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교육이 서로를 침해하지 않았던 그리스와 로마
본디 국가와 교육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둘은 엄연히 별개이며, 교육 없이도 국가가 존재할 수 있듯이, 국가 없는 교육도 그 존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에서 국가가 교육을 관장하고 규제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아, 물론 비잔틴제국 이후를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동부지방으로 쪼그라들어 갈수록 쇠퇴하던 시기의 로마는 여기서 논하지 말기로 하자.) 그리스이든 로마이든, 고대 사회에서 학교란 곳에는 공공의 원조란 것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학교란 곳은 그저 오랫동안 묵인되는 사설기관에 불과했다.
교사들은 매우 자유롭게 가르치고 연구했으며,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란 말 그대로 이 학교, 저 학교를 떠돌아다니면서 가르쳤다. 제논,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소크라테스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그러했고, 파울루스, 가이우스, 울피아누스 같은 로마 법학자들이 또한 그러했다.
선생들이 자유로웠던 만큼, 학생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웠다. 어느 스승한테든 묶이는 법이 없었다. 어느 학교를 나오면 국가공인 자격증을 얻는다든지 그런 것도 없었고, 어느 스승한테 찍히면 업계 그 어느 곳에서도 자리를 잡을 수 없다는 등의 일도 상상하기 힘들었다.
물론 국가는 관료로 써먹기 좋은 엘리트 자원이 안정적으로 양성, 보충되도록 하기 위해, 또는 빈민층의 사회적 불만과 교육에 대한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 교육에 대한 폭넓은 장려책을 쓰기도 했다. 예를 들어 교육에 필요한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고대국가는 교육에 대해 지원만 할 뿐 간섭은 하지 않았다. 플라톤에게 아카데미아를 마련해준 아테네 정부가 플라톤의 교육방침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간섭을 했겠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리케이온을 마련해준 마케도니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내용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간섭을 했겠는가?
옛날엔 학자들이 국가에게 요구하는 바가 없었던 만큼, 국가도 학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었다. 학자들이 반란을 획책하거나, 반도들을 양성하지 않는 이상, 국가가 학자들을 탄압하거나 학자들의 목을 조이는 일은 없었다.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국가의 질서와 정치권력의 작용에 직접적인 연관을 맺는 법학의 영역에 있어서도 그러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고대로마에서 변호사자격은 그냥 등록만 하면 되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등록조차 하지 않아도 변호사활동을 하는 데 전혀 지장은 없었다. 변호사로서 활동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 어떤 자격시험에 합격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법학실력과 평판이 그의 명성과 수입을 좌우했다.
로마의 법학교육은 철저히 사교육이었다. 수업료는 선생 마음대로 걷었고, 학기나 졸업자격 같은 것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위대한 법학자 밑에서 오랜 기간 법학을 배웠다 하더라도 법학실력이 없으면 변호사로서 밥 벌어 먹고 살기는 어려웠다. 재판소를 들락거리며 그저 귓동냥으로 법학을 배웠어도 실력만 있으면 변호사로서 명성을 얻고 법무관이나 호민관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법체계와 재판시스템은 갈수록 발전해갔다. 무제한의 자유와 경쟁이 법학을 그렇게 발전시킨 결과로, 폴리비오스 같은 사람이 그토록 극찬했던 것처럼 로마제국 전체가 융성하게 되었다. 애덤 스미스 국부론 제5편 제1장 제3절 제2항에도 그와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사법시험, 로스쿨 논란의 핵심
최근 사법시험의 존폐와 관련하여 법무부가 폐지시기를 4년 뒤로 유예한다는 의견을 발표했다가 다시 보류하는 등 극심한 혼란이 있었다. 사법시험 존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사법시험이 기필코 존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사법시험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법개혁의 완수’와 ‘로스쿨시스템의 안착’을 위해서라도 사법시험은 기필코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쪽 다 국가로부터 일방적인 특혜를 받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 양쪽 다 자기네들의 기득권이 법률에 의해 더 안전하게 보호를 받게 되는 쪽으로 규제의 방향을 틀어쥐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 그러나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면 둘 다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먼저 로스쿨에 대해 비판해본다. 로스쿨에 대해 시민들이 삐딱한 시선을 갖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로스쿨 사람들이 하소연해대는 것처럼, 일반시민들이 로스쿨생들을 모두 ‘금수저’로 보고 있기 때문이 절대 아니다. 일반시민들이 로스쿨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은 오직 그것 하나때문이다. “로스쿨 졸업자들이 대체 뭔데 변호사 자격을 독점하지?” 이것 하나뿐이다. 다른 것은 모두 부차적 이유에 불과하다.
