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가능성으로 꿈꾸던 내일을 만나다–새로워진 삼성 딜라이트에서 당신의 미래를 만나세요.’
지하철 2호선 강남역, 벽 전체가 삼성의 홍보물로 도배되어 있다. 홍보물들을 지나, 8번 출구 계단을 올라가면 역시 삼성과 관련된, 그러나 예기치 못한 작은 섬을 만나게 된다.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농성장이다.
12월의 어느 날, 농성장에서 8년 동안 꿋꿋하게 반올림이라는 섬을 지켜온 황상기, 공유정옥님을 만났다.
딸바보 에너자이저와 날라리 의사 공유정옥님을 만나다
천막도 없다. 오직 몸으로 12월의 칼바람을 견뎌내야 하는 농성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거대 기업 삼성과 싸우고 있다.
그 가운데 반짝이는 눈동자와 친절한 웃음으로 주변을 밝히는 한 사람이 보인다. 누군가는 그를 ‘반올림의 보물’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에너자이저’라 부른다. 황상기님.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근무 중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고인이 된 황유미씨의 아버지다.
그가 몸담고 있는 반올림은 2007년 유미씨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백혈병, 암, 희귀난치병 등 반도체 노동자 직업병 문제의 진상을 밝히고 그들의 건강과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다. 지긋지긋 할 만큼 긴 싸움 가운데서도 웃는 이유를 물었다.
“처음에는 죽는 줄 알았죠. 시간이 많이 지나는 바람에 그 억울한 마음 조금 희석이 됐고. 계속 싸우다보니 내가 죽을 것 같애. 내 화에 내가 질려가지고. 그래서 어느 순간엔가 내가 마음을 바꾸자고 했어. 억울해서 싸우지 말고 잘못된 걸 고치라고 즐겁게 싸우자고… 약 올리고 즐겁게 싸우자고. 그랬더니 마음이 처음보다 한결 가벼워졌어요. 내가 억울해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올 수는 없는 거잖아요. 이런 일을 만들지않는 데 신경을 써야지. 그래서 처음보다는 마음이 많이 밝아졌어요. 그래서 이젠 장난 소리도 아주 잘하고요.”
유미씨는 열아홉에 삼성전자에 취직한 후 스물 한 살에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2년 후 아버지가 운전하던 택시 뒷좌석에서 세상을 떠났다. 2007년 3월 6일, 유미씨의 나이 겨우 스물 세 살이었다. 그 후 8년 동안 그는 삼성의 회유와 협박에 시달렸다. 안전관리 담당자는 10억, 아니 35억 원을 줄 테니 사회단체 사람들과 만나지도 말고 이야기도 말라고 했다. 요구하는 대로 다 줄 테니 그만 끝내자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우리집에 수도 없이 찾아 와갖고는 내가 피해봤다고 하는 거 다 줄 테니까 여기서 끝내라고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때마다 꾹 참았다니까. 여태 집 지으려고 모아놓은 돈 치료비로 다 날려먹었어. 유미가 거기(삼성반도체 공장) 들어가서 항암치료 받고 집에 오는 모습을 보고, 유미 할머니도 이틀 동안 밥을 안 잡수시다가 바로 돌아가셨어. 그리고 유미 죽었어. 유미 엄마는 우울증 걸려서 지금까지 계속 병원에 치료하러 다녀. 난 계속 원인 밝히러 다니고. 우리 집은 다 해체된 거나 마찬가지야.”
유미씨의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진다. 꽃 같던 딸의 죽음으로 내일의 희망이 모두 사라진 지금, 그가 그럼에도 꿋꿋하게 이 싸움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사람 더 만들지 말아야 할 것 아냐. 우리집 다 그렇게 해체되고 몇 사람씩 죽었는데, 내가 그 돈 받았다고 해서 그게 회복되는 게 아니잖아.”
유미 대신 얻은 또 하나의 가족
함께 걷는 길은 외롭지 않다. 황상기님이 걷는 길에는 반올림 식구들과 “이 분”이 늘 함께 한다. 그를 지금까지 버틸 수 있게 해준 진짜 또 하나의 가족은 바로 산업의학전문의 공유정옥님이다. 반올림의 활동가이자, 현재 삼성과 교섭하는 교섭단의 간사다. 차분하고도 겸손하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산업의학전문 ‘의사’라는 수식어는 붙이지 않는다. 2007년 11월 20일에 반올림에 첫발을 디뎠으니 만 8년이 넘은 셈이다.
