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JTBC <밤샘토론>에 나온 한국학중앙연구원 권희영의 발언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권희영 패널의 논지는 한 마디로 “현행 교과서에는 국적이 없다”는 것이다. 있는 것은 인민민주주의가 우월한데 안 돼서 안타깝다는 입장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내가 대학에 와서 배운 운동권 커리집에나 어울리는 평가다. 현행 교과서에 왜 국적이 없나. 나는 한국이 어떻게 형성된 사회인지, 적어도 내가 배운 교과서에 따르면 어떤지를 한 번도 모호하다 느껴본 적 없다.
교과서에서 내가 배운 대한민국은 열강들 사이의 세력다툼에 휘말린 어지러운 상황에서 논쟁적인 분단선거를 통해 세워졌고,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엉망으로 망가진 채 반토막으로 갈라졌으며, 그 이후로는 거의 40년을 독재의 폭압 아래 신음해야 했던 신세 사나운 나라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기적같이 4.19를, 전태일과 민주노조운동을, 5월 광주를 낳았고 이 기나긴 싸움 끝에 87년 선거 민주주의를 피치자의 손으로 쟁취한 위대한 나라였다.
권희영 씨가 원하는 ‘국적’이 무엇인지는 내 잘 알겠다. 그의 대한민국에서는 건국이, 6.25가, 군부 독재가 업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모든 것은 의도했건 아니건 ‘인민민주주의’를 향한 헛된 시도이며 그의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불온했던 사건들일 뿐일 것이다. 당신들이야 이 나라를 그토록 험한 신세로 몰아넣었던 주범 공범들의 후손들, 혹은 그 주변에서 떡고물 챙겨먹는 치들이니 당신들의 나라야,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다. 국적이 없는 것은 당신들이다. 당신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모든 역사적 업적을 ‘독재와 반민주가 우월한데 그게 안 돼서 안타깝다’는 식으로 매도하고 폄훼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취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자긍심을 불어넣어줘야 한다는 말은 당신들이나 들어야 한다.
우리는 당신 같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폐허에서 전진하고 또 전진해왔고, 한계적이나마 몇 번의 중요한 승리를 얻어냈다. 이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현재 존재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상태에 대한 인정을 ‘국적’이라고 부른다면, 당신들이야말로 30년 전에 치명상을 입고 사라져가고 있던 나라의 유령을 이 땅에 소환하고 싶어하는 무국적자다.
덧, 물론 나는 대학에 와서 배운 운동권 커리집의 관점을 신념으로 삼고 사는 극좌파이고 따라서 무국적자가 맞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된 것은 교과서 때문이 아니라 교과서에 반해서다.
원문: 류한수진 페이스북