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하 교수 사건을 둘러싼 논쟁에서 나오는 주장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거칠게 나누면 1)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입장과 2)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가 훼손되었으니 박 교수가 처벌받아야 한다는 입장으로 갈라볼 수 있다.
즉 박유하 교수에 대한 기소가 잘못되었다는 쪽은 학문적 주장을 형사법정에서 명예훼손으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그 중에는 박유하 교수 본인처럼 책 내용 자체가 옳기 때문에 애초에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입장이 있고, 박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헌법상의 ‘표현의 자유’에 의해서 보호된다는 입장이 있다), 박유하 교수가 명예훼손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쪽은 『제국의 위안부』에 나오는 ‘팩트’가 허위이며 박 교수의 ‘해석’도 잘못 되었고 그로 인해 할머니들의 명예가 훼손되었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어서 1차 사료를 찾아보면서 팩트를 확인하거나 박유하 교수의 해석에 대해서 평가를 할 능력이 없다. 다만 이 사건이 유죄로 확정될 경우 초래될 한 가지 실제적인 측면에 대해서 주의를 환기하고 싶다. (더불어 박 교수를 처벌하는 것이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를 지켜주는 것이라는 주장의 비현실성을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만약 박유하 교수가 명예훼손죄로 유죄판결을 받게 되면, 앞으로 대한민국의 독자들은 『제국의 위안부』를 읽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제국의 위안부를 읽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
박 교수를 기소한 검찰의 논리는 『제국의 위안부』에 나오는 내용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법원이 검찰의 논리를 받아들여서 박 교수가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면 당연히 앞으로 『제국의 위안부』를 출판하거나 판매하는 행위는 금지되고 거기에 관여한 사람들은 처벌받게 된다.
그러므로 박유하 교수 사건은 단순히 박유하라는 한 개인에 대한 처벌 여부를 떠나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을 읽는 것이 금지되어야 하는가, 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박 교수를 처벌한다는 것은 결국 이 책이 금서(禁書)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금서가 되어야 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역사학자가 아닌 검사와 판사다) 그에 비해서 일본 국민들은 이 책의 번역서를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예를 들자면, 일본의 대학생들과 우리 대학생들이 아시아의 근현대사를 놓고 토론을 하는 행사가 열릴 때 우리 학생들은 분명히 존재하는 하나의 관점을 접해보지 못 한 채 논쟁에 나서야 한다. 박유하 교수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이런 결과를 감수하겠다고 밝혀야 한다.
나는 이것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박 교수의 해석이 타당한지를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그 점에 대해서 여기서 얘기할 의도도 없다. 다만 국내외 다수의 지식인들의 박 교수를 지지하는 성명을 낸 것을 고려할 때 박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제시한 시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설사 그것이 역사를 ‘잘못’ 해석한 주장이라고 해도 여전히 실제로 존재하는 해석 중의 하나인 것이다)
10년쯤 전 공무원 시절에 태국에 출장을 간 일이 있다. 지금 정확한 경위는 기억이 안 나지만 어떤 인연에선지 우리 일행은 어느 날 저녁 어떤 우아한 태국 노신사의 안내를 받으며 방콕 시내를 구경하게 되었다. 고된 일정 때문에 함께 갔던 높은 분들은 봉고차 뒷자리에서 골아 떨어졌는데, 옛날이야기를 워낙 좋아하는 나는 운전을 하는 그 노신사 옆자리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주로 태국 역대 왕들의 업적에 관한 얘기였다. ○대 ○○○왕은 치수에 업적을 남겼고, ○대 ○○○왕은 문화를 중시해서 무슨 사원을 지었고, 그런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태국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큰 관심이 없을 내용이지만, 얘기 자체도 재미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독립을 지켜온 사람들의 뿌리 깊은 자부심이 느껴져서 좋았다. 다들 알다시피 태국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수없이 드나들고, 일부에서는 ‘퇴폐’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장면도 벌어지지만 그런 걸로 인해서 이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지는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만큼 높은 자존감이 엿보였고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한참 즐거운 대화가 이어지던 중에 그 노신사는 갑자기 영화 <왕과 나> 얘기를 꺼내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허위사실로 태국 왕실을 중상모략하고 왕을 미개인처럼 묘사한 쓰레기 같은 영화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려서 봤던 영화의 내용을 어렴풋이 떠올리면서 어떤 점이 가장 문제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노신사는 단호한 어조로 자신은 그 영화를 안 봤다고 했다. 태국에서는 <왕과 나>의 상영은 금지되어 있으며 태국인이라면 절대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그분의 이야기가 공허하게 들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 그분이 측은해 보였다.
※ 필자 주: <왕과 나>는 원래 뮤지컬이고 1956년(데보라 카, 율 브리너 주연)과 1999년(조디 포스터, 주윤발 주연) 두 번에 걸쳐 영화화되었다. 태국에서는 모두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보지 않은 영화, 읽지 않은 책을 제대로 비판할 수 있을까?
만일 그분이 <왕과 나>에 나오는 내용 중 어떤 점이 사실과 다르다고 얘기를 했다면, 혹은 본지 오래되어서 자세한 기억은 안 나지만 틀린 내용 투성이라고 했다면 나는 아마도 그분의 주장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 중에 서구우월주의에 찌들고 왜곡된 내용으로 가득 찬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태국 사람들은 그 영화를 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말하는 순간 그 교양 있는 노신사의 말은 설득력을 잃었고, 태국 역사와 왕실에 대한 그의 근거 있는 자랑은 공허해져 버렸다.