그녀는 ‘격이 떨어지는 괴물도 철들도록 계속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격이 달라요. 그러니까 이 기업이 보면 볼수록 정말 격이 떨어져요. 근데 그게 너무 속상한 거예요. 그 기업을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대표 브랜드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럽고요. 올해 2월에 죽은 친구는 92년생이에요. 유미씨는 85년생이고요. 이런 어린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나이 조금 더 먹은 사람들이 이렇게 있는 게 맞느냐는 거죠. 이건 양심의 문제에요. 괴물이기는 한데, 철들게 계속 가르치기는 해야 될 것 같다는 거죠.”
2007년부터 대립해 온 삼성과 반올림은 2014년 12월, 조정위원회의 권고안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제3의 기구를 통해 합의점을 찾기로 한 것이다.
사실 조정위원회 권고안은 반올림에 소속되지 않은 피해자 6명의 모임인 가족대책위원회와 삼성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사안이었고, 이를 수용하면 지난 2년 동안 반올림이 진행한 교섭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교섭이 지연될수록 피해 가족들의 고통이 커지기 때문에 반올림은 조정위원회 참여를 결정한다.
2015년 7월 23일, 드디어 조정안이 나왔다. ‘보상’, ‘대책’, ‘사과’ 등에 대한 17개의 권고조항과 각각의 이유들이 제시되었고 제 3의 사회적 기구가 보상과 대책을 총괄하고 삼성전자는 그에 필요한 돈을 기부하라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반올림의 입장에서 볼 때 수정이 필요한 내용이 다소 있었지만, 큰 틀에서는 수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삼성과 가대위는 조정위원회를 통한 ‘조정중단’을 통보하고 사내 보상위원회를 만들었다. 삼성이 직접 대상을 심사하고 금액을 정하는 내용이었다. 결국 직업병 문제를 사회적으로 공정하고 투명하게 해결하기보다는 은폐하려는 속내가 드러난 셈이다.
가대위와 삼성은 반올림을 외부활동가 조직으로 낙인찍고 피해자를 대변하는 진짜 조직은 가대위라는 구도를 조성했다. 현재 가대위는 빠른 해결을 위해 반올림을 배제하고 삼성과 직접 해결하겠다는 입장이다. 삼성은 보상위원회를 만들어 독자적인 보상을 진행하고 있다.
반올림은 10월 7일부터 ‘삼성은 사회적 해결 약속을 지키라’며 무기한 노숙농성에 돌입했다. 괴물이라 일컬어진 한국 대표기업 삼성은 대화 보류, 협상 보류, 조정권고안 수용도 보류해 왔다. 제발 한 번만 대화해보자는 반올림의 목소리는 무시당했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분노를 삼켰다.
“권고안이 나왔잖아요. 그럼 권고안을 놓고 얘기를 하면 돼요. 저희도 상대방도 ‘조정’이라는 영역 안에 들어왔으면, 권고안이 중간이에요. 저희가 얘기한 거랑 삼성이 얘기한 거의 중간이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어떤 사안은 우리 쪽에 가깝게, 어떤 사안은 삼성 쪽에 가깝게 되어 있어요. 그럼 저희도 이런저런 게 있지만, 이 정도에서 정리를 하고, 정리하되 마지노선을 정해놓으며 융통성을 갖고 움직이는 거잖아요. 그러면 이 권고안을 이렇게 저렇게 옮기고 (퍼즐 옮기듯 손 모양을 취하면서) 빼고 더하면 돼요. 협상이니까. 그런데 그걸 한 번도 안 하는 거예요, 이 회사가. 그러니까 미쳐버리겠지요. 삼성 너네 왜 이래, 이렇게 잘 만들어놓고, 권고안도 잘 만들어놓고.”
삼성과 함께 바뀌어야 하는 일들
그녀는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 이슈를 다각적인 측면에서 풀어가야 한다고 했다. 사회질서, 산업재해, 장애, 노동자들의 알 권리 침해와 기본적인 인권의 개념까지 종합된 이슈라는 것이다. 사회가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아픈 게 산업재해라는 것을 밝히면 인정해줄게, 이렇게 많이들 생각해요. 전문가들도, 피해자들도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을 해요. 사회의 패러다임이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명백하게 밝힐 수가 없는 게 절대 다수에요. 미션 임파서블이죠. 요컨대 현 제도는 통과할 수 없는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어요.”
