소유권의 요구이다. 학생들의 권리는 교수의 권력에 의해 침해받으면 안 되는 고유의 권리다. 그러나 그것은 2만 원의 교재비라는 ‘기회비용’을 침해받지 않고 사용할 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학교에서 이 요구는 교육적 목적에 의해 무시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학교라는 공간 또는 교육기관이라는 폐쇄된 영역에 공론장을 도입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즉 모든 교육적 가치를 공적 영역으로 옮겨 교수-학생의 평등한 관계에서 재논의하고 합의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는 민주적 방법이기도 하다. 실제로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의 평등을 담보하는 공적 영역을 확대하는 한에서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연세대라는 한 대학 내부의 일이 사회적 논란으로 발전되는 모습은 이러한 해결책이 우리 시대의 상식이 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론장의 딜레마 : 토론은 좋지만, 교재 사는 건 내 마음?
그러나 이 해결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공론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사적 소유권’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이 해결책은 이율배반적 한계가 뚜렷하다. 즉 교수-학생의 관계 그리고 학교라는 닫힌 공간은 공론장에 개방되어야 한다는 공적 영역의 확장을 요청하는 반면, 사적 소유권은 공적 영역이 침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공적 영역의 축소를 요청한다.
이런 이중의 요구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마교수를 옹호하는 측에서 나온 ‘교재비를 아끼는 이기주의’라는 말일 것이다. 이 말에는 교재비를 다른 곳에 쓰고 싶다는 개인의 사적소유권을 방어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교묘하게 이용한다는 비난이 담겨 있다. 마교수를 옹호하는 이들은 민주주의가 그런 형태로 축소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믿는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는 사적 소유권으로 축소될 수 없는 그 이상의 가치를 함축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이 ‘수업에서는 교수가 요청하는 교재를 사야 한다.’라는 당위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이들 역시 ‘교육권’ 또는 ‘상식’에 있어서는 공적 영역의 확대를 요구하고 있지 않다. 거칠게 말하면, 상식이나 당위를 강조하는 입장 속에는, 이것들이 사회의 기본적인 가치이므로 굳이 공론장에서 재론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플라톤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불온함과 천박함
이는 민주주의를 불온하게 묘사한 플라톤의 시선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그들의 불안을 플라톤의 입을 빌려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 일들이, 그리고 그 밖의 것들로 이런 작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네. 그런 상황에서는 선생이 학생들을 무서워하며 이들에게 아첨하고, 학생들은 선생들을 경시하며 자기들의 교육을 돌보아 주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런다네. 또한 전반적으로 젊은이들은 연장자들을 흉내 내며 언행에서 이들을 맞상대하고, 반면에 노인들은 젊은이들에 대해 체신 없이 굴기를 기지와 재치가 넘칠 지경이라네. 불쾌하고 권위적이라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젊은이들을 흉내 내느라 말이세.” (플라톤, 박종현 역, <국가, 정체>, 8권, 563a ~ 563b, 서광사)
공론장과 민주주의에서는 가치들이 재합의되고, 그 때문에 모든 것이 뒤집혀 나타날 수 있다. 학생은 스승의 위치를, 젊은이들은 노인의 권위를, 아들은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 대한 불안은 보수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위치가 뒤집어져도 ‘위치, 권위, 자리’는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권력관계와 가치는 그대로이고 단지 권력을 쥔 자만 교체될 뿐이다. 불안은 근본적 권력관계까지는 건드리지 않는 보수성을 담지하고 있다.
마교수는 꼰대인가? 책을 사지 않겠다는 학생들은 속물인가?
마교수와 그를 옹호하는 입장이 ‘꼰대’로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교재 강매가 안된다는 쪽은 사적 소유권을 위해 민주주의라는 언어를 전유하는 ‘속물’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다른 쪽은 기존의 권력관계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나 가치가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꼰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논쟁은 의도의 선량함에도, 민주주의, 자유, 소유권, 권력관계의 복잡한 혼돈 속에서 다소 일그러진 이미지로 나타난다.
문제는 이런 풍경이 사람들에게까지 의문을 던져준다는 것에 있다. “우리가 생각하던 민주주의란 고작 이런 것이었나?” 하는 물음 말이다. 사적소유권은 자유주의와 결합되어 개인의 권리로 인지되는 것이 현실이다. 자유주의와 사적 소유권의 결합을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반면 민주주의가 사적 소유권으로 함몰되면 곤란하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공론장의 범위, 공적 영역의 확대와 축소에 적절한 경계선을 그으려는 시도는 난관에 부딪히고 보수적인 전망으로 귀결되는 듯한 모습이 지금이 풍경이다. 이런 것이 다소의 혼란 또는 위태로운 모습 아닐까?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교수가 교재를 강매하는 것이 과연 정당하냐는 물음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는 과연 어떤 것이고,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라는 고리타분한 질문이다. 한 번쯤 던져볼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