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학교=배움의 중단, 오래된 공식
탈학교, 즉 학교 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결코 배움을 중단하는 것이 아닌데도 대다수의 학교 밖 청소년들은 탈학교를 하는 동시에 ‘배움의 중단’이라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한국 사회에 ‘탈학교’라고 호명할 수 있는 현상이 시작된 뒤,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할 수 있다.
탈학교 이후 학교 밖 청소년들의 ‘배움 중단’의 원인으로 청소년 개인의 무기력 혹은 하류를 지향하는 습지적 생활양식, 경제·사회·문화적 자본이 취약한 가정의 상황 등을 지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적확한 원인은 탈학교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배움을 이어갈 수 있는 ‘학교 밖 교육생태계’의 부재다.
학교 밖 청소년, 배울 자리를 박탈당한 이들
주지하듯이 청소년 시기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배움을 경험하며 진로와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다. 그나마 학교를 다니는 청소년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둘러싼 교육생태계를 통해 이러한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학교 밖 청소년들은 탈학교 이후 그들의 특성과 성장 속도에 맞는 교육생태계의 부재로 인해 배움과 성장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이는 매우 심각한 교육권 침해다. 왜냐하면 청소년들이 무언가를 배우기 싫어하는 것과 배울 장소가 없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렌트식으로 패러디하면 배우고자 하는 학교 밖 청소년은 없어도 학교 밖 청소년을 위한 배울 자리는 언제나 마련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학교라고 하는 특정한 배움의 방식을 거부했을 뿐이다. 이 방식에 대한 거부가 모든 배울 기회와 권리에 대한 박탈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지역 곳곳의 ‘비인가 대안학교’, ‘십대인권센터’들이 이를 극복하고자 고군분투하고는 있지만 정부의 장기적인 학교 밖 청소년 지원 대책에 기초하지 않은 일시적인 지원으로는 역부족한 상황이다(매년 지원금이 나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운이 좋으면 나오는 거고 그 반대면 나오지 않는다. 말그대로 교육부 윗분들 마음대로다!).
교육부와 여성가족부 역시 지역사회 전문가 및 학교 상담사, 사회복지사를 배치하고 청소년상담복지센터, 학교 밖 지원센터를 설립하는 등 대책을 마련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들의 대책은 ‘탈학교 이후’의 배움보다는 ‘탈학교 이전’의 예방을 위한 정책에 많은 자원을 지원하고 있고 장기적인 배움과 성장을 위한 학습과정보다는 일시적인 검정고시 준비나 진로체험 정도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에 머물러 있다(검정고시합격과 진로체험연계는 이들에게 주요 성과-실적이 된다).
이는 장차 국가적으로도 큰 위기가 될 수 있다. 왜냐면 모두가 “잘 알고는” 있듯이, 청소년은 앞으로 국가와 사회를 짊어질 ‘주역’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회비평가이자 교육학자인 헨리 지루의 말처럼 현재의 시점에서 국가와 사회의 미래를 논한다는 것은 언제나 청소년의 현재 상태를 묻는 데서 시작되어야 하며, 이는 청소년을 위해 어른세대와 국가가 ‘자기 일’처럼 책임을 지고 교육환경을 조성하는 일과 결부되어 있는 문제다.
학교 밖 교육생태계의 부재, 한국교육의 현재
2014년 교육부의 발표에 따르면 근 5년간 매년 6만 여명의 청소년이 학교 밖으로 나오고 있다. 이 통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기본적인 사실 하나는 이제 더 이상 탈학교 현상은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될 수 없으며 그에 따른 학교 밖 청소년을 위한 교육생태계 조성 역시, 필연적인 동시대적 과제라는 것이다.
소수자가 겪는 차별과 고통이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말해주는 척도가 될 수 있듯이 탈학교 이후 배움과 성장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는 학교 밖 청소년들의 현재 상황이 현재 한국의 교육정책 그 자체일 수 있다. 바야흐로 ‘교육 불가능(성)의 시대’가 한국사회에도 도래했다. ‘탈학교 이전’을 위해 예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탈학교 이후’를 위한 교육생태계 조성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모두 알고 있는 상식 하나를 말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모든 청소년에게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공간에서 배울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