미션 임파서블, 이 단어보다 현재 상황과 더 잘 어울리는 말이 또 있을까? 배제 없는 보상과 내용 있는 사과는 물론이거니와 실효성 있는 재발방지대책의 마련도 요원한 지금, 그녀는 정말 삼성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한 달 전에 수유너머(인문학연구소)에 계신 분이 인권 이야기를 하시면서 큰 위로를 주셨어요. 세상이 좋아질 수 있을까요, 하는 질문을 했는데 프랑스 혁명이 인류사회에서 왜 위대한지에 대해서 얘기해보겠대요. 프랑스 혁명이 없앤 신분제의 기원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고 2천여 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시종이 ‘주인님, 너랑 나랑 대등한 인간이고 똑같은 인권을 가졌어’ 선언한 거죠. 인권이라는 말이 그렇게 위험하고 새로운 말이었고, 이제 그 말을 쓰기 시작한 지 3백 년이 되어가고 있어요. 여전히 평등하지 못하고 아직 인권이 실현되지 못하는 상황에 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2천 년 가까이 있던 것도 그렇게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니까 삼성이 막강해보여도, 그 역사 얼마 안 되었으니 바꿀 수 있다, 이 말에 저희가 대박 위안을 받았어요.”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님의 시가 떠올랐다. ‘혁명은 혁명의 불가능성, 그걸 알면서도 끝까지 밀어가 실패하고 언제까지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병원보다는 농성장에서, 진료실보다는 현장을 누비며 이 ‘작은 혁명’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도록 그녀를 격려하는 건 ‘여럿의 힘’이었다.
“사실, 그냥 그런 거 있잖아요. 누구는 괜찮고 누구는 더 힘들고 그런 게 아니라 여럿이니까 그게 되는 거 같아요. 한 명이 무릎이 푹푹 꺾일 때 다른 사람은 좀 이렇게 서 있고(부축하는 동작을 하며) 그 사람이 팔이 아프면 또 그 옆 사람이 마침 좀 쉬어서 기운이 나고. 그래서 이거 혼자는 못하는구나 생각을 합니다. 저도 그렇고 제 동료들도 그렇고 무릎이 푹푹 꺾이는 순간들이 계속 있는데, 그러면 땡강도 부리고 지랄도 하고(웃음) 그러는데. 몇 명이 있으니까 나누는 거죠.”
그녀는 농성을 하며 인간에 대한 이해가 조금 넓어졌다고 했다. 분노를 처리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며 총천연색의 인생을 ‘막’ 산다. 대한민국에서 의사라는 전문직이 선택할 수 있는 안전한 길에서 동떨어졌는데도 평온해 보인다.
“이렇게 사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느끼는 가장 결정적 차이는 관계가 다채롭다는 것. 이거는 진짜 살면서, 특히 의사 같은 전문직들은, 절대 못 누리는 거거든요. 저 말고 몇 분이 있어요. (나 같은 사람이) 많은가 물으셨는데 좀 있어요. 인권운동사랑방의 00도 그런 친구고, 그 분 말고도 의사 출신으로 사회운동하는 어마어마한 분들이 되게 많아요. 그분들은 뭐랄까… 제가 만나면 되게 쫄죠. 아, 저렇게 살아야 되나? 에이, 난 그냥 이렇게 살지, 하하. 저는 약간 날라리에요.”
분노했다. 울먹였다. 그러나 결국 웃었다. 에너자이저와 날라리, 황상기님과 공유정옥님을 만나면 누구든지 그렇게 될 것 같다.
강남역 8번 출구로 놀러오세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황상기님께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부탁드렸다.
“10월 7일날 반올림 농성장을 차렸는데 그때는 날도 좀 따뜻하고 오는 사람이 좀 있었어. 요새는 날이 추워지니까 사람들이 덜 찾아와요. 조금 외로워. 심심하실 적에, 시간 나실 적에 커피 한 잔 마시러 오세요. 오셔서 ‘이 나쁜 놈들!’ 이렇게 한 번 해주세요.”
이 싸움의 끝에서 우리는 함께 웃을 수 있을까? 지금은 얼어붙어 있는 그들의 두 손이 우리의 온기로 따뜻해질 그날, 함께 손잡고 크게 웃게 될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짧은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또 놀러오세요!”
여전히 밝게 인사하는 두 분과의 만남을 다시 한 번 약속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