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소비에 대한 혐오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아주 대중적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자립한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내지는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방식의 혐오는 “스타벅스를 사마시고 에르메스 백을 사달라고 남친에게 조르며, 비싼 엘라스틴 샴푸를 쓰는(모두 실존한 언설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김치녀, 된장녀라는 단어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비싼 엘라스틴 샴푸”는 실제로는 만원이면 두 통이나 살 수 있으며, 명품백의 대명사처럼 호출되는 에르메스백은 천만 원대입니다. 실체 없이 유령처럼 인터넷을 떠도는 “에르메스백을 사달라는 여친”은 도저히 일반화될 수 없는 이런 언설이 얼마나 강한 생명력을 가지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요컨대 김치녀, 된장녀를 둘러싼 언설들은 구체적인 현실의 경험에 기반하는 것이라기보다 몽상적인 혐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베를 시작으로 퍼진 ‘금테 두른 보X’라는 단어는 이 혐오의 본질을 아주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나에게도) (따)먹혀야 하는데, 너무 비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뭔가를 요구할지도 모르는’ 대상에의 혐오인 것입니다.
김치녀, 된장녀: 내겐 너무 ‘비싼’ 여성들에 대한 혐오
이러한 혐오에 짝으로 존재하는 것은, 여성에게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잘난 경쟁자’인 ‘보빨러’에 대한 혐오입니다. 하지만 ‘남성’ 보빨러에 대한 공격은 김치녀, 된장녀에 비해 부수적으로, 규모상 비대칭적으로 일어납니다. 비판의 초점은 여성과의 관계에 가치를 지불하려는 남성(‘보빨러’) 대신에, 관계의 대상으로서 남성의 적절성을 평가하는 여성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반면 정반대, 즉 연인 내지는 섹스 관계에 앞서 여성의 적절성을 (주로 외모로) 평가하는 남성에 대한 비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공격은 조금 이른 예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김중배의 다이아가 그리도 탐이 나더냐”고 여주인공의 타락을 일갈하며, 남주인공으로 하여금 여주인공의 허리를 후려차게 만들었던 ‘이수일과 심순애’는 ‘당대 최고의 외모’라는 가치를 가진 심순애를 ‘다이아 반지 없이’도 차지하고 싶어하는 남성들의 판타지임에 분명하며, 분노에 차 ‘재산’에 넘어간 심순애를 격렬하게 걷어차는 바로 그 행위야말로, ‘김치녀’라는, 지금을 지배하는 시대정신의 선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판타지, 라고 말한다면, 여성들에게도 판타지가 존재함을 떠올리실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여성들의 판타지는 우월한 재산을 가진 남성과의 결합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신데렐라 컴플렉스라고 부르지요. 여기서 판타지의 대상이 되는 남성은 경제적 지위와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모두 갖춘 이상적 상대이며, 이는 판타지가 경제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떨어지는 남성을 배제 하고 성립함을 드러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신데렐라 컴플렉스는 윤리적 비판과 비현실성을 자주 지적받으며 단어 자체가 여성의 판타지에 대한 공격으로 기능합니다.
이에 반해 남성들의 판타지는 경쟁에서 승리해 지배적인 지위에 오르고, 미인을 쟁취하는 구도가 뚜렷이 반복되며, 이 환상은 명백히 미인 이외의 여성을 배제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용인됩니다. 요컨대, 남성은 여성을 고르는 행동에 익숙한 반면 여성에 의해 스스로가 평가당하고 선택당하는 상황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김치녀, 된장녀 담론의 본질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스스로를 선택의 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한 여성들
현재 20, 30대의 전대, 그러니까 강간 피해자와 강간범을 법원에서 짝지어주던 시대에, 여성에게 결혼이란 유일한 선택지였습니다. 여성에게 남성을 선택할 권리란, 즉 한 번 받아들인 남성을 거부할 권리란 본질적으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고발한 아내들이 법정에서 듣는 가장 흔한 발언은 “이제까지 잘 참았는데, 왜 갑자기 이혼하려고 하는가(남자가 생겼는가)”였고, 가해자들은 “내가 내 아내를 때렸는데 무슨 잘못이냐”고 말했습니다(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며 여성들에게 미약하게나마 다른 선택지가 생겼고, 여성은 결혼을 많은 선택지 중 하나로 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써 ‘처음으로 거부당한 남성들’의 혐오가 발생(우에노 치즈코)하게 됩니다.
도쿄대 대학원 인문사회계 연구과 교수 우에노 치즈코는 이러한 ‘선택받지 못하는 남자들의 여성혐오’를 성 시장이 자유주의화되면서 여성에게 선택권이 생긴 반동으로 봅니다. 그녀는 이 문제를 매력자원이 불균등하게 분포된 성 시장에서 발생하는 일로 해석합니다. 혐오의 주체가 되는 남성들은 성 시장에 교환가치(사회·경제적 자원이나 신체적 자원) 외에 사용적 가치(당사자에게 있어서 유용한 가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사용적 가치란 사용자에게만 의미를 가치는 관계로서, 연애에서는 커뮤니케이션과 대인관계 그 자체가 됩니다.