그 다음 사시존치론에 대해 비판해본다. 일반시민들이 로스쿨에 대해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시존치론을 주장하는 변호사들에 대해서도 냉소적 태도를 거두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겨우 50명~200명 정도 뽑는 사법시험을 존치시킬 경우, 사시 출신 변호사는 1류 변호사가 되고, 로스쿨 출신 변호사는 2류 변호사가 되며, 그 덕분에 옛날 사시 1,000명 뽑던 시절에 변호사가 되었던 사람들은 앞으로 영원무궁토록 1류 변호사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온당하다고 보지는 않기 때문에 사시존치에 대해서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법학에 가방끈은 필수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법학이란 기술이라기보다 학문에 더 가깝다. 기술은 맨투맨식의 전수를 통해서만 습득될 수 있다. 명쾌하게 이론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특유의 감각과 임기응변 등을 통찰해내고 그 감각을 반복적으로 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의학, 특히 외과의학이나 치의학 같은 것은 이런 기술적인 측면이 매우 강조된다. 그렇기 때문에, 의학은 반드시 학교를 다니면서 배워야 한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설득력을 가질 수가 있다.
그 반면에, 법학은 학문에 더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책만 들이파도 충분히 습득이 가능하다. 비단 법학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본디 학문이란 보편적으로 명쾌하게 분석될 수 있고 해설될 수 있고 논파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좋은 스승을 만나고 좋은 동료들과 함께 공부한다면 더 수월하게 학문을 배울 수 있다. 오늘날 대학교의 존재의의가 여전히 인정될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학문에 있어서 가방끈이란 것이 꼭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학문이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독학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갖출 수 있다. 그리고 그 실력은 객관적으로 검증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 변호사 자격증 같은 것 역시 꼭 대학교육이나 대학원교육을 거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 검정고시 같은 과정에 의해서도 취득이 가능하게끔 만드는 것이 자연스럽다.
더군다나 오늘날의 대학과 같이 철저히 관료주의적이고 서열화되어 있는 교육기관에서 법학을 그 어느 곳보다도 더 잘 가르칠 수 있다고 일백퍼센트 자부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대학이란 학문의 자유나 학문의 정신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이다. 좀 독하게 얘기하자면, 촘촘한 규제가 기득권을 보호해주는 것에 힘입어서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비효율적 취업기회주의자 양성소라고까지 폄훼해서 말할 수가 있는 곳이다.
