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봄을 타고 남자는 가을을 탄다고 했다. 잘 생기고 예쁜 남자들이 가을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서로를 탐한다면 부녀자로서 어찌 아니 좋겠는가. 사실 동인녀라면 계절 상관없이 언제 봐도 좋고 언제나 생각하고 있는 게 BL이다. 언제 봐도 좋고 또 봐도 좋고 계속 봐도 좋은 추천 BL 12권을 BL 전문 웹툰 서비스 <만두코믹스>의 후원으로 제작해 봤다.
1. <텐댄스>, 이노우에 사토
전문소재 + 비엘이다. 춤을 소재로 한 만화로, 라틴 댄스의 넘버원과 스탠다드 댄스의 넘버원(작중에선 어른의 사정으로 넘버투지만, 사실 1위)이 서로에게 춤을 가르치면서 아웅다웅하는 내용이다. 두 남자 모두 너무 열심히 춤을 추느라 연애는 뒷전일 정도. 둘 다 ‘너에게 지고 싶지 않아…!’라는 마음의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브로맨스에서 한 발 더 나아간 비엘이라 할 수 있다. ‘지고 싶지 않다 → 잘 하고 싶다 → 상대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로 마음이 발전함에 따라 독자 역시 선덕대게 된다. 댄스 스포츠의 두근거림도 느껴지는 좋은 만화, 매우 추천한다.
두 남자의 파트너인 여자 캐릭터들은 아주 잠깐만 나오는데도 굉장히 매력 있다. 개인적으로는 비엘인데도 이 언니들을 더 자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
2. <부디 내게 닿지 않기를>, 요네다 코우
새삼 추천하지 않아도 2013년 아마존 재팬 판매순위를 휩쓴 작가다. 처음 접하기로는 <가정교사 히트맨 REBORN!>의 동인지였는데, 그때도 이미 캐릭터만 따왔을 뿐 내용은 충분히 1차 비엘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부디 내게 닿지 않기를>은 소심한 게이 시마와 사람 좋은 직장 상사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같은 작가의 <지저귀는 새는 날지 않는다>도 좋지만, <부디 내게 닿지 않기를>을 새삼 추천하는 이유는 시마 같은 캐릭터의 감정 표현에 요네다 코우가 가장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마는 조용한 성격에 고민이 많고, 한 번 배신당했던 기억도 있다. 그런데도 읽으면서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주위에서 이미 시마를 답답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 독자는 그런 주변인물들이 너무하다고 생각하면서 시마의 편에 서게 되고, 매끄럽게 감정이입하여 이 러브스토리를 따라가게 된다.
3. <모 썸 스팅>, 야마시타 토모코
야쿠자 + 여고생 + 비엘,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이 다 들어있다. 야마시타 토모코의 여고생이 대체로 그렇듯 매우 당차고 씩씩한 아가씨가 중심인물로 등장하여, 아빠를 잃지만 야쿠자인 삼촌과 그 삼촌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도움을 받는 이야기다.
여고생은 도움을 받기만 하는 게 아니다. 여기 나오는 남자들 모두가 그 여고생에게 감명받아 조금씩 성장하게 되는데, 때문에 게이 연애가 보고 싶은 욕망과 게이 친구에 대한 환상 두 가지 모두가 충족된다는 것이 추천 이유다… 구성도 좋고 와닿는 대사도 많다.
4. <어리석은 자는 붉은색을 싫어한다>, 에스토 에무
이 작가는 이국적인 느낌을 잘 표현해서 독자를 굉장히 두근거리게 만든다. 독자가 이국에 갖는 환상과 비엘에 갖는 환상을 양쪽으로 충족시켜준다. 터키를 배경으로 한 <쿠쉬라르>도 유명하다.
<어리석은 자는 붉은 색을 싫어한다>는 스페인이 배경이다. 추천하는 이유는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이 확장되어 지금의 에스토 에무가 되었구나’ 싶을 정도로, 작가의 작품세계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투우, 구두, 축구, 발레를 소재로 한 단편들이 실려있다. 투우는 소 이야기지만, 에스토 에무의 켄타우로스 사랑과 같은 맥락이 느껴진다. 소와 말에서 느껴지는 섹시함을 사람에게로 확장시키는 느낌이랄까. 구두를 소재로 한 에피소드는 이 이야기가 발전되어 가 된 게 아닐까 싶고.
언젠가는 에스토 에무가 축구만화나 발레 만화를 해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5. <여기저기>, 코시노
<여기저기>는 담배 피우다 들킨 벌로 화단을 돌보게 된 나카지마가 바로 옆 회사에 다니는 샐러리맨 마츠자카와 티격태격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 받으며 친해지다 연애에 이르는 이야기다. 풋풋한 연하공 + 어른스러운 연상수 조합을 보여준다. 여유 없이 마구 돌격해버리고는 후회하기를 반복하는 나카지마가 귀엽다. 마츠자카는 남자와의 연애는 처음이라 어설프다고 하면서도 역시 어른은 다르다는 느낌으로 나카지마를 리드해간다.
반면 생활에서는 나카지마가 마츠자카를 돌보는데, 이 역시 귀엽다. 밥도 해주고 욕실 청소도 해주고 잔소리도 하고 등등. 이런 식으로 공이 수를 이것저것 챙겨주고 돌봐주고 잔소리하는 귀여운 장면들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동아리 후배가 들이대고 있습니다> 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6. <변애>, 하라다
이런저런 변태섹스가 잔뜩 등장한다. 평소에는 그런 것에 딱히 개의치 않았으나, 일본판을 보고 나니 이제껏 스스로가 얼마나 소박한 행복에 만족해왔던가 하는 억울함이…
<변애>를 보다 보면, 에로한 것을 잔뜩 그리고 싶다는 작가의 욕망에 감명 받게 된다. 역할놀이, 어설픈 남고생들의 섹스, 교사와 학생의 SM 플레이 등등… 특히 남고생 두 명이 주인공인 <내 동급생이 너무 민감해서 위험해>는 ‘성욕이 넘치는 남자 아이 둘이 호기심에 서로 그만…!’이라는 판타지를 완벽하게 충족시켜준다. 흔한 판타지지만, ‘그래 바로 이런 게 보고 싶었어!’라는 느낌. 포르노는 원래 취향에서 살짝만 빗겨나도 아쉬운데, 변애의 단편들은 그런 면에서 완벽하다.
