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채 일 초가 되지 않는 찰나의 실수로 발을 헛디딘 스스로의 부주의를 한탄해야 하는 것일까. 방금까지만 해도 현실이 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이 극도로 비현실적인 현실 앞에서 짓이겨지는 고통과 함께 땅으로 낙하한다. 그리고 이윽고 온 몸의 뼈가 울리는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나는, 죽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내 앞에는 다시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깜빡 잠이 들었던 것일까? 혹 흔한 기시감이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혹 순간 망상 속에 빠졌던 것일까. 어쨌든 여느 꿈, 기시감, 혹 망상이 그러하듯이, 소름 끼칠 정도로 현실적이었던 그 기억은 금세 거품처럼 흩어져 떠올리려 해도 떠올릴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새 소리가 들리는 평화로워 보이는 숲에서, 나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경쾌한 동작으로 달리고 있었다. 바람은 상쾌했고, 기분은 그냥 마냥 좋았다.
이 숲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람 키만큼이나 큰, 괴이한 모양새의 괴물들이 눈앞을 가로막기 시작한다.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피해 보지만, 이번에는 저 멀리서 불덩어리가 날아와 나를 덮친다.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에 나는 당황했다. 발이 꼬이기 시작한다. 내 의지로 제대로 달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눈앞에 그 지옥 같은 불덩어리가 내 코앞에서 이글대고 있었다.
결국 끔찍한 냄새와 함께 내 몸이 불타고 있음을 피할 수 없는 통증과 함께 느끼며, 나는 죽어갔다. 이 무시무시한 고통은 나로부터 이성과 의식을 모두 박탈했고, 그렇게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또 그 순간 – 내 앞에는 다시 한 사막이 보이기 시작한다. 깜빡 잠이 들었던 것일까, 혹 기시감이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망상 속에 빠졌던 것일까, 금세 거품처럼 흩어져버릴 그 기억은 – 그러나 이번에는 쉬이 흩어지지 않는다. 낭떠러지로 추락했던 그 죽음의 기시감, 온몸을 불태우는 그 고통의 기시감이 단순한 환상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또렷하고 또 반복적이다.
틀림없이 여기는 사막이건만, 방금 숲에서 들었던, 그리고 과연 숲에서나 어울릴 것 같은 새 소리가 또 들리기 시작한다. 자세히 들어보니 이건 – 그냥 새 소리가 아니다. 불길하기 그지없는 까마귀의 울음이다. 그것도 사람만큼이나 큰 기괴한 생김새의 까마귀다. 낮게 비행해 귀를 울리는 날갯짓과 함께 내 머리 위로 날아온 그 까마귀는, 내 앞에 있는 무엇인가를 발로 낚아채 다시 높은 곳으로 날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나도 모르게 사막을 달린다.
그제야 기억이 떠오른다.
보물을 찾겠답시고 기묘한 땅으로 건너왔던 기억, 이 불길한 흉조에게 보물을 빼앗기고, 그걸 찾겠다는 욕심에 이 기묘한 땅을 달렸던 기억 하나하나가 대뇌를 강타한다. 떨어져 죽고, 불타 죽고, 얼음 꼬챙이에 온몸이 꿰뚫려 죽고, 그렇게 수백 번 수천 번을 죽었던 기억들이 전부 다시 떠오른다. 그건 기시감이 아니었다. 그 수백 수천의 죽음이 각각 모두 현실이었다.
나는 저주받은 것이다.
달리기를 멈출 수 없는 저주. 끝없이 반복되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저주를.
절벽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절망이 온몸을 휘감는다. 누군가는 죽음으로써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얘기했지만, 나에겐 죽음이라는 이 극한의 고통마저도 다시 그 극한의 고통을 반복하기 위한 시작일 뿐이다. 끔찍한 고통 끝에 겨우 죽음을 맞아도, 영면은 허락되지 않는다. 내겐 다시 삶이 주어지고, 또한 몇 분이면 다시 찾아올 무조건적인 죽음이 뒤따른다.
달리지 않으면, 저 보물을 찾아 달리지 않으면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만, 달리기를 멈춘 나에게 찾아오는 것은 가장 끔찍한 형태의 죽음이다. 괴물과, 불덩이와, 얼음 꼬챙이에 다시 죽고 싶지 않아 선택한 내 이 가장 소심한 반항을 세계는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세계는, 세계 그 자체가 한없이 압축되어 나를 눌러 죽이는 것으로 이 영원한 저주를 다시 한 번 실행한다.
가장 끔찍한 저주와 함께 나는 다시 또 죽었다. 그리고 그 순간 – 내 앞에는 다시, 숲이 보이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던져놓은 신발 한 켤레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