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 가장 광범위하게 잘못 쓰인 말로 나는 ‘표현의 자유’를 꼽는다.
물론 그 이전부터 잘못 쓰여 왔던 맥락이 있지만, 2015년으로 한정하자면 오용의 첫 단추는 <샤를리 엡도> 만평을 둘러싼 말들 속에서 끼워졌다. 이 말은 잔혹 동시 논란에서도 잘못 쓰였고, 최근 아이유 ‘제제’ 사건에서도 상당히 잘못 쓰였다. <뷰티풀 군바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방심위의 레진코믹스 차단 건이나 <제국의 위안부> 기소 건에 이르러서야 그 말이 최소한 적절한 맥락에서 쓰인 경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짧게 정리해 보자.
‘표현의 자유’, 제대로 알고 있을까
우선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개념 정리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표현의 자유란 첫째, 어떤 장면-단어-문장 등의 표현에 대한 자유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대조해 말하자면 그것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유에 더 가깝고, 여기서 역사적이고 실질적인 전제는 ‘목소리를 낼 수 없게 하는’ 억압의 존재다. 둘째, 그것은 법적 개념이지 도덕적 개념이 아니다. 특정한 목소리와 표현을 차단하는 (주로 국가) 권력에 맞서 시민들이 쟁취해낸 권리가 표현의 자유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제도적이고 법적인 주체가 참여하지 않은 경우, 우리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말하기 어렵다.[1][2]
레진코믹스 차단 건은 방심위라는 제도적 기관이 표현을 제한한 경우고, <제국의 위안부> 건은 검찰이 ‘기소’라는 제한을 통해 학술 표현의 한계를 논하려 한 것이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 발생했는지 따져볼 수 있는 사건들이다. 하지만 다른 경우들은 법적/제도적 절차와 상관없거나, 혹은 그것을 초월해 벌어진 폭력이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나 의문을 논할 계제가 아니다. 오히려 <샤를리 엡도>와 <뷰티풀 군바리> 등과 같은 사례에서는 표현의 자유 오용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한다. 이 경우 오용된 ‘표현의 자유’는 ‘표현’에 대해 더 폭넓게 고민하려는 다른 목소리들을 위축하게 만들고 만다. 마치 프레임처럼 생각의 범위를 제한하는 굴레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 굴레를 벗을 때에야 우리는 ‘표현의 윤리’라는 이름으로 도덕과 윤리의 문제를 논할 수 있다. 이슬람에 대한 <샤를리 엡도>의 만평은 나쁜가? <뷰티풀 군바리>의 ‘아해가오’처럼 보이는 표현은 나쁜가? 나쁘다면 왜 어떻게 누구에게 나쁘며, 그 ‘나쁨’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만약 그것을 덜 나쁘거나 나쁘지 않게 조정할 수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그 ‘나쁨’을 만들어내는 작품 내적 요인은 무엇인가?[3] 등등의 질문이 그것이다.
‘표현의 윤리’에 대한 고민을 위축시키는 오용된 ‘표현의 자유’
그런데 오용된 ‘표현의 자유’는 ‘표현의 윤리’에 대한 질문들을, 오히려 ‘표현의 자유도 모르는 억압’으로 치부해버린다. 그래서 ‘표현의 윤리’를 두고 이루어져야 할 논의마저도 늘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을 둘러싸고 이상한 방향으로 이어지다 끝나고 만다. 그 질문들은 적어도 우리가 시민사회의 성원으로서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것이며, 이를 통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늘 유의미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처럼 ‘표현의 자유니즘’이 표현에 대한 다른 논의를 억압할 때, ‘표현의 자유’는 작가 ‘마음대로의 표현’과 작가의 윤리적 나태까지 보호하는 것이 되고야 만다.
이런 면에서 어쩌면 작가들이야말로 오용된 ‘표현의 자유’로 인해 정작 ‘표현’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을 행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샤를리 엡도> 이후로 ‘죽을까봐 겁나서’ 자유롭게 그림 그리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를 작가들로부터 종종 들었다. 하지만 이는 표현의 자유 억압으로 인한 ‘자기검열’과는 다르다. 만약 이를 ‘자기검열’이라 부른다 하더라도, 이는 더 잘 팔리고 싶어서 하게 되는 자기검열, 독자에게 욕을 덜 먹고 싶어서 하게 되는 자기검열 등과 같은 차원에 있다.
반면 ‘표현의 윤리’로 접근할 때는 다른 차원이 연결된다. 자기 자신의 손해를 향한 두려움에서 그치지 않고, 타인에게 미칠 영향을 사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무슬림이나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에 대한 이해,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 기울어진 젠더 권력 문제에 대한 이해 등 타자에 대한 고려와 잇닿아 있는 사유가 그것이다. 이는 ‘어떻게 표현해야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을까?’와 같은 창작의 고뇌를 ‘이렇게 표현했을 때, 내가 그린 작품 속 인물과 밀접한 누군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와 같은 전망과 연결하고 대조하는 일이다.
표현을 둘러싼 고민들은 더 넓어지고, 깊어져야 한다
나는 한국 만화계가 ‘표현의 자유’와 함께 ‘표현의 윤리’도 고민하길 바란다. 표현의 자유는 예전 <천국의 신화>에 대한 국가의 억압과 같이 명백한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잘 대응할 수 있도록, 그 권리의 중요성과 의미를 명확히 하는 방향으로 궁리될 필요가 있다. 이는 권위에 대한 더 날선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저변으로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편 ‘표현의 윤리’에 대해서는, 청강대 만화스쿨에서 만화 창작자를 위한 ‘젠더감수성’ 특강을 기획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창작자들이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성을 되새기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이런 시도와 함께 올해 가장 뜻깊은 사례로 나는 <닥터 프로스트>의 예를 들고 싶다. 이종범 작가는 세월호 생존 학생들과의 만남 후에, “그들에게 상처가 될 것을 우려해 휴재를 감수하며 에피소드의 중반부를 모두 고쳤다. 한 사회 속에서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은 피해 생존자의 ‘생존’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4] 만화의 ‘표현’에 대한 고민은 이렇게 넓어지고 깊어져야 한다.
원문: 에이코믹스
- 박경신, ‘샤를리 에브도’ 테러와 표현의 자유. ↩
- 특히 일베를 포함한 인터넷 문화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거나 과도한 표현에 대한 옹호로써 ‘표현의 자유’가 호출되는 것은 가장 심각한 오용이다. 표현의 자유가 국가권력의 현실적 위협 속에서 ‘권리로서의 자유’로서 존재하는 맥락을 거세한 상투적인 오용(속류 ‘표현의 자유니즘’)은 오히려 표현의 자유가 보호하는 권리를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게 만들 수 있다.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는, 말하자면 국가 권력에 대항하는 시민의 최종병기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것이 혐오 표현을 주저하지 않는 이들, 혹은 자신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의 막말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목도한다. 우리 모두의 최종병기를 이런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오용하는 것은, 마치 양치기 소년이 재미삼아 경고를 남발하여 경고의 권위를 갉아먹었던 것처럼 위험한 일이다. ↩
- ‘잔혹동시’에 대해서도 이런 맥락에서 물을 수 있지만, 오히려 창작자가 어린이이기 때문에 윤리를 요구하는 질문이 빗나가는 지점이 있다는 것 역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례들과 비교할 때 그러한 특수성이 가장 많이 고려되어야 할 사건이라 하겠다. ↩
- 고예린, <닥터 프로스트>가 세월호의 생존자에 대해 말하다. 이 글은 표현의 윤리를 섬세하게 고민한 다른 예들도 적확하게 담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