내가 일본의 젊은이를 데리고 서울 시내를 안내하고 있는데, 그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해보자. 책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러저러한 관점에는 동의하지만 이러저러한 관점은 동의하기 어렵다고 답하는 것과, 그런 허위사실로 가득 찬 쓰레기 같은 책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읽어서도 안 되고 출판도 금지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까.
한국에서 『제국의 위안부』가 금서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도 그 젊은이는 나와 대화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가 『제국의 위안부』에 나오는 주장에 찬성하든 안 하든, 그 일본의 젊은이는 그 책을 읽지도 못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에 대해서 우월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살만 루슈디의 소설 『악마의 시』를 매우 좋아하지만, 이슬람 교도라면 그 책을 읽으면서 분노를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예언자 모하메드를 ‘마훈드’라는 경멸적인 이름으로 부르고 그의 부인들을 창녀로 묘사한 내용에 대해서 격분하는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책을 읽고 내용을 비판하거나, 그런 책은 아예 읽지도 않겠다고 한다면 그런 입장을 존중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책을 읽지 못하게 금지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그 책을 읽어볼 수조차 없는 사람들을 측은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 쪽을 측은하게 느껴야 하는 동등하지 않는 상황에서 진지한 ‘토론’이 있을 수는 없다.
『악마의 시』를 둘러싼 표현의 자유 논쟁은 주로 호메이니옹이 저자인 살만 루슈디를 비롯해서 그 책의 출판업자, 서점 주인 등을 죽이라고 명령한 파트와를 둘러싸고 이루어지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 책을 읽지도 못하게 하는 국가의 사람들과 정상적인 대화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타인의 종교를 존중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특정 종교에 대해 안 좋은 내용이 담겨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책을 못 읽게 하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과는 그 책에 나오는 내용에 대해서 진지하게 얘기하는 것이 솔직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박유하 교수를 처벌하지 않고 『제국의 위안부』를 우리나라 독자들이 읽을 수 있게 한다고 해서 그 책에서 제시된 박 교수의 시각에 우리 모두가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제국의 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채택하자는 것은 아닌 것이다. 비교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서점에서 히틀러의 책 『나의 투쟁』을 자유롭게 사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파시즘을 용인하거나, 더 나아가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된 분들을 모욕하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히틀러의 책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파시즘과 히틀러가 저지른 일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사생활 폭로가 아닌 이상, 역사 해석의 옳고 그름은 자유로운 토론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제국의 위안부』는 특정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책이 아니다.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우리 역사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다. 역사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해석이 허용되어야 한다. 검사나 판사가 읽어보고 어떤 특정한 시각을 독자들이 접할 수 있는지 결정해서는 안 된다. 사생활에 관한 내용이라면 혹시 모르지만, 왜 검사나 판사가 아닌 일반 독자는 그 책을 못 읽어야 하는가.
여기까지 얘기하면, “그러면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는 어떻게 하느냐”라는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또 할 얘기가 많지만, 이미 너무나 글이 길어져서 짧게 언급을 한다.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만일 이 책으로 인해서 생존해 계시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해결책이 반드시 ‘형사처벌’이나, ‘책의 금서 지정’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박유하 교수를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시는 분들은, ‘박 교수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 그러므로 처벌받아야 한다. 만일 처벌하지 않는다면 훼손된 할머니들의 명예를 외면하는 것이다.’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깔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런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만일 명예훼손이 인정된다고 가정하더라도) 박유하 교수를 처벌하지 않는다고 해서 할머니들의 명예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명예훼손을 형벌로 처벌하는 나라는 선진국 중에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그 나라 사람들이 국민들의 명예를 권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비판이나 토론을 통해서 바로잡을 수 있고,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명예를 존중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점에 나가보면 『제국의 위안부』와 전혀 반대의 관점에서 쓴 책이 넘쳐난다. 박유하 교수의 책이 거기에 한 권 더해진다고 해서 갑자기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가 훼손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책을 금서로 만들어서 못 보게 하는 것이야말로 자칫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역사적 컴플렉스를 내보이는 것으로 오해될 위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입장을 내세우는 데 결정적인 어려움을 초래할 수도 있다.
형사처벌과 금서 지정은 오히려 독
위안부가 강제된 것이 아니라는 일본 측의 주장에 대해서 우리가 말도 안 된다고 반박을 할 때 일본 측에서 “한국에서는 특정한 입장의 시각과 부합하지 않으면 책도 금서로 지정하는데, 그런 나라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라고 말하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분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입장을 약화시킬 위험이 훨씬 크다.
나는 우리 대학생들이 일본 대학생들과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근현대사를 놓고 토론할 때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전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박유하 교수나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문제를 결정할 때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역사에 대해서 나만큼 무지할 것이 분명한 검사나 판사의 판단에 따라서 우리 학생들이 일본 학생들은 읽을 수 있는 책을 못 읽게 되고, 동등한 입장에서 토론을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참을 수가 없다. 책을 읽지도 않았다는 것을 오히려 마치 자랑인양 내세우면서 격문에 가까운 비난이나 퍼붓는 일부 정치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참을 수가 없다.
원문: 금태섭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