7. <남자미로>, 아니야 유이지
이전 에피소드의 조역이 다음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되어 이어나가는 연작 모음집이다. 게이 쌍둥이, 만나는 상대마다 상처주고 싶어하는 성격 나쁜 바텐더, 얼굴 예쁘고 순진하지만 사실은 공인 남자학생 등이 얽혀 있다.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열심히 남자를 유혹하려고 하기 때문에 재밌다. 공이나 수나 전부 끼순이다.
2화에서는 신이라는 캐릭터가 자기가 아직 게이인 걸 모르는 코다마를 쫒아다니는 것을, 코다마의 구여친인 요우코의 시점으로 보여준다. 요우코는 내내 화자로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다가, 마지막 순간에 신을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데, 순간 주인공이 되는 요우코의 얼굴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여캐를 매력적으로 표현하는 비엘 작가를 좋아한다.
8. <O.B.>, 나카무라 아스미코
그림만 봐도 굉장히 애절할 것 같다. 나카무라 아스미코는 실제로도 섬세하고 연약한 감정을 잘 그려내는 작가다. 표지에서는 슬픈 엔딩이 예상되지만, 의외로 두 사람의 사랑이 단단해 안심이 된다. 차갑게 생긴 흑발 안경이 사실은 걱정도 많고 어리광쟁이라는 점이 매우 마음에 든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인 <철도순정만화>나 <우츠보라>도 아름답고 기묘한 느낌을 준다. 작품의 분위기에 따라 화풍도 조금씩 바뀐다. 선이 가늘고 야할 때도 있지만, 밝고 귀여운 느낌으로 그리기도 한다.
9. <방주>, 모로즈미 스미토모
외로운 청소년 게이들의 이야기 모음집이다.
<방주> 라는 제목에 걸맞게 어딘가 도피처가 필요한 남자들이 나온다. 매춘을 하고 있거나, 가정폭력을 당했거나, 파트너가 화가 나서 나가버렸거나, 짝사랑을 하고 있거나. 대부분의 BL이 그렇듯 해피엔딩이지만, 그렇다고 사랑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미성년자인 주인공이 대부분이기도 하지만, 성인들도 동글동글 아기 같은 그림체 때문에 더 마음이 간다. 배경이나 사물도 섬세하게 잘 그린다.
10. <네거티브군과 포지티브군>, 히데 요시코
늘 긍정적인 타치바나와, 늘 부정적인 후지와라가 연애를 한다. 반대되는 성격의 두 인물을 붙여놓아서 캐릭터가 살아난다. 개그 센스도 좋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 두 사람의 반응은 완벽하게 정반대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매우 사랑하고 아낀다는 결론에 이른다. 늘 긍정적인 타치바나도 후지와라와의 관계에서는 불안해하는 면이 있고, 늘 부정적인 후지와라군도 타치바나에게는 기대하는 것을 보는 게 즐거웠다.
11. <네가 멍청한 소리를 하는 날에는>, 히도우 테이
이야기 자체는 굉장히 흔하게 볼 수 있는 boy meet boy 다. 한쪽은 원래 게이, 한쪽은 이성애자. 첫번째 에피소드는 선후배로 오래 지내던 남자들의 이야기로, 오래전 커밍아웃한 게이 선배와, ‘선배, 나 게이일지도 몰라. 누구 하나 소개시켜줘봐.’ 라는 , 무신경하고 뻔뻔스러운 후배의 이야기. 두번째 에피소드에서는 ‘호기심에서 오는 무례한 치근거림은 귀찮다고! 넌 노말이잖아!!’ 라고 짜증내는 게이청년과, 느물느물한 아저씨(사실 이성애자일 리가 없다)와의 관계가 재미있다. 세번째는 연극 대본을 쓰는 청년과 그 청년이 앉아서 글을 쓰는 카페 직원의 이야기.
대부분의 BL이 담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디테일과 연출이 좋다. 자료조사를 많이 했다는 느낌. 서로 티격태격하거나, 계속 들이대고 거절할 때 치고 받는 대사들도 깨알 같은 재미가 있다.
12. <애 딸린 늑대>, 이노우에 사토
텐댄스의 작가 이노우에 사토의 또다른 작품. 애 딸린 이혼남 둘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우연히 아파트 위아래층으로 이웃이 되고, 비슷한 처지의 싱글 파파로서 고민을 나누다보니 금방 가까워진다. 그러다 어느날, 둘이 애 재우고 술 마시다 그만…
이노우에 사토는 소재에 충실한 점이 좋다. 싱글 파파를 소재로 했으면 싱글 파파를 깊이 있게 다루고, 춤을 소재로 한 비엘이면 춤을 깊이 있게 다룬다. 그에 따라 작품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등장인물들의 성격도 다양하다. 담배를 소재로 한 스모커도 추천.
영업의 변
추천할 만한 작품은 남들이 다 봤을 만한 작품이라 다 아는 얘기를 이렇게 해도 되나 조금 부끄럽기는 했지만, 각 작가, 혹은 작품의 팬으로서 이것저것 영업을 해보았다. ‘이거 이거 진짜 재밌다니까!’하고 외치는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