그녀는 성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한 남성 약자들의 사회적 구제를 말하는 남성들에 대해 그 역이 한번이라도 성립한 적이 있냐고 반문합니다. 추녀를 사회적으로 구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한 번도 성립한 적 없는 것이지요. 나아가 남성들의 논의에서 여성이 교환가치에만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짐승으로 취급된다고 꼬집고, 자신들이 탈락되는 이유로 사용적 가치를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을 말합니다.
성 시장이 자유화되며 여성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데 비해 남성들이 여성을 바라보는 애티튜드는 성 시장이 자유화되기 전과 변함이 없다는 것, 그것이 우에노 치즈코가 내린 혐오의 원인에 대한 진단입니다. 슬프게도 이 지적은, 여성을 경제활동의 주체로 간주하지 못하고, 소비활동을 비난하며, 나아가 실제로 경제활동의 한 축을 담당하는 여성에게 여전히 가사노동과 육아를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하는 한국의 현실에도 가능할 듯 합니다.
여성들의 결혼 의사가 낮은 이유
초식남 내지 절식남이란 평가가 흔하게 통용되는 한국의 현실입니다만, 그 호들갑스러운 ‘초식남’ 열풍 아래에는 남성보다 훨씬 더 결혼의사가 낮은 여성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필수로 생각하는 남성이 아직도 50퍼센트에 육박하는 반면 동일한 질문에 여성의 대답은 30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성이 ‘자유시장화’ 되었다는 말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애티튜드가 시험받는 시대에 왔음을 말합니다. 온라인 여성담론에서 유독 여성에 대한 몰이해를 전제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발언(에르메스백이건 너무 비싼 엘라스틴 샴푸와 스타벅스건)이 쏟아져나오는 것은 성이 처음으로 자유시장화되며 이전이라면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상당수 생략하고 중매 같은 방식으로 여성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여성을 소유할 수 있었던 남성들의 책임전가에 불과합니다.
‘여성의 허들이 너무 높아 초식남 비율이 증가한다’는 발상은 나이브합니다. 그보다는, 실망스러운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애티튜드와 사회구조의 미비로 인한 결혼-공적 영역 배제, 그리고 가부장적인 사고를 탈피하지 못한 남성에 의한 가사노예화가 이어지자 여성 전반이 결혼에서 자연스럽게 이탈한 것이 현재 떨어지는 결혼율 문제에 있어 핵심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초식남 운운은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뒷북에 불과하다는 해석이 좀 더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결혼시장에서 남성은 여전히 남성 가족에 대한 여성의 헌신에 집착하는 면모를 강하게 띱니다. 예를 들어 결혼 전 상대방 부모님에게 명절을 챙겨드려야 하느냐는 질문에서도 미혼 남성은 챙겨야 한다고 답한 이들의 비율이 미혼 여성에 비해 25퍼센트 이상 높습니다. 결혼한 가정에서 여성의 친부모에게 투자하는 월간 금액과 남성의 친부모에게 투자하는 월간 금액은 두 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기혼 여성의 명절 스트레스 지수를 점수로 환산하면 사업의 파산 내지는 친구의 죽음과 비슷한 수치를 기록합니다.
‘가사노동을 아내가 대부분 떠맡고 있다’는 것은, 한국에서 가사노동의 연장선 상으로 치부되는 전근대적인 양가 사이의 관계 개선 의무마저 여성이 떠맡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국에서 아직까지 결혼은 남녀의 결합이 아니라 양가의 맺어짐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강하며, 이 구도에서 리스크는 주로 아내가 집니다.
여성들은 ‘비싸진’ 것이 아니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요는, 남성이 ‘요즘 여자들 너무 비싸’라고 징징대기 전에 여자들이 정말로 ‘비싸’진 것인지 아니면 남성들이 공유하는 남성 위주 결혼 프레임이 여성 스스로를 얼마나 파괴하는 형태인지를 깨닫게 된 결과인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자가 맞다면 남성들의 결혼을 바라보는 가치관과 태도를 여성과 비슷한 형태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여성이 결혼을 택하는 일은, 남성들이 그 많은 희생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의 교환가치를 가지지 않고서는 애초에 성립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게 싫다면, 여성을 다시 ‘오직 결혼, 오직 가정’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 외에 남성들이 택할 방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생각치 못하는 김치녀 담론, 여성의 소비를 비난하는 김치녀 담론은 바로 이런 흐름입니다.
다시 한 번 방송에서 이수일이 심순애의 허리를 걷어차는 날이 오면 남성들은 중매로, 결혼 외 선택지가 없는 여자들과 결혼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남존여비라는 혐오로의 복귀를 뜻할 뿐입니다.
출처: 학이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