(* 굳이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나마 대학교만큼 학문을 잘 가르칠 수 있는 곳도 드물긴 하다. 대학교 특유의 커리큘럼에 따라서 안정적으로 코스웍을 마치는 것의 장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 선천적으로 그리 적합하지 않은 기질을 가진 사람들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자유롭게 학업계획을 짜고 시간을 단축해서 독학하는 데 최적화된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대단히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젊었을 때 방황의 기간이 길었다거나, 집안형편이 어렵다든가 해서, 여러 가지 여건상 대학교육과정을 불필요하게 생각하거나 부담스럽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꽤 존재한다. 더구나 로스쿨은 학부과정도 아니고 3년짜리 대학원과정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대학원 교육과정을 꼭 마쳐야만 법조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런 사람들도 법조인이 될 수 있는 별도의 과정 역시 마련해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시존치론을 논하기 앞서: 암기력 위주의 사법시험은 올바른가
물론 사법시험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찬가지의 비판을 할 수 있다. 오직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들만이 뛰어난 법학실력을 인정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누구에게나 확신하듯 말할 수 있겠는가? 이에 관해 오해의 여지가 있을까봐 미리 밝혀두지만, 나는 결코 사법시험 합격자들의 법학실력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사법시험 합격자들은 법학실력을 충분히 갖춘 사람들이고, 거기에 더해서 장시간 동안 엄청난 공부량을 견뎌낼 수 있었을 정도로 정신력과 지구력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점에 의심할 여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사법시험에 불합격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법학실력이 변호사자격을 얻지 못할 만큼 나쁘다고 확언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우리나라의 사법시험은 지나치게 암기력 위주로 평가하고 있다. 과목별로 차근차근 합격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한 채로, 오로지 모든 과목을 한꺼번에 완벽하게 암기해서 짧은 시간 안에 실수 없이 다 쏟아내야만 합격할 수 있게끔 그 시험체계를 짜놓고 있다. 이것은 결코 진정한 법학실력을 평가하기 위한 시험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소수의 합격자를 위해 다수의 실력자들을 떨어트리기 위해 만든 시험이라고 봐야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시존치론을 주장하시는 분들 가운데 이러한 사법시험의 문제점을 개선하자고 하시는 분들이 있었는가? 내가 보기에는,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과연 이런 식의 사법시험을 존치시키는 게 바람직하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이 자원배분의 효율성 측면에서든, 직업의 자유 측면에서든 허용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법조인력양성체계, 총체적 개혁이 필요하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우리나라의 법조인력양성체계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안하고자 한다:
- 법조인력양성을 로스쿨로 일원화할 필요는 없다. 로스쿨을 나오지 않더라도 법조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예를 들어 예비시험이나 검정고시 등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
사법시험은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설령 존치하더라도 시험장에서 오픈북을 허용하여 암기력보다는 응용력을 평가하는 방향으로 가야만 한다. 그리고 과목별 합격제를 과감하게 도입하여, 운에 좌우됨이 없이 철저히 법학실력만 측정하는 절대평가시험으로 제도를 완전히 개편해야 한다. 물론 로스쿨 변호사시험도 그런 방향으로 개편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법시험이든 변호사시험이든, 성적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
로스쿨에 대한 모든 규제를 풀어버려야 한다. 커리큘럼, 교육연한, 입시제도, 수업료, 장학제도… 모든 것을 각 로스쿨별로 자유롭게 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로스쿨을 대학원에만 설치할 수 있게끔 하는 것도 불필요한 규제이다. 학사과정에도 로스쿨을 설치할 수 있게끔 규제를 완전히 풀어버려야 한다. 각 대학별로 로스쿨인가도 자유롭게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다만 입시비리 여부는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그리고 자유로운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은 로스쿨만 법조인을 양성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상과 같은 것이 실현되어야만, 이른바 ‘사법개혁’이란 것도 제대로 완수될 수 있고, ‘개천룡’도 더 많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자유롭게 풀어주지 않는 이상, ‘로스쿨제도의 안착’ 역시 헛된 꿈에 불과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어느 영역이나 다 마찬가지이듯이, 교육의 영역에서도 국가가 과도하게 간섭하고 규제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특히 그것이 정책에 따른 기득권의 보호, 또는 정책기득권에 대한 신뢰(?)의 보호와 관련된 것일 경우, 그러한 규제는 불공평하며 부조리하다고까지 비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학자들은 모름지기 자기 자신이 학자라고 생각한다면, 국가로부터 뭔가를 받아내기 위해 징징대는 작태를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 앞으로 사법시험 존폐와 관련된 논쟁이 보다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